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교착 국면에 북핵 상황은 악화
이제 9.19 공동성명의 이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6자회담이 하루속히 재개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과의 협상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9.19 공동성명이 결국 북한에게 핵 개발의 시간만 주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고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정세가 크게 악화된 시기는 바로 6자회담이 중단된 시기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와 1차 핵실험을 한 시점은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로 6자회담이 열리지 않고 미국과 북한이 장외에서 격렬하게 대립하던 때였습니다. 2009년 5월에 있었던 북한의 2차 핵실험과 그 뒤 우라늄 농축 시설 가동 등도 모두 6자회담이 결렬되어 기능부전 상태에 빠지면서 발생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에게 6자회담의 틀이 가동되지 않은 시기가 곧 북한의 핵 능력 강화시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회담의 촉진자 역할을 해왔던 한국정부의 역할이 사라진 것도 한 몫 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기에 북미관계를 힘겹게 중재하고 6자회담 고비 때마다 창의적 역할을 수행했던 한국의 역할이 실종되었습니다.
'비핵·개방 3000'이라는 비현실적인 대북정책에 집착한 이명박 정부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달성해야 할 북한의 핵 포기를 선결조건으로 삼는 우를 범했고, 남북관계의 여러 현안들마저 북핵 문제에 종속시킴으로써 남북관계 악화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2010년 천안함 침몰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하나로 묶어 북한의 사과와 같은 '책임있는 조치'와 선 비핵화 조치를 6자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삼았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 역시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기 3년 가까이 지나도록 6자회담이 한 번도 열리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그동안 6자회담을 기피하던 북한이 조건 없는 6자회담의 복귀용의를 천명한지 1년 6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6자회담 재개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최근의 흐름도 답답합니다. 지난 7월 ARF에서 남북한 비핵화 회담이 열리고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방미로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리면서 꽉 닫혀 있던 6자회담의 문이 열리는 듯 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잇따른 중국·러시아 방문 기간에도 6자회담의 조건 없는 재개가 합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6자회담 재개에 앞서 북한의 선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대화에 시동을 걸려고 했던 오바마 행정부도 국내 경제위기와 지난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의 방해에 발목이 잡혀 있습니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크게 상실한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평화적 목적'이라며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6자회담 재개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 2005년 9.19 공동성명 발표 직후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포즈를 취했다. ⓒ연합뉴스 |
6자회담 재개가 우리의 사활적 이해
과거와 비교할 때, 오늘날 6자회담 구도는 대단히 기형적입니다. 3년 가까이 지나도록 6자회담이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은 처음입니다. 한국이 6자 가운데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 역시 전에 없던 유감스러운 현실입니다. 6자회담 재개를 둘러싸고 조건 없는 대화를 주장하는 북한-중국-러시아와 회담 재개에 조건을 내걸면서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한국-미국-일본의 입장이 충돌하고 있는 것 역시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참여정부 후반기 때 북핵 해결의 유력한 수단이자 우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목표였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가, 이명박 정부 들어 실종된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이에 한-미-일 3국은 북한의 핵 포기 의지에 대해서 그리고 북-중-러 3국은 한-미-일 3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 의지에 대해 더욱 큰 불신을 갖게 된 것은 6자회담의 앞날에 크나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해서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6자회담의 종말은 곧 한반도 평화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의 핵무장과 미국의 핵우산 정책이 격렬하게 충돌해 한반도는 '핵 대 핵'의 대결이 고착화될 위험이 큽니다. 우리가 '핵을 가진 북한'과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북한이 핵의 위력을 믿고 군사모험주의를 강화해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북한이 국제적 감시와 안전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경수로 가동에 들어가면 한반도판 후쿠시마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군비경쟁과 군사적 적대감이 격화되면서 이산가족 등 한반도 주민들의 시름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북관계의 악화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를 다시 냉전시대식의 미국과 중국을 양대 축으로 하는 두 세력권의 갈등의 장으로 만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6자회담과 남북대화 등 양자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달성하는 것이 사활적인 이익입니다. 동시에 지난 세기와는 다른 평화적인 21세기를 만들어나갈 주춧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에 강력히 촉구합니다. 임기 내에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방지하고 문제 해결의 초석을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분단시대의 대통령이 해야 할 역사적 소임입니다. 이제 9.19 공동성명의 정신을 살려 조속히 6자회담에 나서야 합니다. 북미·북일 대화를 적극 지지하고 남북대화에도 적극 나서 '북핵의 뿌리'를 캐내는 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진보개혁 진영, 6자회담의 창의적 발전전략을 준비하자
더불어 개혁진보 진영 역시 6자회담의 창의적 발전 전략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 임기 내에 일부 성과가 나온다면 이를 계승·발전시키고, 상황의 진전이 없거나 더 나빠지더라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달성할 수 있는 비전과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국민들 및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복잡해진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 '정교함'과 더욱 중요해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절박성을 해소할 수 있는 '대담함'을 함께 갖춘 해법 마련에 매진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표와 정책은 남북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정파의 문제도 아닙니다. 2013년은 한반도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주년이 되고 북한이 NPT에서 탈퇴해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북핵과 북미 대결이라는 위기의 산물인 6자회담을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의 기회로 만들어야 하는 힘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2013년 체제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역사적 과제중의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한반도평화포럼의 '논평'은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 등의 현안에 대한 비정기 글입니다. 한반도평화포럼은 전문가, 시민사회 인사, 전직 관료 등이 모여 만든 민간 포럼으로 전쟁과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지향의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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