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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FTA보다 새로운 북방정책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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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FTA보다 새로운 북방정책이 우선이다

[한반도 브리핑] 한반도, 각축장 아닌 완충지로 만들어야

올해는 한중 수교 20주년이다. 20년 전 중공(中共)이라고 불리던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것은 실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소련 몰락 이후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후견 또는 후원국으로 인식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비록 의용군이라는 형식을 띄기는 했지만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해 궁지에 몰린 북한을 돕고 한국전쟁을 장기전으로 몰고 간 장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한국 사회에는 이념적으로도 '반공'이 깊숙이 뿌리 받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중공과의 수교, 그것도 한국이 자발적으로 또 주동적으로 움직여 이루어 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적으로 간주되었던 중국과의 수교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기인한다. 북방정책은 1988년부터 추진한 제6공화국의 대공산권 외교정책인데 두 가지 큰 목적이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사회주의권과의 관계정상화와 국제시장 확보였다. 북한을 포위해 궁극적으로 북한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북방정책의 진정한 목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북한의 붕괴를 이끌어 북한을 흡수통일 한다는 것은 당시 한국의 국력(1988년 한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5000달러가 안 됐다)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없다.

북방정책이 궤도에 오르고 한중 국교정상화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소련 붕괴 같은 국내외의 외교환경이 만들어준 개연성의 덕택이 컸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 두 야권 지도자의 분열로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정권의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노태우로서는 경제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은 5공화국 시절인 1986년 사상 최초로 무역흑자를 냈으나, 이것은 당시 3저 효과(저유가, 저이자, 저환율)에 힘입은 것이었지 구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최대 무역국이었던 미국은 지속적인 재정·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하며 이것이 순조롭지 못할 때에는 정부의 협조개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는 등의 내용에 합의한 '플라자합의'에서 볼 수 있듯이 보호무역으로 가고 있어서 한국은 성장을 위해 새로운 시장이 절실히 필요할 시기였다.

북방정책은 1987년 6.29 선언 후 민간의 통일운동이 고조되자 6공 정부가 이를 무마하고 상황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택한 것과 같이 상황대응적인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으나, 이것의 배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반도(남·북한) 번영의 필수적인 공식인 남북화해 그리고 경제협력을 담아내고 있어 상황대응적인 조치보다는 국가의 흥망이 걸린 필요성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북방정책이 골격을 갖추기 전 6공 정부는 두 주권국가의 연합을 과도기 단계로 인정하고 있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포함된 이른바 7·7 선언을 88년에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남·북한간의 적극적인 교류를 제의하고,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관계 개선하는 일에 협조할 뜻을 선언했다. 북한도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남북화해가 선결과제임을 인식하고 남한의 교류 제의를 수락했다. 이것의 일환으로 1990년 9월부터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회의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는 동안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열리고, 남북의 축구팀이 통일축구대회를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가졌다. 1991년 4월에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5월에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해 세계탁구선권대회에서는 여자 단체전 우승도 이루어 내었다.

북방정책이 담고 있는 대북 화해정책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서거 후 조문 파동으로 김영삼 정부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만약 보다 강화된 형태로 이어졌더라면 현재 남북관계는 통일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만큼 성숙해졌을 것이며 북핵 문제는 이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 경제의 축이 동북아시아로 전이되고 있는 현재 남·북한은 그야말로 그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동북아시아 개발을 주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비판할 것이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고, 국제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북방정책의 최대의 성과인 한중 수교를 살펴보면 그러한 상상과 기대가 단지 희망사항이라고 털어버리기 어려워 보인다. 한중관계는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수교 당시 '우호협력관계'에서 2008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형태로 지속 발전되어왔고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양국 간의 발전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졌다. 1992년 수교 당시 63.7억 달러에 불과한 무역 규모는 2010년에는 1884억 달러로 무려 29.6배나 상승하였다. 2003년부터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국이자 흑자국이 되었는데 이것은 2위나 3위권인 유럽연합(EU)이나 미국 등 주요 교역국을 모두 합친 것보다 중국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의 지원과 도움으로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를 이룰 수 있었다면 동북아시아에서 남·북한의 영향력은 제고되어 한반도는 현재 우려되는 북한, 중국, 러시아를 한 축으로 하는 대륙세력과 남한, 미국, 일본을 또 다른 축으로 하는 해양세력의 대립 각축의 장이 아닌 두 세력을 완충하고 나아가서 협력을 도모하는 평화와 번영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도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할 때 한반도는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으며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 이점을 무시·망각할 때 한국은 필연적으로 외교적·경제적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양국 외무장관의 건배 ⓒ연합뉴스

미국의 새로운 방위전략과 한중 FTA

경제 위기를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은 국방비를 대폭 축소시켰는데 이것의 일환으로 이라크에서 병력을 이미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병력도 2014년까지 완전철수할 계획을 공식화했다. 무엇보다 기존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을 포기하고 한 지역에서만 수행할 수 있도록 전략을 수정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듯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만큼은 기존의 병력을 유지하겠다고 한다.

국방비가 대폭 축소되는 상황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기존의 군사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은 결국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에 방위비를 분담시키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 역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부담이 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군사정책이 중국의 반발을 사고 있다는 점이며, 한국에 중국은 최대 무역국일 뿐 아니라 최대 교류국이라는 점이다. 한국이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한국은 자신의 최대 무역국이며 가장 중요한 교류국인 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미국의 군사전략에 직접 동참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한편 중국은 한국에 자유무역협정(FTA)을 요구하고 있다. 전방위·전면적 FTA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에 더군다나 미국과의 FTA를 채결한 상황에서 최대 무역국과 FTA는 그냥 미룰 수만 없는 문제이며 중국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없다. 그러나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여론이 아직도 만만치 않고 FTA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 대책이 확고하게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한국이 중국과의 FTA 체결을 추진할 수 있을까? 또 중국의 이러한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외교적 딜레마, 그리고 증폭되는 경제 문제는 남·북 화해·협력을 도모하는 정책이 외교정책에서 우선순위가 되는 것을 무시·망각해서 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이 안정을 기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은 그리 많지 않다.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해 대륙과 해양세력이 만나는 한반도 전체를 평화지대, 화해지대, 협력지대로 만들어 가는 것이 남·북 모두가 생존·번영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며 동북아 시대 '고래등에 끼인 새우'가 아닌 주역이 될 수 있는 길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 김정일 사후 북한 지도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개발이다. 북한은 스스로 강성국가를 이루기 위한 세 가지 고지 중 사상정치, 군사를 이미 달성했다고 하고, 이제 남은 것은 경제라고 한다. 북한의 주장대로 실제로 사상정치, 군사에서 강성국가를 이루었는지는 또 무엇이 강성국가인지 의문이나 여지가 있으나 북한 입장에서 현재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는 명확하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북한 지도부는 김정일이 김일성 사후에 그랬던 것과 같이 유훈통치로 북한을 이끌어 갈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은 다르지 않다. 경제개발, 경제성장, 경제발전이다.

그러면 북한에 또 퍼주자는 말인가? 북한 퍼주기는 현실과 진실을 호도하는 정치적 구어이다. 개성공단을 사례로 들어 살펴보자. 북한과 남한의 경제는 상호보완적이다. 북한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잘 훈련된 노동력을 갖고 있고, 남한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본과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비교우위에 바탕을 둔 개성공단은 지난 2004년 가동을 시작한 이래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공단 누적생산액은 14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재작년 5.24 조치가 취해진 상황에서도 월평균 3000만 달러이상의 생산액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설립 초기 18개사에 생산액 1490만 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기업 수는 7배 가까이 늘었고 연간 생산액은 20배 이상 급증했다. 개성공단은 남한의 중소기업에게 가장 선호하는 투자처이며 그들이 겪고 있는 불황을 해결하는데 이상적인 방안이다.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 경협이 남포, 원산, 함흥, 신의주, 나선지구로 확장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이러한 남·북 경협의 확장은 북한에게 일방적인 퍼주기가 아닌 남·북 모두에게 '윈-윈'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남·북 경협의 확장과 심화는 남·북 화해를 도모할 것이며 이것은 남·북이 동북아 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는데 기반과 지렛대가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은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북방정책이 절실하다. 새로운 북방정책은 조건 없이 금강산 관광 재개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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