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파리 북부의 외곽 주택지대 '클리시 수 부아'에서는 2명의 아랍계 청년이 경찰의 검문을 피해 달아나다 감전 사고로 숨지면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그 결과 1명이 숨지고 3000명이 체포됐으며 두 달에 걸쳐 건물 300여 채와 차량 1만여 대가 불탔다.
이번 런던 폭동 또한 경찰이 29세 흑인 청년을 체포하는 와중에 총을 쏴 사망케 한 일이 발단이었다. 폭동의 진원지 토트넘이 파리의 클리시 수 부아와 마찬가지로 수도 인근의 저소득층 거주 지역이라는 점 또한 공통점이다. 시라크 정권과 보수-자민당 연정이라는 보수정권의 사회복지 서비스 축소가 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린 것이 폭동의 '심층 원인'으로 꼽히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런 공통점이 엿보이면서 런던 폭동을 지켜보는 프랑스인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최근 수 년 동안 프랑스의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지난달 말 청년실업률은 유로존 평균(20.3%)을 훌쩍 넘어 22.85%를 기록했다. 특히 저소득층 청년실업률은 그 2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사르코지 정부의 강경 이민정책과 사회복지 축소 정책, 재정적자 감축을 위한 긴축정책 등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고 있으며, 사르코지 대통령의 "'프랑스식 이슬람'이 아닌 '프랑스 안에서의 이슬람'은 반대한다"는 발언 등 현 정부 인사들의 이슬람 이민자들을 겨냥한 발언들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프랑스 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는 "지금 프랑스는 2005년보다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더 나쁘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날 소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이번 런던의 경우와는 달리 2005년 파리 폭동에서는 고가의 전자제품이나 스포츠용품 등을 약탈한 사례는 없었다. 당시 공격 대상도 자영업자들이 아니라 경찰과 학교 등 국가기관에 한정됐다는 차이점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차이는 중요치 않다. 폭동이 사회적 불만의 출구가 되는 것은 다른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11일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내놓은 '대책'들에 대해 방향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캐머런 총리는 이날 의회에 출석해 경찰의 폭동 대처가 미흡했음을 인정하면서 △안면 마스크와 후드티 착용 단속,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차단, △야간 통행금지령 설정, △가게‧집주인의 자위권 강화 등의 조치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려는 중동의 독재정권과 영국 정부가 뭐가 다르냐는 빈정거림마저 나오고 있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의 설립자이자 특별 자문관인 도미니크 모이시는 11일 <파이낸셜타임스> 칼럼에서 런던 폭동과 파리 폭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일별하며 "사회‧경제적 위기의 와중에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자각은 곧 불안정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런던 폭동의 교훈으로 꼽았다.
모이시는 런던 폭동과 파리 폭동에 대해 "국가가 시민들에게 (재정지출 삭감 같은) 희생을 요구하려면 고통 분담이 공평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는 점이 두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김없이 '사회적 폭발'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은 모이시의 칼럼 주요내용이다. (☞원문보기) <편집자>
▲ 런던 서부 일링 대로변의 모습. 이번 폭동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했던 지역이다. ⓒ프레시안(올리버 쿠스버츤) |
런던과 파리에서의 폭동
2005년 가을의 프랑스와 2011년 여름의 영국. 역사는 반복되는가? 오늘날 프랑스 언론들은 "왜 영국이 불타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마치 6년 전 영국 언론들이 그랬듯. 실제로 두 사건은 놀랍도록 흡사하다.
두 사건 모두 폭력 사태는 경찰의 실수와 젊은이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두 사건 모두에서 원인은 인종적‧종교적인 이유보다 사회경제적 이유로 설명된다. 두 사건 모두에서 경찰은 당초 폭력사태에 놀라 한동안 우왕좌왕했지만 이내 상황 통제력을 빠르게 회복했다.
그러나 뚜렷한 차이점도 많다. 프랑스에서 폭동은 대부분 파리와 몇몇 대도시 교외의 빈민층 거주 지역에서 일어났다. 부유층 거주 지역까지 확산된 경우는 없었다.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아 파리를 '재개발'한 오스망 남작이 혁명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엄청난 대로[블뤼바드]로 도시를 나눈 것이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이는 런던 폭동과의 뚜렷한 차이점이다.
또다른 차이는 영국은 프랑스처럼 막강한 경찰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유럽 민주 국가들 중 최강의 경찰력을 자랑하고 있다.
폭동 가담자들이 노린 목표물 또한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학교와 자동차가 1차적인 목표가 됐다. 학교와 자동차란 것은 사회적‧물리적 '이동 가능성'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 폭동 가담자들이 보기에 '이동 가능성'은 거짓 약속에 불과했다. 그들의 분노는 그들 내면 깊이 자리잡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성적, 도시적 깨달음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아랍식이거나 아프리카식인 그들의 이름과 파리 교외의 빈민층 거주지역이라는 그들의 주소는 백인 젊은이들도 일자리를 얻기 힘든 고용시장에서 그들이 직업을 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9.11 테러로부터 겨우 4년 후라는 시점은 아랍 젊은이들을 정체성 통제 정책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이런 정책들의 목적은 안보 유지라기보다는 아랍인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직업을 구할 전망도 없는데다 전통적인 무슬림 문화 내에서 여성 받는 차별 때문에 그들은 결혼 상대자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누가 그들과 결혼하기를 원하겠는가?
그들은 도시의 삭막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은 '빛의 도시' 파리에 그렇게 가까이 살고 있었지만 파리에 닿을 방법은 없었다. 자가용이 있을 리 없었고 전철은 그들이 사는 교외 지역까지는 닿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 폭동의 목표물은 뚜렷하지 않았다. 마치 '소규모 자영업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라'는 지령이라도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프랑스 언론이 경멸을 담아 묘사한 것처럼 이번 '쇼핑 폭동'(shopping riots)은 술과 전자제품, 옷과 스포츠용품 약탈에 초점이 맞춰졌다.
런던 폭동을 파리 폭동과 선명하게 구별지은 두 가지 요소는 폭동이 이같은 '훌리건 난동'과 결합됐다는 점과, 물대포 같은 효과적인 진압 장비의 결여 등 치안 유지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폭동의 불길은 영국에서 더 활활 타올랐다. 다만 기간은 더 짧았다.
그렇다면 영국의 폭동 가담자들은 절망적이었다기보다는 지루함을 풀 대상이 필요했던 걸까? 런던 폭동은 2005년의 프랑스에서처럼 사회‧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던 게 아니라 니힐리즘적인[즉, 폭력 그 자체에 경도된 무가치적] 행동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긴 아직 이르다. 그러나 하나만은 명백하다. 2005년과 2011년 사이의 6년 동안 사회적‧경제적 맥락이 크게 변했다는 것이다.
폭동은 영국에서 일어났는데 프랑스의 증권시장이 급락했다. 마치 런던의 길거리를 태우는 불길의 높이와 경제적 충격의 낙폭이 반비례하는 듯 보였다. 바그너의 오페라 '신들의 황혼'을 보는 듯한[세계의 종말이 왔고 이제 다 끝장났다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프랑스인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세계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더 높아졌다]
도버 해협 건너편의 뉴스를 지켜보면서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영국관'(觀)을 수정해야 했다. 영국인들이라고 해서 '로열 웨딩'과 런던 올림픽 등 같은 것으로 현실도피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모두 사회적 부정의라는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2005년 파리 폭동을 통해 뭘 제대로 배웠는지는 모르겠다. 오늘날 파리 교외의 몇몇 지역으로 나가 보면 무법지대가 따로 없다. 언제 폭발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런던 폭동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와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의 와중에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자각은 곧 불안정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영국 폭동은 2005년 프랑스 폭동에 비해 사회적‧경제적 동기가 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고통 분담이 공평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국가가 시민들에게 [재정지출‧복지 삭감이라는]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김없이 '사회적 폭발'이 뒤따를 것이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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