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으로 돌아갑시다. 베이징에서 4월 11일부터 18일까지 1주일 넘게 남북 비료회담을 했어요. 내가 남측 수석대표로 갔습니다. 비료 20만 톤을 줄 용의가 있으니 북쪽은 그해 가을에 이산가족 상봉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방침이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고, 시차를 두고 받는다는 비동시 상호주의 개념을 가지고 회담에 임했어요.
북한이 이산 상봉에 대한 거부감을 표하면서 끝내 회담이 결렬됐었다고 할 수 있는데, 회담 과정에서 나온 북측 대표단장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커서, 여기서 처음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내 상대로 나온 북측 단장은 전금철이었습니다. 2007년 추석 전후에 사망했다고 확인됐는데, 1970년대 남북조절위원회 대변인부터 시작해서 2001년 4차 남북장관급회담까지 30년 이상 남북 대화의 현장에 있던 사람입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95년에 쌀 15만 톤을 지원했을 때도 군사적 전용론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우리가 먼저 주고, 일본이 나중에 50만 톤을 줬어요. 아무런 표시도 없는 누런 포대에 넣어서 보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남쪽에서 쌀이 왔다는 입소문이 돌았고, 나중에 일본에서 간 것까지도 남쪽에서 간 걸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민심에 미치는 효과가 굉장히 컸는데, 어쨌든 그 때도 군사적 전용론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98년 비료회담 할 때 1주일 이상 오전, 오후 수없이 접촉하고 협상을 하다보니까 북쪽 대표들하고 같이 앉아서 쉬는 시간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95년 쌀 지원 때 인공기 게양 사건, 청진항 촬영 사건 등등을 얘기하면서 "앞으로 쌀도 줄 수 있으니까 이산가족 상봉에 협조를 좀 하라. 그리고 쌀을 주면 이번에는 95년 때처럼 군사적으로 전용한다는 말이 안 나오게 할 수는 없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전금철의 표정과 목소리가 비장하게 바뀌면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정세현 선생, 인민군이 누구요?"
"인민군이 인민군이지, 누구긴 누구요?"
"인민군은 인민의 자식이오."
"그래서요?"
"다 같이 굶고 있는데 어디서 먹을 게 생겼다고 칩시다. 그럼 남쪽에서는 에미, 애비가 먼저 입에 넣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안 합니다. 자식 입에 먼저 넣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그게 인간의 도리 아닙니까? 먹는 것 가지고 그러지 맙시다."
이렇게 딱 나오니까 내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다 대고 투명성이 어쩌고저쩌고 해봐야 말만 길어질 것 같아서 그만 뒀어요. 어쨌든 전금철의 그 말은 일부 군사적 전용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사실상 시인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인공위성으로 북한 정미소 사진 찍어보라
그렇다면 군사적 전용이 기술적으로 얼마나 가능한지 한 번 짚어 봅시다. 우리가 쌀을 보낼 때는 군량미로 비축될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방아를 찧어서 보냅니다. 햅쌀이나 1년 된 쌀이 아니라 2~3년 된 벼를 도정해서 보냅니다. 북한도 자기네 쌀을 군량미로 비축하는 경우에는 도정하지 않은 벼 상태로 보관해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방아를 쪄서 쌀로 창고에 보관하면 오래 못가니까.
95년에 쌀 15만 톤을 도정하는데 농림부, 통일원, 안기부 직원들을 전국의 도정공장 곳곳에 파견해서 독촉했던 적이 있어요. 요즘은 도정공장, 정미소가 별로 없어요. 옛날엔 정미소 하는 집이 그 동네에서 갑부였고, 그런 집에서 가끔 국회의원도 나왔는데, 95년에 보니까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전국의 정미소를 찾아다니면서 북새통을 떨었죠.
우리가 쌀을 주면 그걸 군인들한테 주고 일반 사람들한테는 군량미를 방출한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논리적으로 말은 돼요. 그러나 남쪽에서도 쌀 15만 톤 때문에 정미소를 풀가동했던 경험으로 미뤄 보면, 북한에서도 남쪽에서 간 쌀, 예컨대 40만 톤을 군인들한테 주고, 군량미로 비축된 자기네 벼를 인민들에게 나눠주려면 아마 북한 전국의 도정공장을 풀가동해야 할 겁니다.
군사적 전용론을 제대로 주장하려면 인공위성을 통해서 북한의 도정공장이 얼마나 돌아가는지를 찍어가지고 들이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얘긴 없거든요. 군사적 전용의 증거랍시고 최근에 일본 언론이 내놓은 사진을 보니까, 쌀가마니 옆에 건장한 남자가 한 명 서 있는데, 그게 인민군 간부의 친척이라던가요? 군복이라도 입고 있으면 모를까...그게 군사적 전용의 증거가 될 수 있겠어요? 일본 사람들도 내 참. 그런 억지춘향이가 어딨습니까?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도 쌀을 지원하자고 했는데, 김무성 원내대표가 정보기관의 제보를 받은 듯한 모습으로 자신있게 얘기하고, 정부 당국자는 '원내대표가 자신이 없으면 그런 얘길 하겠느냐?'는 식으로 뒷받침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정부·여당 안에도 쌀 지원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통령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안상수 당 대표가 대통령을 만나서 쌀 지원을 하자고 하니까 대통령이 '국민들의 수준이 높다'는 말을 했다던데,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싶어요. 대통령의 말에는 '국민의 뜻은 쌀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대통령도 먹는 문제에 대해 그렇게 인색하지는 않을 거예요. 남는 쌀로 사료를 만든다고 하니까 '이런 천벌을 받을...그건 아니지'라는 여론이 일어난다는 걸 청와대가 모를 리 있겠어요?
그러니까 남북적십자회담을 계기로 차제에 과거 40~50만 톤 수준으로 쌀 지원을 하고 이산 상봉도 정례화시키는 게 좋습니다. 북쪽에서 먼저 이산 상봉을 제의하고 나서니까 우리 쪽에서 정례화를 제의하겠다고 밝혔던데, 정례화하려면 이전 수준으로 쌀과 비료를 줘야만 될 겁니다. 쌀 1만 톤이나 햇반 몇 십만 개 주어가지고는 정례화는 턱도 없습니다.
넘쳐나는 쌀을 북쪽에 주는 건 우리 농민들을 위해서도 좋아요. 지금 농민들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투표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농촌에 뿌리를 둔 도시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도시 사람들의 상당수가 기본적으로 친농촌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자기들의 뿌리이고 고향이니까. 총선이나 대선이 아직 멀었지만 'MB 정부는 친농(親農) 정책을 한 적이 없다'는 기억과 기록은 남습니다.
▲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오른쪽)는 대북 쌀 지원을 제안했고 김무성 원내대표는 군 전용설을 제기했다. 한나라당의 본심은 무엇인가. ⓒ뉴시스 |
북한 식량, 누가 얼마나 먹나
군사적 전용론에 대해 몇 마디 더 하겠습니다. 인민군이 1년에 쌀을 얼마나 먹을까요? 군인 1명당 하루 700g을 배급한다고 칩시다. 보통은 평균 550g 배급하는 걸로 기준을 잡는데, 한 되가 800g이니까 하루 700g이면 많은 거예요. 남쪽 인구 4800만의 연간 쌀 소비량이 432만 톤이니까 남쪽 사람들도 하루 평균 246g의 쌀을 먹어요. 어쨌건 북쪽 병력이 117만 명이라니까 1년에 29만8935톤이 필요합니다. 반올림해서 30만 톤 먹는 겁니다.
인민군을 포함한 북한 전체 인구가 먹는 쌀의 양은? 인민군은 청장년들이라 많이 먹지만 북한 주민 전체 평균으로 1인당 550g을 먹는다고 치고 인구를 2300만으로 잡아 계산하면 461만725톤이 필요합니다. 종자로 남겨 놓는 분량, 저장 중에 못 쓰게 되는 소위 '감모분'을 감안하면 대략 500만 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북한 연간 자체 식량 생산량은 대체로 옥수수 190∼200만 톤, 쌀 130~150만 톤, 감자·콩 등 40~50만 톤입니다. 그러니까 식량이 년간 총 360~400만 톤이 생산되는 거예요. 필요한 양이 500만 톤이니 해마다 100~140만 톤 정도가 모자라는 겁니다. 1인당 550g을 먹는다고 치면 최대 697만 명이 먹어야 하는 양입니다. 이것도 반올림하면 700만 명 분이죠.
노동당 당원이 300만인데, 그 사람들한테 쌀만 준다고 하면 3인 가족으로 계산할 때 연간 180만 톤이 필요합니다. 넉넉하게 잡기 위해 두 집단이 하나도 안 겹친다고 가정할 때, 당원 가족과 군인들한테 필요한 식량은 총 210만 톤이에요. 북에서 자체 생산하는 새 쌀과 새 옥수수로 충당이 됩니다. 우리가 보내는 쌀은 2~3년 된 쌀이고 북한에도 좀 모자라서 그렇지 해마다 새 쌀이 나오는데, 인민군이나 노동당원들 줄만큼의 새 쌀이 있는데도 새 쌀을 놔두고 일부러 헌 쌀을 뺏어간다? 남쪽 것이 아무리 좋아도 헌 것이 새 것보다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식량 부족으로 피해를 보는 건 정말 불쌍하고 힘없는 민초들이에요. 우리가 40만 톤을 보내주면, 북한식 표현으로 '선차적으로' 군인들한테 먼저 주고, 군용으로 챙겨놓은 쌀을 민초들한테 준다고 쳐도, 결과적으로 700만 명의 민초들이 쌀 지원으로 인한 혜택을 받게 되는 거 아녜요? 지원이 없으면 민초들은 그나마 그 혜택도 못 받는 겁니다. 순환이 안 되니까.
쌀을 주려면 인민들한테 직접 갖다 주고 확인서를 받아오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게 하면 추가적인 행정 수요를 유발하기 때문에 북쪽이 감당하기 쉽지 않아요. 사회주의라서 기본적으로 행정력도 비효율적이고, 교통·통신 수단도 열악하기 때문에 자기네들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아요. 어쨌든 갖다 주면, 설령 높은 사람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일부 가져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북한산 쌀이라도 민초들한테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인도주의적으로 의미가 있는 거예요. 너무 야박하게 하면 안 됩니다.
쌀 40~50만 톤을 지원받던 시절에 북한은 분배 현장에 우리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조금씩 협조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김광림 당시 재경부 차관이 북한하고 협상을 야무지게 해왔어요. 대단한 성과였습니다. 정부·여당이 앞으로 대북 쌀 지원을 재개하게 되는 경우, 같은 당이니까 알아보면 잘 설명할 겁니다. 그때 방식을 살려내면 분배 투명성을 높여갈 수 있을 겁니다. 지원을 계속 해서 신뢰가 쌓이면 투명성은 얼마든지 높여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 너무 성급한거고.
군인들이 남쪽 쌀 먹고 기운 차려서 총부리 겨눈다?
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방아를 찧은 쌀은 오래 보관하기 힘들고, 방아를 찧지 않았다고 해도 2~3년 지나면 부스러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북한에 창고가 변변한 게 있겠습니까? 신통치 않아요. 84년 남쪽에 수해가 났을 때 북한에서 온 쌀을 보니까 부스러기도 많고 변색도 많이 됐었어요. 우리한테 보낸 것도 그런데, 그걸 인민들한테 안 주고 굳이 군량미로 비축하려고 할까 싶습니다.
2003년 여름인가 가을인가...남쪽에서 보낸 쌀이 인민군한테 들어간다는 장문의 기사가 <신동아>에 났습니다. 기자가 쓴 건 아니었고, 대북 쌀 지원을 할 때 인도 요원으로 북쪽에 다녀온 당시 야당 측 사람이 쓴 기고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박원홍 의원실 이 모 보좌관이 썼던 걸로 기억되는데, 남포항에 하역된 남쪽 쌀이 거룻배 비슷한 데에 실려 남포항을 떠나 어디론가 가는데, 그 쌀 포대 더미 위에 군인들이 올라타 있었다는 겁니다. 쌀이 오면 현장에서 바로 군대로 간다는 거죠. 사진도 찍어서 게재했어요.
나중에 우리가 북쪽에다 그 문제를 따졌더니 해명이 왔습니다. 그 배는 송림 쪽으로 쌀을 싣고 가는 길이었는데, 송림 쪽에 새로 배치된 인민군 신병들이 배편이 없어서 그걸 타고 갔다는 거예요. 북한의 교통 사정으로 볼 때 완전히 날조된 해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또 남쪽에서 간 쌀을 군용 트럭에 싣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도 공개된 적이 있었어요. 북한은 기름 사정이 안 좋기 때문에 군용으로 우선 배분하고 나머지를 민수용으로 씁니다. 그러다 보니 민수용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요, 예를 들어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책임자가 남쪽에서 온 쌀을 관내로 가져가야 하는데 자기네 트럭을 굴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관내 인민군 부대에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일부 수수료조로 쌀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걸 가지고 전량 군부대로 들어간다고 해석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쌀을 보내면서 2002년부터는 포대에다가 한글로 '대한민국'이라고 크게 박아서 보냈는데, 그게 북한의 민심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전에도 여러 차례 했던 적 있습니다. 과거에는 남쪽에서 온 쌀이라는 걸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대한민국'이라고 인쇄가 된 포대가 가면서 확실히 알게 되었고 남쪽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겁니다.
남쪽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는 건 달리 말해서, 자기네 체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버이 수령과 어머니 당이 먹여 살린다고 생각했는데, 미제의 억압으로 헐벗고 굶주린 남쪽 동포들이 쌀을 보냈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설령 그 쌀을 인민군이 먹었다 칩시다. 그 사람들이 그 쌀을 먹고 기운을 차려서 총부리를 남쪽으로 돌린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하겠지요.
또 관리들이 쌀을 빼돌려서 시장에서 판다고도 하는데...일부 그럴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걸 생각해 봐야 합니다. 6.25 후에 미국이 우리한테 옥수수나 밀가루를 무상으로 주면 그게 시장에서 팔렸거든요. 시골 국수 공장에 가 보면 미국에서 온 무상 밀가루가 쌓여 있었어요. 누가 빼돌렸나요? 힘 있는 사람들, 정치인, 공무원들이 그랬을 거 아닙니까? 형편이 어려운 나라에 원조 물품을 주면 일부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새는 겁니다. 우리도 했던 짓이에요. 그런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듯이 북한에게만은 유리 상자 안에서 분배하는 것처럼 완벽한 투명성을 요구하는 건 무리지요.
과거 통일부 출입기자들 중에서 북한 현지 취재를 했던 기자들의 말을 들어 보세요. 북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포대에 다른 걸 넣어서 돌아다니는 걸 많이 봤다잖아요. 그렇게 하다 보면 민심이 바뀌는 겁니다. 군사적 전용만 걱정하느라고 쌀을 안 주면 북한 민심을 전환시킬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북한 민심이 전환되고 남북의 민심이 연결되어야 통일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지금처럼 남북의 민심이 멀어지게 만들면 통일은 못 합니다. 그럴 가능성도 별로 없지만, 지금 정부 안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 같은 붕괴론자들이 바라는 대로 만의 하나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이 붕괴했다 칩시다. 그러나 붕괴론자들의 뜻대로는 안 될 겁니다. 자기네가 어려울 때 외면했던 사람들, 한쪽에서는 굶주리는 데도 쌀이 남아돌아 그걸 사료로 만들고 비료로 쓰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하고 통일하려고 하겠어요?
그동안 '퍼주기'다 '끌려다니기'다 말도 많았지만, 어쨌건 북한 사회와 민심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던 건 중국 언론들도 보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도 그게 진퇴양난이었는데...북한의 강경파들에게는 이명박 정부가 어쩌면 고마울지도 몰라요.
미국의 요구 정면 거부한 한국
끝으로...미국이 최근 '남북관계가 개선돼야 6자회담을 할 수 있다'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그런 요구를 했고, 보즈워스 특별대표도 얼마 전에 서울에 와서 "천안함은 이제 그만 거론하고 6자회담으로 건너가자"고 했다는데, 그런데 청와대 한 비서관이 어느 세미나엔가 가서 '북한이 천안함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대규모 쌀 지원은 어렵다'고 했다더군요.
그건 미국의 요구에 대한 사실상 정면 거부의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 최근년간 식량난이 계속되었고, 더구나 금년에는 수해까지 심해서 쌀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쌀도 안 주면서 남북관계 잘 해보자고 하면 북한이 호응해 나오겠습니까? 남북관계에 천안함을 건 것이 아니라 결국 6자회담에 천안함을 건 셈입니다.
그런데, 천안함 사과 문제는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까지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중국의 반응도 얘기하고, 우리 국민 30% 정도밖에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으로부터 사과 받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이제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자고 했단 말입니다. 북한은 정몽준 전 대표 얘기도 끌어 들이면서 버틸 겁니다.
천안함 사과 안 하면 대규모 쌀 지원 못하고, 쌀 지원 안 하고 남북관계 개선 기대하기 어렵고, 남북관계 개선 안 되니 6자회담 못 여는 거고...그렇다면 결국 6자회담도 가까운 시일 내에 열리기 어렵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알 수 없어요. 미국이 어느 날 북미 대화로 가버릴 수도...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원래 대통령 비서관은 귀만 있고 입은 없는 사람입니다. 나도 김영삼 정부 때 3년 반 넘게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입조심 하느라고 힘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비서관은 물론이고 수석비서관도 어디 가서 강연하고 그러지 못했습니다. 비보도, 비공개를 전제로 백그라운드 브리핑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정말 조심스러웠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도 비슷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대통령 측근 참모들이 너무 드러내놓고 정책에 대해서 결정적인 발언들을 하더라고. 그렇게 되면 대통령의 운신의 폭이 좁아집니다. 미국에서도 백악관 사람들 얘기 별로 신문에 잘 안 나오지 않아요? 대통령 측근 참모는 단정적인 얘기를 가능한 한 안 해야 하는데 많이들 하고 있으니 세상이 바뀐 건지 현 정부의 스타일이 그런 건지...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위원)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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