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를 수없이 해봤던 전직 고위 당국자들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비밀접촉이라도 녹음은 한다. 상부 보고용이기도 하고, 상대방이 나중에 딴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비밀접촉이건 공개접촉이건 발언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이 1일 밝힌 남측 당국자들의 발언 내용이 완전한 날조라고 보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정말로 날조된 것이라면, 남쪽에서 진짜 녹취록을 공개해 버리면 그만이다. 똑같은 원리가 남쪽에도 적용된다. 거짓말을 하면 북쪽이 녹취록을 공개할 수 있다. 녹음된 목소리를 전파에 실어 보낼 수도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통일부 대변인의 논평이다. 논평에서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진의를 왜곡한 일방적 주장"이라고만 했다. 팩트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진짜 의도가 잘못 전달됐다는 것이다.
물론 남측이 돈봉투를 내밀었다는 북한의 주장을 부인하긴 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와 관련해서는 "남측에는 사과처럼 보이지만 북측에는 사과로 보이지 않는 형태의 절충안"을 제시했다는 북한의 공개 내용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 부분에서는 통일부 대변인 논평이 아니라 당국자 명의의 배경 설명이란 형식을 취했다. 실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사실이 확인됐을 경우 발뺌할 수 있다.
청와대가 굳게 입을 다문 것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된다. 한 전직 고위당국자는 "이 정도 선에서 끝내자는 메시지를 북에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청와대까지 대응을 했다가 북한을 자극해 녹취록 전문이 공개되는 사태까지 가는 건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링 위에서 심판의 명령에 따라 경기를 하는 선수가 아니다. 진흙탕 싸움을 마다않는 스트리트 파이터다. 남측 당국자들이 북측에 '애걸하고 구걸하는' 목소리를 작심하고 내보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 경우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온 '원칙있는 남북관계'는 물거품이 돼버린다. 목소리도 조작됐다고 할 것인가.
북한이 당장 그 일을 감행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남측 정부가 어떻게 나오는 지를 봐가면서 폭로의 수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비밀접촉의 당사자들이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정권의 명운을 건 고도의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다.
▲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핵심인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은 5월 9일 이 대통령의 베를린 제안 때까지 대통령을 수행했다가 다음 날 빠져 베이징 남북 비밀접촉에 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
북한은 이번 일을 상당 기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 들어 몇 차례 있었던 비밀접촉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리라 예견하고 미리 대비한 것이다.
남북 접촉을 하는 와중에 흡수통일 지향적인 발언을 하는 남측의 대통령. 정상회담을 국내정치적 목적으로만 추진하려는 계산속을 뻔히 드러내는 남측 정부. 비밀접촉의 성과가 없으니까 '정상회담을 하자고 했더니 쌀을 달라더라'라고 모욕적인 정보를 흘리는 남측 당국자들. 이런 장면을 반복적으로 목격한 북한이 이번만큼은 또 당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른 것이다.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5월 9일 베를린에서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한다면 내년 3월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이 대통령은 북한이 받을 수 없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천안함·연평도 문제에 대한 사과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이 대통령은 같은 날 재독 동포 간담회에서 "남북통일은 언젠가 올 것이다. 머지않았다"고 말해 흡수통일적 시각을 드러냈다. 다음날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FAZ)과의 인터뷰에서는 "(북한도) 재스민 혁명 같은 움직임을 거역할 수 없다"는 자극적인 말을 했다.
같은 시각 중국 베이징에서는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의 비밀접촉이 시작됐다. 북한의 폭로에 따르면, 접촉에 나온 남측 당국자들은 천안함·연평도에 대한 사과가 있어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을 내긴 했지만 '천안함·연평도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4월의 메시지와는 달랐다.
그 상황을 지켜 본 북한 당국자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아마도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하나'라는 황당함보다 '또 시작이구나'는 쪽에 가까웠을 것이다. 2009년 10월 임태희(남)-김양건(북) 싱가포르 접촉, 11월 김천식(남)-원동연(북) 개성 접촉, 작년 G20 정상회의 전의 미확인 남북 접촉 후의 혼란스럽고 모멸적인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6월 판문점 정상회담 → 8월 평양 정상회담 → 내년 3월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중 정상회담'이란 시간표를 짠 속내도 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핵안보 정상회의의 '액세서리'로 삼겠다는 계산속 말이다.
한 전직 당국자는 "베이징에서는 비밀접촉을 하고 베를린에서는 흡수통일 발언을 하는 것은 공격수가 뛰어 나가는데 수비수가 자살골을 넣는 모양새"라며 "앞뒤가 맞지 않는 대북정책의 난맥상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논평했다. 또 다른 전직 고위 당국자는 "북한에 대한 인식, 북한에 대한 정보, 북한을 대하는 방법에서 거의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이제 그 후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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