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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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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대안담론포럼]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 ①

다음은 지난 6월 11일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부설 정치경영연구소가 주최한 제1회 대안담론포럼의 첫 번째 발제인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를 정리한 것이다.

정치경영연구소는 지난 3월 첫째 자유주의 이념을 한국적 맥락에서 연구함으로써 한국의 정치경제 지형에 들어맞는 '한국형 자유주의' 이념을 체계화하고, 둘째 그 자유주의 이념 틀에 부합하는 일관성 있는 제도 및 정책 패키지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며, 셋째 한국형 자유주의 이념과 그 정책 기조를 현실에서 구현해갈 현재 및 미래의 정치가, 기업인, 언론인, 시민활동가들과 교류·협력한다는 목표 아래 출범했다.

연구소는 이를 위해 본업인 연구 외에 우선 매학기 한 차례씩 대안담론포럼을 열기로 했다. 지난 11일 제1회 대안담론포럼을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이근식 교수 외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의 발제가 이어졌는데 뒤의 두 발제 내용들은 다음 주말에 차례로 소개될 예정이다.

참고로, 제2회 포럼은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를 주제로 하여 12월 초에 열리며 그 이후의 포럼 일정과 주제는 연구소의 홈페이지(☞바로 가기)에 소개돼 있다. <편집자>

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제1회 대안담론 포럼 (2010년 6월 11일)
제 1세션 발제문
발제자 :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보면, 자유주의는 근대 서양에서 신분사회에 기초하였던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건설한 시민혁명을 주도하였던 중소부르주아지들의 사회사상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은 인식과 윤리의 양면에서 불완전하다는 정확한 인간관 위에 서 있습니다. 자유주의의 주요 주장은 만인평등, 자유와 인권의 존중, 개인주의, 독립심과 자립심, 사상과 비판의 자유, 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만인평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만인평등 사상은 역사발전을 추진한 힘찬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신분, 재산, 성, 인종 등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는데 수천 년간 내려오던 이런 악습을 철폐한 것은 바로 만인평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자유주의를 좋아합니다.

자유주의에 대한 혼란, 그러니까 자유주의가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에 대한 혼란이 발생하는 큰 이유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쉽게 이야기하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고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제 생각에는 앞으로도 도전을 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최선의 정치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자유방임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것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신자유주의 때 다소 부활 했지만 이제 다시 또 비판을 받아서 결국은 신자유주의자조차도 최소한의 공공복지와 최소한의 정부규제를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방임의 시장경제를 그대로 주장하는 19세기와 같은 고전적, 경제적 자유주의는 현실적으로 지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면 자유방임주의와 개입주의라는 경제정책 두 가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속적으로 서로 교대하여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는 중상주의라는 개입주의가, 19세기에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방임주의가, 2차 대전 이후에서 1970년대까지는 복지국가의 개입주의가,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는 신자유주의가 압도하였다가 최근에는 다시 신자유주의가 퇴보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방임주의는 자본주의의 실패라는 폐단을 누적시키고, 개입주의적인 경제정책은 국가의 실패라는 폐해를 누적시키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영원할 수가 없으므로 결국 교대로 등장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자유와 평등에 관해서는,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서로 갈등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제 생각에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 평등을 섞어서 쓰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평등은 본원적 평등, 사회적 평등, 경제적 평등의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원적 평등이란 모든 사람은 인격, 존엄성, 인권에서 완전히 평등하다는 만인평등의 생각을 말합니다. 본원적 평등이 사회 속에서 실현된 것이 사회적 평등입니다. 동등한 참정권을 갖는 정치적 평등, 법 앞의 평등, 일상생활에서의 평등 의식, 이런 것들이 사회적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원적 평등이 상당히 마음에 들기 때문에 강조를 하고 싶어서 '사회정의에 관한 으뜸 공리'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만인평등이라는 본원적 평등은 그 자체로 자명하기 때문에 그 타당성,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이 필요 없는 유일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사회과학의 주장도 그것이 왜 옳은가에 대한 논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인평등이라는 것은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것을 검증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원적 평등, 즉 만인평등을 사회과학 '사회정의에 관한 으뜸공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자유와 상생의 정당성이 도출된다고 볼 수 있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동등하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도출할 수 있는 근거도 만인평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생도 마찬가지지요. 모두가 다 똑같이 동등한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을 함으로써 비로소 상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원적 평등은 자유의 정당성을 도출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사회적 평등은 자유와 똑같이 간다고 볼 수가 있지요. 왜냐하면 사회적 평등이 확대되는 만큼 자유가 확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차별이 감소하는 만큼 자유가 확대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문제는 경제적 분배의 평등인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상충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시장경제에서 결정되는 분배가 정당하고 정의에 맞는다고 일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그것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윤리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분배를 정의에 부합할 수 있다고 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분배를 어떻게든 보다 좀 더 좋은 상태로 만들어 보자고, 즉 경제적 평등에 가깝게 하자고 사회가 개입하게 되면 사유재산권의 자유가 침범당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와 충돌하는 평등은 경제적 평등 하나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제가 만인평등 때문에 무척 좋아하지만 자유주의의 한계도 물론 있습니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시장의 실패를 적치한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 말고, 자유주의 그 자체 즉 정치적 자유주의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의 원칙에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의 한계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사람은 개인성도 있지만 사회성도 있는데 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 특히 개인 간의 이해상충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는 자유주의 가지고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죠.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새로운 원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상생, 인간의 상생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상생이라는 것은 서로가 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소중하고 침범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를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세한 예는 제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저는 갈등문제가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생의 입장에서 갈등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진보와 보수도 서로 상생의 갈등에 있다고 봅니다. 보수주의자만 이 땅에 가득하거나 또는 진보주의자만 이 땅에 가득하면 어느 경우나 우스꽝스러운 사회가 될 겁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자본주의는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고, 100% 사회주의는 사회를 망가뜨릴 겁니다. 결국 어느 정도 섞느냐, 그것은 그때그때 따라서 사회 내의를 따라서 하되, 분명한 것은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죠.

제가 또 최근에 많이 생각한 것은 재벌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자유의 주적으로 점점 떠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국가 권력이 자유의 주된 적이었는데, 요즘 보면 국가는 많이 힘이 빠지고, 대신에 재벌의 힘이 점점 막강해져서, 여기에 언론사에서 오신 분도 계시지만 한겨레신문사 같은 신문사조차도 광고 때문에 재벌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과 법원인 것 같은데 우리나라도 그렇고 외국도 보면 대자본 앞에서 점점 위축되고 있는 것 같아서 이에 대해서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하나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옛날부터, 옛날이라고 해도 한 200년 정도 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이상적이니까 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경제를 결합한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최근까지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롤즈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고 애로우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인데, 저도 그런 생각을 오래 했습니다. 제가 거기서 깨어나게 된 것은 아마 소련과 동구라파 경제의 붕괴도 있지만 밀의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밀은 1870년경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재산에 의한 불공정한 분배가 없어지지만 권력에 의한 불공정한 분배는 그대로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국가가 모든 사람을 장악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실종될 것이라고 140년 전에 예측을 했는데 그 말을 읽고 제가 정말 그렇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국가가 생산을 관리해야 되고 생산을 관리하려면 노동을 관리해야 되는데, 노동을 관리한다는 것은 바로 사람을 관리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존재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대한 국가권력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데, 그러한 비대한 권력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세종대왕 같은 분은 몇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인데 어떻게 그렇게 비대해진 국가권력 하에서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접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섞는 것이 유일하고 그 섞는 배분 비율은 그때그때의 입장에 따라서 정해야 되지 않을까. 아마 암중모색하면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은 진보의 의미인데, 진보의 내용이 뭐냐. 최근에 제 나름대로 정리가 된 것은 무엇이냐면 사회적, 경제적 평등의 확대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과거에 비해서 오늘날 우리 근대 민주주의사회가 더 좋은 점이 무어냐 하면, 제 생각에는 노예가 없어지고 신분차별이 없어진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하고 원칙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한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80% 양반들에게 혼이 나면서 평생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여자 분들은 거의 99%일 것입니다. 결국 그런 부당한 인간 차별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진보입니다. 사회적 차별의 축소인 겁니다. 그리고 제 생각은 결국은 길게 보면 경제적 분배의 차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그것도 아주 중요한 내용일 것입니다. 결국 빈부격차가 점점 완화되고 축소되어 나가는 것, 그래서 따지고 보면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점점 축소되어 나가는 것이 그것이 진보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주의의 입장에서도 딱 맞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에서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만인평등이거든요. 시민혁명 때도 그 사람들이 계속 내건 것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내걸었거든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평등의 확대를 진보라고 파악하는 입장이고 그래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수용하고, 민주주의는 그대로 지지하고, 자본주의경제를 기본으로 인정하지만 자본주의의 실패를 치유하기 위한 적절한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고, 공동의 갈등문제를 상생의 원리로 해결하며, 아울러 국가의 실패를 예방하고 재벌의 횡포를 방지하는데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현한 것을 저는 성숙한 복지국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출한 원고에는 합리적 복지국가라는 원고를 드렸는데 그 후에 생각을 해 보니 순진한 복지국가와 성숙한 복지국가로 나누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순진한 복지국가가 무엇이냐면 이는 국가에 대한 실패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지 못했던 신자유주의 비판을 받기 전의 복지국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성숙한 복지국가는 무엇이냐면 국가의 실패에 대한 신자유주의 비판을 수용하고 시장 실패 못지않게 국가의 실패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대책도 충분히 고려한 복지국가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재벌의 횡포에 대한 고려도 충분히 기울이는 국가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제가 시간이 있어서 뒤에 정석구 위원님의 코멘트를 봤더니 내용이 대충 공자왈 맹자왈 아니냐, 이런 내용인 것 같습니다. 딱 맞습니다. 제가 쓴 것은 다 공자왈 맹자왈이고 이것을 과연 그러면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이냐 묻는다면 그것은 제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나가는 방향을 명확히 아는데 있다고 봅니다. 자기가 나아갈 목표 지점이 명확하면 그 다음부터는 현실을 신중하게 분석하고 따져 보면 대충 답이 나옵니다. 요는, 자기가 지향하는 목표들을 가진 사회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밤낮 헤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공자왈 맹자왈 같은 이야기가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 그 목표를 찾는데 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특히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질문인데, 제가 지난 20년 동안 그 문제를 생각을 했는데, 제 생각엔 묘방, 묘책, 예를 들어서 제갈량의 주머니 같은 것은 이 세상에는 없어요. 그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다 같이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서 노력을 할 때 사회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정말 희대의 훌륭한 세종대왕과 같은 분이 나와서 리더십을 발휘하든가 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로 먹을 때 사회가 발전하는데, 그럼 사람들이 생각을 바로 먹게 하는데 선두에 서야 할 사람들은 누구냐. 여기에도 썼지만 학자와 판사와 언론인 세 사람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석구 의원님 지적한 것처럼 세 부류가 다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 그것은 나한테 물어봐도 답이 없습니다. 요는, 제가 보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언론입니다. 언론이 정론을 펴고, 언론이 정론을 펼 때 교수들도 정론을 펴고. 왜냐하면 결국은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 그래도 옳은 말을 해야 됩니다. 먹고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 제가 보기에는 교수들이 먹고살 걱정이 제일 없어요. 게다가 저처럼 공립학교에 있으면 재단 눈치 볼 것도 없고. 그런 사람들이 말을 바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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