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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미국을 바꾸려면 한국과 일본이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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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미국을 바꾸려면 한국과 일본이 바뀌어야 한다"

[6.15 공동선언 10주년 연속 인터뷰] <1>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6.15 공동선언 10주년을 맞는 오늘의 한반도는 우울하다. 6.15 선언을 사실상 거부하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냉각되기 시작한 남북관계는 천안함 침몰 사건을 계기로 파탄 일보 직전에 와 있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신냉전' 시대가 돌아왔다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돌이켜보면 6.15 선언 이후부터 노무현 정부 말기까지 7년 반 동안에도 한반도의 정세가 '언제나 맑음'은 아니었다. 서해상에서 무력 충돌도 있었고,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가 있었으며, 북폭론이 횡행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6.15 선언을 바탕으로 한 남북간 교류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면서 위기는 억제되었다. 냉전의 마지막 섬 한반도에 싹튼 평화의 기운 앞에서는 대결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남북의 냉전·대결주의자들과 8년간 미국의 정치권력을 잡았던 '네오콘'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

2000년 북미 공동 코뮈니케, 2002년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를 설정한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은 6.15의 화해와 평화 정신이 낳은 소중한 열매였다. 레드 컴플렉스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논쟁과 토론이 가능해진 사회 분위기 역시 6.15가 가져온 커다란 변화였다.


원인이야 어찌됐건 이명박 정부는 지난 3월의 천안함 침몰을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압박 강화와 6.2 지방선거 승리의 디딤돌로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한나라당의 참패로 드러났다. 냉전 시대의 북풍 몰이가 이제는 더 이상 한국민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지난 10년간 축적된 6.15 선언의 성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임기는 아직도 2년 반이나 남아 있고 정권을 흔들 정도로 강력한 국민들의 요구가 없는 한 화해와 평화를 외면하는 정책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은 이처럼 '우울한 6.15 선언 10주년'을 어떻게 이겨 나가야 할지를 모색하기 위해 6.15 선언의 주역과 국내외 최고 전문가들의 연속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연속 인터뷰에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시작으로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의 백낙청 명예대표와 김상근 현 대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임동원·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참여한다. <편집자>


▲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4일 밤 평양 목란관 만찬에서 남북공동선언문 서명에 앞서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며 참석자들의 박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6.15 선언 10주년인데 남북관계는 10년 전보다 나빠졌다. 6.15 선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현재 동북아 정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와다 하루키 : 6.15 선언은 한국의 민주화 혁명에 이어서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남북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한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그것은 '남북은 이제 전쟁을 하지 않으며 평화로 가야한다'는 선언이었다. 그로 의해 북한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남한에서는 매우 새로운 국민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남북 교류 및 협력도 활성화됐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도 6.15 정신을 계승했고, 남북관계는 많이 개선됐다.

그러나 한계는 대외관계에서 왔다. 6.15 선언 이후 남북관계는 개선됐지만 북미·북일관계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삐걱대는 과정에서 북한은 내부의 긴장이 높아졌고 결국 2006년엔 핵실험까지 저질렀다.

그런데 거기에는 포용정책에 대한 북한의 불안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한과 교류하고 남한을 알면 알수록 남한 민주주의의 힘과 경제력이 정말 크다는, 그래서 의존도가 높아지면 포용을 넘어 남한에 흡수돼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한국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오히려 대외관계에는 악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

남북관계가 진전됨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자 남북관계를 다루는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분위기가 높아졌고, 이 와중에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햇볕정책과 달리 북한에 긴장을 높이는 것이었으므로 남북관계는 당연히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 미 행정부의 등장으로 나아질 거라고 기대됐던 북미관계 또한 결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북한은 2009년 2차 핵실험을 했다. 지금 동북아 정세를 보면 남북관계 파탄과 북미관계 정체 두 가지가 겹쳐서 나타나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난 3일 고(故) 서동만 교수 1주기 추모식 조사에서 "동북아 정세가 1년 전보다 더 악화됐다"고 평가했다. 왜 그렇게 보는가.

와다 하루키 : 작년 이맘때까지는 그래도 6.15 정신으로 돌아가 보자, 남북관계 만이라도 잘 해 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도 그와 관련한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 전에 내놨던 마지막 메시지였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북한 조문단이 방문해 유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올해 3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한국도, 일본도 대북관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천안함 사건의 대응 조치로 남북관계가 파탄이 난 상황에도 '남북관계는 역시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바람이 드러난 게 이번 6.2 지방선거 결과가 아닐까. 대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의식이 선거 결과로 드러났다고 본다.

프레시안 : 천안함이 북한 어뢰 공격에 의해 침몰했다는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미국과 일본이 전폭적 지지를 보내는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반신반의하고 있고, 한국 시민들조차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나. 일본의 시민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와다 하루키 : 천안함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처에 대해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가 "만약 일본이 천안함 사태와 같은 방식의 공격을 받았다면 한국처럼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상찬을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신중함을 결여한 발언이었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하토야마의 말은 '천안함 사태 같은 위험한 일이 벌어지니까'라는 논리로, 후텐마(普天間) 공군기지를 오키나와 현 내에 유지시키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든 셈이다.

일본인들은 이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다. 국민들, 특히 오키나와 현민들은 후텐마 기지의 현 내 이전안에 반대를 해 온 만큼 그들 사이에서는 하토야마가 후텐마와 관련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안함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이 떠돌고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하토야마 정부가 고교 무상화 정책에서 조총련(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계 조선학교만 제외시키자 일본에서는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는 동정 여론이 일기도 했다. 그런 차에 하토야마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과잉반응을 했던 것이다.

일본 시민들은 한국 정부가 증거를 내보이면서 북한을 지목했고, 모든 신문이 북한 소행이라고 쓰고 있으니까 별다른 의심 없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북한 소행에 대해 별로 깊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북한을 나쁜 나라라고만 말해왔고 일본에 가한 나쁜 짓만 알려왔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제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불감증에 빠져 있다고나 할까.

물론 다 시큰둥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일본의 시민단체, 운동단체 가운데서는 천안함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고, 의견도 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재로선 정보 등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관심 정도에만 머물고 있다.

프레시안 :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은 대북 제재를 결정했고, 제재가 효과를 발휘할 거라고 믿고 있다. 제재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와다 하루키 : 일본의 예를 들어보자.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북 제재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제재라는 걸 할 수가 없다. 이미 숱한 제재로 북한과의 관계가 전부 차단됐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제재를 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임 대통령이 10년간 만들어온 관계가 워낙 많다보니 끊어버릴 '꺼리'도 많다.

이처럼 제재란 것은 '하면 할수록 (할 것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관계가 사라지면 제재도 무용하다. 그러니 북한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제재 카드를 반복해 꺼내는 건 좋지 않다. 또 북한은 실제로 제재 때문에 2번이나 핵실험을 했고 이번에도 제재가 가해지면 3차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긴장을 푸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제재를 하고자 하는 심정은 알겠지만 숨을 고르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또 이런 문제가 있을수록 6자회담을 속히 재개해 관련국들이 머리를 맞대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북한과 문제가 있을수록 그 위험을 높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섭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수립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긴장을 풀기 위해 일본 정부가 먼저 나설 가능성은?

와다 하루키 : 어렵다. (웃음) 민주당으로 정부가 교체되고 하토야마가 총리를 지낸 8개월 동안 일본은 북한에 대해 어떤 이니셔티브도 갖지 못했다. 오히려 종래 자민당 정부보다 더 강경한 대북 정책이었다고 본다. 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됐고, 동아시아축구연맹 대회를 위해 일본에 오려고 했던 북한 여자 축구선수들의 입국을 금지했다.

이번에 간 나오토(菅直人) 신임 총리가 들어섰지만 일본이 먼저 뭔가를 하기는 간단치 않을 것이다. 한국이 먼저 일본에 뭔가를 제안한다면 모르겠지만, 일본이 먼저 국제 공동조사를 받으라거나 하는 식의 말을 한국에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일본 집권당이 강경 우파인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대북정책도 바뀔 거라는 기대가 많았는데, 하토야마는 왜 8개월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나.

와다 하루키 : 나도 지난해 8월 30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했을 때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각이 출범할 때부터 실망을 했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외상이 취임사에서 대북정책은 종래의 방침을 유지하겠다고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당 새 내각의 외상은 후텐마 기지 문제와 미일 밀약 공문서 문제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어서 그걸 정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선 자민당이 해왔던 정책을 당분간 이어가고, 조건이 나아지면 바꾸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오카다 외상이 취임사에서 '대화와 압력 투 트랙 가운데 대화를 중시할 것'이라는 말 정도는 해 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것조차 없었다. 오히려 2007년 자민당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내각이 출범할 때는 '(북한과) 대화를 중시해 가겠다'는 언급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노력을 보였는데, 하토야마 내각은 그보다 못했던 것이다.

하토야마 정부 내에는 심지어 나카이 히로시(中井洽) 납치문제담당상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대북 제재가 부족하다'고 말해 온 사람이다. 외상의 취임인사도 쇼크였지만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토야마 내각에 들어앉아 있는지, 납치문제담당상이 됐는지도 쇼크였다. 관련 시민단체들은 그의 퇴임을 바라고 있다.

이렇듯 민주당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대북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나 내각 구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 일본인들은 하토야마 정부가 후텐마 기지 문제에 취하는 새로운 방식을 응원했고 대미 추종외교가 바뀌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해 소홀한 건 비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국도 한국대로 한일병합 100주년인 올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진전된 입장을 보여주길 희망하고 있는 만큼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눈 감아 주는 게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엇갈리는 기대 속에 하토야마 정부의 대북정책은 힘없이 비틀거렸고 일관성을 잃었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바람에 나부끼는 수양버들' 같았다.

프레시안 : 하토야마가 후텐마 기지 현 외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8개월간 고군분투에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정부 자체가 무너졌다. 이번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와다 하루키
: 확실히 하토야마 정부는 오키나와에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을 바꾸려고 했고,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안보 문제와 관련해 그는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지 않는 상태를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총리직에서 사임할 때도 '자신의 나라는 스스로 지킨다', '언제까지나 미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러나 목표와 현실 사이가 비어 있었다. 일본에 여전히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상황과 미일 안보조약을 바꾸고자 했다면 상당한 결의를 가지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는 구체적 구상이 있었어야 했는데 하토야마에겐 그게 없었다.

민주당 내에는 하토야마와 달리 미군이 일본에 계속 주둔해야 하고, 일본도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이들도 많이 있었다. 이처럼 민주당 내에서도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관련된 논의가 억눌려 있는 상태였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 시작된 게 아니다. 계속 있어왔던 문제다. 그러나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존재 방식을 바꾸는 일은 미국과 일본의 오래된 관계 전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원들 뿐 아니라 관료들, 나아가 국민 전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함께 생각해야 했던 일이었다.

또한 일본에 미국 해병대가 존속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북한, 중국과 연결된 문제고 따라서 일본이 상황을 바꾸고자 한다면 미국과 한국을 설득하고 북한, 중국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게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후텐마 기지로 드러난 미군 주둔 문제는 답보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일본은 본질적인 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천안함 사건으로 대외·안보정책에서 일본의 자율성이 더 후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 내각이 하토야마 정부보다 더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펴긴 어려워 보이는데, 간 나오토 신임 총리는 어떻게 할 것으로 보는가.

와다 하루키 : 앞서 말했듯 하토야마는 공약을 지키지 못하고 미군 기지를 오키나와 현 안인 헤노코(邊野古)에 옮기게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안함 문제를 이용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민주당은 갈팡질팡하던 하토야마가 어쨌든 헤노코 이전안이라는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민당 당수(후쿠시마 미즈호)를 소비자담당상에서 파면시키면 지지율 상승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게 강한 리더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지율은 오히려 급락했다.

천안함을 거론하면서 얻으려고 했던 효과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나는 오히려 한국이 이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하토야마 총리처럼 위험한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웃음)

다음 내각에 대해서는 다소 기대하는 입장이다. 간 나오토 신임 총리는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江)라는 여성운동가를 도우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시민운동을 통해 등장한 사람이다. 스캔들로 인해 한 번 추락한 적도 있지만, 시코쿠(四國)를 순례하면서 사죄하기도 했다.(웃음)

어쨌든 이 사람은 혁신계고 정책통이며, 하토야마처럼 질질 끄는 면모가 별로 없다. 또 간 총리는 어쨌든 평화헌법 개정에는 반대하기 때문에 말을 걸기 쉬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하토야마 다음으로 취임했기 때문에 간 총리에겐 하토야마와는 달라야 한다는 요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대화로 가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 정부와 똑같아져 버리니까 말이다.

하토야마 정부에서 민주당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에 따라 좌로도 우로도 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하토야마가 후텐마 기지 문제의 충격으로 물러나야 했던 걸 생각해 보면, 이번에는 다소 왼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을까 생각한다.

간 총리에 거는 기대가 '6.15로 돌아가자' 정도까지 되는 계제는 아니다. 우리 요구는 작다. 적어도 후쿠다 내각 때 정도로라도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일본은 (대북관계에서) 후퇴한 채 답보상태에 있으니까.

프레시안 : 오바마 정부가 전임 부시 정부보다 대북관계를 잘 풀어나갈 것이라는 기대가 컸는데 그렇지 못했다. 왜 그랬다고 보는가.

와다 하루키 :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대북정책이 많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사실 미국 앞에는 다른 외교적 난제가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라크 철군 문제, 또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응하는 문제다.

한편 오바마 대통령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내세우며 핵폐기에 전력을 다하려고 했지만 그것에 대해 러시아와 이야기하는 건 비교적 편할지 몰라도 이란, 북한 등 작은 나라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건 어렵다.

그렇다보니 모든 문제를 제재라는 방식으로 풀게 되어 버렸고, 그마저도 이란에만 집중하고 있다. 전쟁을 한 이라크나 지금 적으로 지목하고 있는 이란에서는 석유가 나오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니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그저 '좀 놔둬 보면 북한이 바뀌겠지'라고 생각하는 소극적인 상태에 그치고 있다. 전임 부시 대통령도 처음엔 강경하게 나서다가 마지막엔 비교적 적극적인 이니셔티브를 만들어 갔는데 오바마 정부는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북한이 거기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입장이다.

지난해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을 때만 해도 미국은 북한에 대해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강력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과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작년 8월 만남으로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한 수순이 어느 정도 잡혔었다. 그러나 6자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에 합의해 가는 상황에서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고, 결국 미국은 한국이 취하는 제재 방침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대북 이니셔티브도 한국에 넘겨주게 됐다.

이런 미국의 입장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기 위해선 역시 한국과 일본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다. 두 나라 다 어려운데, 나는 현재 아무런 관계도 없어진 일본이 이럴 때일수록 나서서 북한과 무조건 교섭, 무조건 국교수립을 하자는 태도를 취해서 상황을 타개하면 어떨까 싶다. 일본식의 햇볕정책, 포용정책이 한국의 입장도 떠받칠 수 있고 미국의 변화도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북한의 핵무기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일본을 향하고 있으며 일본은 유일한 피폭국인 만큼 이 문제를 가장 강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현재 그렇지 못하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얼마 전 미 의회조사국에서 나온 보고서를 보면 '북한 체재가 내구력은 강하지만 이번 위기를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뿐 아니라 한국 일부 세력도 여전히 북한의 붕괴를 바라고 있다. 이런 붕괴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가.

와다 하루키 : 우선 중국이 북한을 세게 압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당장 천안함과 관련해서도 중국은 북한에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 중국이 있는 한 북한을 포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남북은 기본적으로 평화적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개성공단만큼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원천적인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 붕괴를 상정하고 국제적인 압력을 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일본을 보면 국내적, 국제적 대북 압박 정책이 모두 실패해 왔다.

북한에 변화가 온다면 그건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이후가 될 것이다. 북한에 어떤 파격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일은 이 지역의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인데, 붕괴론은 여러 방법 중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북한이 붕괴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그건 한국에 있어서도 매우 절실한 문제다. 북한이 붕괴하면 가장 곤란한 것이 한국 아닌가. 그러니까 남북관계는 붕괴론을 제외한 방법으로 가야만 한다.

● 와다 하루키는 누구?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자 저명한 한반도 연구가. 당초 전공은 러시아 근대사였지만 1980년대부터 북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한국 연구를 시작했다.

와다 교수는 재일 조선인의 전후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앞장서왔으며 지난달 10일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표된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의 일본쪽 대표이기도 했다. 한국에 소개된 저서로는 <한국전쟁>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북조선-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등이 있다.

와다 교수는 지난 3일 자신의 첫 한국인 제자인 고 서동만 교수의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인터뷰는 4일 연세대에서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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