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를 예측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말이 전문가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한반도 문제는 인간의 예측 능력을 비웃어왔다. 올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올해 남북관계 및 이와 연동된 한반도 정세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면, 남한의 총선 및 대선과 북한의 강성대국 원년이 맞물릴 2012년은 더욱 어려운 한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내외의 시선이 남북한 신년사에 쏠린 이유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남북한의 신년사 내용이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신년사에 해당되는 공동사설에서는 "외세와 야합하여 반공화국모략과 북침전쟁도발책동을 끊임없이 벌리면서 북남사이의 대화와 민족의 화합을 파탄시킨 남조선당국의 무분별한 광란은 온 민족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냈다"며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을 이명박 정부에게 돌렸다. 이 대통령 역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도발은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우리 민족과 세계의 열망에 찬물을 부었다"며 북한에 대한 비난 발언을 빼놓지 않았다.
'도발시 강력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도 판박이였다. 북한은 "인민군대는 우리의 절대적인 존엄과 사회주의제도, 우리의 하늘과 땅, 바다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자들을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고, 이 대통령은 "우리는 북이 우리의 영토를 한 치도 넘보게 할 수 없다"며 "도발에는 단호하고 강력한 응징이 있을 뿐"이라고 경고했다. 남북한이 주장하는 서해의 영해가 다르고 주권에 대한 해석이 다른 상황에서 이러한 상호간의 군사적 위협은 올해에도 군사적 긴장 및 무력 충돌 위험이 상존할 것임을 예고해준다.
'대화'가 다시 등장했지만…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비난전이 계속되고 도발시 강력히 응징할 것이라는 위협적인 언사도 누그러지지 않고 있지만, 한동안 사라졌던 '대화'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 것은 환영할만하다. 북한은 "민족공동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고 북남사이의 대화와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이 대통령은 "대화의 문도 아직 닫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새해를 맞이해 으레 내놓은 덕담 수준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희망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직 판단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대통령 발언의 변화이다. 신년사에서 이 대통령은 "(북한은) 핵과 군사적 모험주의를 포기"하라며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평화와 협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인 작년 11월 29일 발표한 담화에서는 "북한 스스로 군사적 모험주의와 핵을 포기하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상황이 바뀌면 인식과 이를 표현하는 발언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구제불능으로 묘사한 것에서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며 북한의 행동 변화를 촉구한 것은 분명 진일보한 발언이다.
문제는 그 진일보가 과거로의 복귀를 의미한다는 점에 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이 진정성을 보인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경제 협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나갈 의지와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이 발언은 이미 실패가 입증된 '비핵‧개방‧3000'을 재천명한 것과 다르지 않다. 북한의 핵과 군사적 모험주의 포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어떤 방법과 수단을 통해 이를 달성할 것인지를 여전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 하면서도 남북대화나 6자회담 제의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까닭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3일 오전 청와대에서 신년특별연설을 통해 새해국정운영방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
대화 없는 안보는 맹목이다
천안함 침몰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거친 탓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사의 첫머리부터 안보를 강조했고, 안보를 경제와 함께 올해 국정과제의 핵심 목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튼튼한 안보를 위해 북한의 추가도발시 강력한 보복 의지를 천명하면서 국방개혁과 "하나 된 국민"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장 유력하면서도 절실한 안보 수단인 '대화'의 의지가 누락되고 말았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적 밀집도가 높고, 한국전쟁 이후 정전상태로 남아 있으며,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고 있고, 북한의 핵무장 능력이 강화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 강력한 한미동맹과 군사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대화를 통한 안보'이다.
대규모의 국방비 증액을 통한 군사력 건설은 국가재정 위기와 서민경제난을 고려할 때 결코 지속가능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최고의 군사 준비태세를 유지하는 것도 언제까지 가능한 일이 될 수는 없다. 단호함과 자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적절한 국방 태세를 유지하면서도 대화를 통한 긴장완화와 평화구축을 시도하는 것이 필요한 까닭이다.
MB, 선제적 대화 제의해야
특히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명박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화 제의에 나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6자회담 참가국인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 필요성에 합의한 상태이다. 2010년 '복합 갈등'을 보였던 미국과 중국도 1월 19일부터 예정된 오바마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 간의 정상회담에서 남북대화 재개를 촉구하면서 6자회담 재개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일본 정부 역시 올해에 북일대화 재개를 시도한다는 방침이다.
북한이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남북대화를 적극 제의하고 나설 공산도 있다. 남한이 남북대화에 동의하면 이를 바탕으로 북미대화 및 6자회담을 열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고, 남한이 거부하면 사태 악화의 책임을 남한으로 돌릴 수 있다고 계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상황 변화는 이명박 정부에게 상당한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 기실 MB정부가 한미동맹 및 한미일 3각 공조체계에서 대북강경책을 주도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2009년 장거리 로켓 발사, 2차 핵실험, 6자회담 거부에 이어 2010년 천안함 침몰,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 연평도 포격 등 한미일 3국이 "도발"로 간주해온 북한의 지속된 모험주의적 행태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북한이 추가도발을 자제하면서 적극적인 대화 공세를 펼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한미일 3국 사이의 '공동의 적'에 대한 인식은 분열될 수 있고, 북한의 유연해진 언행은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6자회담 재개의 유력한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북한은 작년 12월 남한의 연평도 사격훈련에 대응 사격을 하지 않는 대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 영변 복귀 허용 및 미사용 연료봉 판매 의사를 밝혀 악화된 국제사회의 대북 인식을 크게 개선시킨 바 있다.
이는 결국 MB의 대북강경책이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시에는 국제사회, 특히 한미동맹 및 한미일 3각 공조에서는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북한의 태도 변화시 그 위력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 대 강'의 대결국면에서 남북 양측 강경파 사이의 적대적 의존관계는 심화되기 마련이고, MB정부의 대북정책은 이를 자양분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사 파견 통한 정상회담 추진해야
MB정부가 생각을 달리 해 남북대화와 6자회담에 적극 나서면 한국이 주도하는 한반도 정세의 대전환은 가능해질 수 있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늘날 한국 정부는 한미일 3각 공조체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다. 이는 MB정부가 희망해온 핵문제를 남북대화의 핵심 의제로 삼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남북대화에서 핵문제 논의를 꺼려온 배경에는, 핵문제가 북미 사이의 문제라는 인식도 있지만 남북한이 합의하더라도 미국이 거부할 수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다.
그런데 오바마 행정부는 대북정책에서 한국 정부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있다. MB정부는 이 점을 북한에게 분명히 하면서 핵문제를 남북대화의 의제로 삼는 것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위한 대전제는 '선(先) 핵폐기론'에 입각한 '비핵‧개방‧3000'이나 '그랜드바겐'의 대대적인 수술이어야 한다.
대화 제의는 빠를수록 좋고, 그 방법은 특사 파견이 유용할 것이다. 적어도 2월까지 남북관계 개선에 실패한다면 한반도 정세는 대규모 한미합동군사훈련인 '키 리졸브'와 천안함 침몰 1주기가 있는 3월을 거치면서 또 다시 요동칠 공산이 크다. 대화 방식 역시 속 깊은 대화와 정치적 결단이 가능한 특사 파견이 유용할 것이며, 이를 통해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
MB정부는 천안함 침몰과 북한의 연평도 공격으로 정상회담이 더욱 무의미해졌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러나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벼랑 끝에서 만나는 것보다 정상(summit)에서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좋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정상회담으로 인해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일갈했다.
올해에는 이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기피증에서 벗어나 정상 간의 대화를 통해 안보와 평화를 튼튼히 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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