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해방의 영웅 드골은 제2차 대전 이전의 부패한 프랑스 언론을 경멸했다. 그래서 그는 늘 프랑스에도 영국이나 미국처럼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신문이 하나 있어야겠다고 염원해 왔다. 드골은 프랑스가 해방되자마자 존경받는 언론인 위베르 뵈브-메리(Hubert Beuve-Mery)에게 프랑스 국민이 신뢰할 수 있고 세계가 존경할 수 있는 신문 창간의 과업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르몽드>이다. <르몽드> 기자들은 그 동안 기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창립 정신과 사명에 충실하게 신문을 만들며 오늘까지 그 명예를 지켜왔다. 그런데 이러한 <르몽드>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운명을 맞게 됐다. 경영 적자로 그 동안 쌓인 부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돼 자본 재구성을 결정하고 6월28일까지 부채를 정리하고 경영 자금을 제공할 인수자를 공모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6월말까지 <르몽드>를 매각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때까지 인수자를 찾지 못하면 파산 신청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유럽 언론 르몽드의 운명에 초미의 관심
68년 5월의 학생혁명은 <르몽드> 모델을 전 유럽의 언론에 '전염'시키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르몽드> 문제는 프랑스 언론의 문제를 넘어 전 유럽 언론의 관심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르몽드> 매각은 세계 언론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언론 독립을 지켜온 유일한 신문이 사라진다는 것은 마지막 남은 자유 언론의 신화가 사라진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르몽드> 자매지인 국제문제 전문 주간지 <쿠리에 엥테르나쇼날(courrier international)>은 "<르몽드(le monde)>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위기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다. 프랑스어로 <르몽드>는 세계라는 뜻이기 때문에 <르몽드>의 종말이라는 표현으로 곧 '세계의 종말', 즉 신문세계의 종말을 시사한 것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도 지난 12일 보도에서 르몽드의 새 인수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르몽드가 60년 이상 유지해온 기자들의 독립 유지권을 잃게 될 수 있다며 "불안한 <르몽드>의 미래"를 우려하며 적어도 <르몽드> 기자가 알고 있는 "<르몽드>는 그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상황을 비관했다.
독일의 <슈피겔>은 그 우려가 더 컸다. <르몽드>를 창간한 뵈브-메리는 신문의 독립을 강조하면서 이 독립이 없어지면 <르몽드>는 여느 신문과 다를 게 없어진다고 말한 것을 상기하며 신문의 매각을 아쉬워했다. <슈피겔>은 이어 사르코지 정권 아래서 그와 가까운 재벌들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풍토에 우려를 나타냈다.
"프랑스는 자유사상가를 많이 배출한 나라지만 그 동안 많은 신문이 권력에 예속됐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영방송의 사장을 임명하도록 제도를 바꿨다. 그와 가까운 기업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신문들을 매입했다. <피가로>를 인수한 전투기 제작회사 사장 세르주 다소와 명품회사 루이비통(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는 경제지 <레제코>를 매입하고 무기와 비행기제작회사를 경영하는 아르노 라가르데르는 이미 <르몽드> 신문의 주식을 17%, <르몽드> 인터넷 판 주식의 34%를 장악하고 있다."
독일의 <쉬드도이췌 차이퉁>은 "<르몽드>를 노리는 전투가 시작됐다"는 제목 아래 <르몽드> 인수에 국가가 대주주인 텔레콤 회사 <오랑주(Orange)>가 막판에 참여한 동기에 의혹을 제기했다. 정치적 음모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르몽드>의 경영을 돕는 인수 협상이 "정치 경제 전투"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 <르몽드>. <르몽드> 매각은 세계 언론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언론 독립을 지켜온 유일한 신문이 사라진다는 것은 마지막 남은 자유 언론의 신화가 사라진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르몽드 |
<르몽드> 부채는 얼마나 되나?
<르몽드>가 경영악화로 지난 수년간 부채가 누적된 것은 장 알려진 사실이다. <르몽드> 경영진이 공표한 공식 부채는 약 6000만 유로에 달했다. 이것도 작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회계감사 결과는 부채가 8000만 유로에서 1억 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제 추진 중인 인쇄시설 현대화 사업비용을 포함하면 1억4000만 내지 1억5000만 유로의 자본이 필요하게 된다는 기업 분석이다. 부패 누적의 책임은 이미 2007년 불신임을 받고 떠난 콜롱바니 사장과 그 경영팀에 있다. 그러나 기업 쪽에서는 기자들이 합리적인 경영 쇄신을 거부하여 경영을 이렇게 악화시켰다고 기자들의 책임을 거론한다. 기자들이 주요 정책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기자의 책임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르몽드>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는 기자들의 저항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자들의 저항을 꼭 부정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다.
현재 <르몽드>를 부채의 수렁에서 구원해 줄 백기사는 은행가 마티외 피가스 자선사업가(mecenat) 피에르 베르제 그리고 사업가 자비에 닐로 구성된 이른바 트리오와 중도 좌파의 주간지 <누벨 옵게르바퇴르>의 창업자 페르드리엘과 오랑주 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페인의 프리사 그룹과 이태리 에스프레소 그룹은 처음에는 유망 후보로 떠올랐으나 이제 기권한 상태이고 스위스에서 프랑스어 신문을 발행하는 <렝지에(Rinfier)>가 관심을 보이고 수일 내 최종 결정을 내리리라는 관망 상태에 있다. <르몽드>로서는 트리오가 <르몽드>를 인수하면 현재의 편집 노선을 유지하면서 위기를 헤어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파트너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트리오의 <르몽드> 인수를 가로 막는 예상치 못한 돌발사건이 5월 말~ 6월 초 사이에 발생해서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돌발사건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개입이다.
사르코지의 르몽드 인수에 개입
지난 주 주간지 <르프엥(le Point)>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에릭 포테리노 르몽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인수자 중에 문제가 있는 기업인이 있다고 불평을 토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금주 초에는 포테리노 사장을 에리제 궁에 '소환'해서 '훈계'했다고 <리베라시옹> 신문이 보도해서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두 매체의 보도는 포테리노 사장 자신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르몽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신문이니 만큼 정권이 좌파이건 우파이건 <르몽드>에 문제가 있을 때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자명지사이다. 과거에도 그랬다.
문제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르몽드>를 인수하기에 부적합하다'고 불만을 표시하는 이유가 트리오의 인수 후보 기업인이 친 사회당 인사이자 2년 후 실시될 대통령 선거에서 사르코지의 막강한 경쟁자로 부각된 현 IMF 총재 스트로스 칸과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가 나도는 가운데 <르몽드> 인수 신청 마감일을 불과 며칠 남겨두고 갑자기 인수 신청을 낸 기업의 사장이 사르코지의 측근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더욱 의혹을 키우고 있다. 대통령이 선거를 의식하고 <르몽드>의 경영에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마지막 카드는 기자회의의 손에
<르몽드>는 중도 좌파 경향의 신문으로 사르코지에게는 그다지 우호적이 아니다. 따라서 사르코지는 차제에 자기와 가까운 기업이 <르몽드>를 인수하면 2년 뒤 대선에서 자기에게 유리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해서 <르몽드> 같은 주류언론의 경영에 개입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답은 당연히 부정적이다. <르몽드>로서는 앞에 말한 트리오가 인수하면 가장 바람직하다. 원래 이보다 더 바람직한 처방은 <누벨 옵세르봐퇴르>가 <르몽드>를 인수하는 것이었다. 이 주간지는 언론관이나 이념이 <르몽드>와 별 차이가 없다. 사전 접촉으로 양측 사이에 기자들의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 양해가 이루어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데 <르몽드>의 부채 총액이 처음 공표된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드러나면서 <누벨 옵세르봐퇴르>의 페르드리엘이 부채을 단독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공동 출자자를 찾으면서 사르코지와 가까운 <오랑주>와 제휴하게 돼 일이 잘못 꼬이게 된 것이다. 사르코지가 자기기 반대하는 트리오가 <르몽드> 인수자로 결정되면 신문사가 현재 추진 중인 인쇄시설 현대화에 필요한 3000만 유로의 공적자금 지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듣고 포토리오 사장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물론 사르코지 측에서는 서둘러 모두 낭설이라고 공식 부인했지만.
이제 운명의 시간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언론계에서는 사르코지의 '협박'이 오히려 기자들을 자극해서 사르코지의 타협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만드는 촉발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 보다 먼저 경영진이 사르코지의 압력에 굴복하는 결정을 내릴 것이냐 말 것이냐 도 관심거리다. 프랑스 언론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시간이 바싹바싹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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