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나진 지역을 거점으로 한 북중 경제 협력은 심화되고 있고, 지난 8월 북러 정상회담에서는 남-북-러 가스관 연결에 대한 초보적인 합의가 있었다. 내년에 대통령으로 돌아가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11일 중국을 방문해 양국간 정치·경제 관계의 강화를 꾀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의 교류·협력은 '사실상의 통일'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활발해졌다.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가인 존 페퍼 포린폴리시인포커스(Foreign Policy in Focus) 소장은 지난 4일 정치평론 사이트 '톰 디스패치'에 기고한 글을 통해 동북아 변화의 열쇠를 쥔 나라로 북한을 지목했다. 대륙과 해양을 잇는 천혜의 입지를 가진 북한이 강성대국 달성을 위해 주변국들에 '매력 공세'를 적극 펴면서 그동안 '구상' 수준에 머물러 왔던 동북아의 재편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페퍼 소장에 따르면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할 나라는 한국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4월 재보선 패배 이후 대북정책을 비교적 유연하게 바꾸고 있다. 이어 내년 대선이 지나면 설령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명박의 노선을 버릴 것으로 예상된다. 2012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 한국의 변화는 동북아의 재편을 더욱 빠르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다. '태평양 강국'으로의 면모를 일신하겠다고 등장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아시아 정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페퍼의 진단이다. 대북정책은 더더욱 그러하다. 북한과의 미세한 관계개선 움직임에도 '불량국가와 타협한다'는 공화당의 공격이 두려운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전에 동북아시아에 '정치적 자산'을 쓸 의지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내년 말 재선에 성공한 후에 동북아 정책을 바꿀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페퍼는 '그때는 이미 늦을 것'이며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외톨이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퍼의 분석을 뒤집어서 보자면, 동북아시아의 재편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나라 역시 한국이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의 미세조정마저 중단해 버린다면, 이명박 정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대북정책을 펴는 정부가 다시 들어선다면 동북아의 질서 변화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정책을 바꿀 의사가 별로 없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저토록 열을 올리는 것은 동북아 내 영향력의 추락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러한 미국의 시도가 동북아 재편이라는 대세를 막을 수 있을지 지켜 볼 일이다. 다음은 페퍼 소장 글의 주요 내용이다. (☞원문보기)<편집자>
▲ 김정일 러시아 방문 장면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2012년은 왜 아시아와 세계를 흔들까?
미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태평양의 강국이라고 불러 왔다. 1899년 필리핀을 차지했고, 2차 대전에서는 일본의 무릎을 꿇렸다. 그 후 중국과 맞섰고, 한반도를 분단시켰으며, 대만을 무장시켰다. 오늘날에도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 군사 기지, 양자 동맹, 10만 병력을 두면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태평양 지역 내 미국의 위상과 영향력은 하강 국면에 있다. 이 지역의 지정학은 다시 짜이고 있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밀집된 동북아시아는 바야흐로 전환기에 놓여 있다. 여전이 온 신경을 중동에 쓰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에 있는 미국은 [동북아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이다.
선거는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2012년에는 한국, 러시아, 대만에서 선거가 있다. 중국 공산당도 새로운 지도자를 세운다. 중국의 새 지도자는 중국이 세계 경제 2위 국가에서 1위로 부상하는 과정을 관장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다가오고 있는 진정으로 놀라운 상황은 다른 곳에서 오고 있다. 변화를 촉진하는 나라는 지금까지는 거의 변하지 않았던 나라, 북한이 될 것이다.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을 만들겠다고 공언해왔다. 식량 부족, 경제난,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북한 정부는 강성대국에 대한 약속을 어느 정도는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그에 따라 북한은 적극적인 외교적 행보를 보이고 있고, 태평양 지역의 핵심적인 나라들에 이미 엄청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수년간 북한의 작은 핵무기에만 관심을 쏟아 온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거대한 변화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도 아시아의 변화는 쟁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일자리나 건강보험 문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 공화당 도전자가 변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논쟁하고 있을 뿐이다. 뻔한 중국 때리기 말고는 아시아에 대해 거의 언급도 안 된다.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줄까 두려워하는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 정책을 만지작거리는 걸 질색할 것이다. 현재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자동 조종'(autopilot) 상태로 가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동아시아를 재편하려고 하는데 반해, 미국은 자신만의 독특한 지정학(continental drift) 때문에 힘든 상황에 빠질 것이다.
관심을 모으는 평양
북한 정권은 김일성 탄생 100년을 맞는 2012년을 전환의 해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북한은 경제 자립을 주장하지만 우방국들로부터의 많은 도움을 통해서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북한은 우방국 외의 나라들과는 잘 지내지 못했다.
북한은 [우방국 외의 나라들에는]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의 매파적 대북정책에 대한 대응이 그러했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천안함 사건(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연평도 포격 사건은 남북관계를 급격히 냉각시켰다. 그 기간 동안 북한은 2차 핵실험을 감행해 동맹국인 중국조차 불편하게 만들었다. 또한 북한은 오랜 동안 부인해왔던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 생산 프로그램을 2010년 공개했다.
북한의 이러한 행동들은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한국은 북한과의 모든 경제협력을 중단했고, 2차 핵실험은 미국과의 초보적인 경제 협력도 힘들게 했다. 북중관계만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중국이 북한에 식량과 에너지를 제공해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대신 북한산 광물과 항구[나진항]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은 정치적인 동요로 이어졌어야 했다. 북한의 지도부는 70세인 김정일이 가장 젊은 사람일 정도로 노쇠했고, 김정일의 후계자 김정은은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것 외에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북한이 현재 전면적인 붕괴 상황에 가까워진 것 같지는 않다. 강압적인 제도가 있고 시민사회는 부재한 상황에서 가까운 시기에 '평양의 봄'이 올 여지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강성대국의 해에 피폐한 경제를 활성화하고 차기 지도자를 띄우기 위해 북한은 갑자기 '협상하자'는 태도(let's-make-a-deal mode)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북중 정상회담은 놀라웠다. 김정일은 핵무기 생산·실험의 유예 가능성을 언급했다.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에 대한 초보적인 합의를 이룬 것은 지역정치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합의였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가스를 북한을 거쳐 한국으로 보내는 프로젝트였다. 그로 인해 북한 정부는 매년 1억 달러를 벌 수 있다.
그러한 북한의 새로운 매력 공세(charm offensive)는 한국도 북한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경우 성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불도저'의 오산
'불도저'란 별명을 가진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당시 남북관계의 틀을 새롭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포용정책'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불균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남측에서는 현금을 줬는데 북한이 변한 건 없었다며, 상호주의적인 관계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tit for tat) 전략으로, 과거보다 강경해진 말과 군사 행동이었다. 그 결과 북한은 [이명박의] 한국과 친구가 될 수 없었지만, 남북 적대의 새 시대는 이명박 정부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비교적 평화롭던 남북관계가 군사적 충돌 일보 직전까지 방향을 트는 상황을 두려움 속에서 지켜봤다.
한나라당이 지난 4월 재보선에서 패한 후 이명박 대통령은 강경파 통일부 장관을 보다 유화적인 인물로 교체했다. 한나라당은 여전히 천안함·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경협과 인도적 대북 지원을 위한 길을 찾고 있다. 남북은 비핵화 회담을 두 차례 열기도 했다. 큰 진전은 없었지만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고 있다.
2012년 한국 총선·대선에서 야당이 보수주의자들을 쓸어버리지 못하더라도 한국은 이명박의 강경 정책을 포기할 것으로 보인다. 차기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박근혜는 지난 9월 <포린어페어즈>에 이명박의 접근법을 공개 비판하고 '신뢰외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특히 남북 철도 연결을 언급하며 "한반도가 지역 교역의 허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이 철도를 연결하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이으면 한반도는 유럽과 연결될 수 있다. 물류비와 시간을 단축시킬 것이다.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은 가스 가격을 30% 절감할 것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스 수입을 많이 하는 한국으로서는 엄청난 비용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을 향한 경제 협력의 심화는 단지 꿈이 아니라 훌륭한 비즈니스가 될 것이다. 최근과 같이 포용을 거부하는(disengagement) 최악의 순간에도 남북이 개성공단을 유지시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개성공단은 남북 양측에 혜택을 준다. 철도와 가스 파이프라인도 마찬가지로 양쪽에 이익이 될 것이다.
상투적인 생각으로 보자면 북한은 작은 핵무기라는 하나의 협상 카드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인적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다르다. 북한이 정말로 가지고 있는 것은 첫째도 입지요 둘째도 입지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경제가 활발한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입지 조건을 팔 준비가 된 것 같다.
남북 철도는 세계 최대의 두 경제 지역을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시장으로 묶을 것이다.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은 동아시아의 중동 석유 의존을 극복하게 할 것이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석유 수송로를 확보하고 보호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러한 프로젝트들을 본다면 무엇을 연결하느냐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느냐, 즉 미국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문제도 중요한 것이다.
기다리는 오바마
부시 행정부는 당근을 포기하고 채찍을 들겠다는 이명박의 대북정책에 기대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시 행정부는 2006년 [공화당의 중간선거 패배 후] 정책을 유턴시켜 북한에 대한 개입 정책을 진지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을 취하며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전략적 인내는 북한을 무시하면서도 북한이 그에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하고 희망하는 정책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건 통하지 않았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한 리비아 카다피에 대한 미국과 나토의 공습은 핵무기만이 안보를 궁극적으로 보장해줄 것이라는 북한의 믿음을 강화시키기만 했다. 오바마 정부는 대화[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소량의 대북 수해 지원 물자를 보냈지만 그 외의 어떤 식량 지원도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미 하원은 지난 6월 북한에 어떤 식량 지원도 금지하는 농업법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머지않아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북한과의 고위급 접촉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대북정책, 북미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내년 미국 대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정치적 자산을 쓸 것 같지 않다. 북한에 대한 어떤 움직임도 공화당에 의해 '테러국가'에 대한 '유화책'이라는 딱지가 붙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중동에 치우쳤던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벗어나 태평양 강국으로서 미국의 중요성을 재확인해야 한다는 열망을 안고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외교보다 무인정찰기에 더 많은 자원을 쏟아 왔고, 대통령 후보 시절 시사했던 적대국에 대한 과감한 개입정책을 버리는 대신 테러와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다음 대선 이후까지 마냥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때가 되면 동북아 지역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중국이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최대 교역 파트너가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중국과 대만의 경제 관계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오바마 정부가 최근 중국의 심사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 대만에 고등 F-16 전투기를 팔지 않고 F-16의 단순 개량형만 팔겠다고 한 것은 이 지역에서 미국이 쇠퇴를 보여주는 확실한 신호라고 국제안보 전문가 로버트 카플란은 말한다.
그 경우 미국이 태평양 지역에 주둔하는 비용은 늘어난다. 미 의회의 핵심 멤버들은 이미 아시아에서 미군이 계획하고 있는 '전략적 재편'에 너무 많은 돈이 드는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해왔다. 괌 미군기지 확장, 오키나와 미군 시설 업그레이드 등에 쓰이는 돈이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이 지역의 경제가 커지고 지역적으로 통합된다는 것도 유일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이 지역의 모든 나라는 군사비를 늘여왔다. 긴장 요소는 곳곳에 있고, 특히 지하자원이 많은 해역에 대해 많은 나라들이 자기네 영해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경제 성장도 장기적으로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 그럭저럭 견뎌보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2012년과 그 이후의 추세는 남-북, 중국-대만, 유럽-아시아의 엄청난 개입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새롭게 떠오르는 그림에서 미국은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태평양 지역의 최강국이었던 시절이 끝났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태평양 지역의 파트너 국가가 될 것인가에 대해 창의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다다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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