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는 텔레비전 왕국을 건설하고 TV를 선거 무기로 활용해 세 번째 총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며 언론을 정치도구로 악용하고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편파 뉴스 강요에 시달려 여성 스타 앵커가 방송국을 그만두게 됐다는 뉴스는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 온다.
여성 스타 앵커, 베를루스코니의 뉴스 간섭에 항의 사직
그러나 앵커가 베를루스코니의 편파 뉴스 강요에 항의하며 자리를 그만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이미 2004년에도 'RAI TV'의 인기 여기자로 앵커를 맡고 있던 릴리 그루베르(Lilli Gruber)가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뉴스 내용 간섭에 항의하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앵커 자리를 던져버리고 나왔다. 공교롭게도 언론의 정도를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이때도 여성 앵커였다. 그루베르는 앵커를 그만두는데 그치지 않고 그해 실시된 유럽의회의원 선거에 베를루스코니와 맞서 야당인 '올리브나무 당' 후보로 출마해서 23만 6000표를 얻어 1위로 당성됐다. 베를루스코니보다 거의 2배나 많은 득표였다. 멋진 복수였다.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방송인은 누구나 가만두지 않았다. 인기 토크쇼 진행자인 엔조 비아지(Enzo Biagi)와 미첼레 산토로(Michele Santoro)도 베를루스코니의 피해자들이다. RAI 회장인 루치아 아눈지아타(역시 여성이다)는 당시 이러한 총리의 인사 개입이 역겨워 사임하고 만다. 부동산업에 성공한 다음 일찍이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린 베를루스코니는 텔레비전 방송사를 군대 조직처럼 통솔했고 인사에 일일이 개입했다. 기자뿐 아니다. 자신에 대해 좋지 않게 입을 놀리는 연예인들도 다시는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어디서 많이 듣는 이야기 같다.
▲ 베를루스코니의 편파 뉴스 압력에 항의해 퇴사한 앵커 마리아 루이자 부시(왼쪽)과 릴리 그루베르. 베를루스코니는 텔레비전 방송사를 군대 조직처럼 통솔했고 인사에 일일이 개입했다. MB정권도 다분히 베를루스코니의 언론 패턴을 모방하고 있는 듯하다. ⓒ프레시안 |
텔레비전은 오늘의 베를루스코니를 만들어 준 마술방망이다. 그는 텔레비전의 매력과 위력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능란하게 이용한다. 미국 보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머독의 폭스뉴스(Fox News)가 베를루스코니의 텔레비전 경영 수법을 모델로 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언론 윤리를 개의치 않는 미디어 경영자들에게 베를루스코니는 부러운 '도사'로 보일 것이다. 그는 텔레비전 세계에서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악화의 역할을 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가 BBC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존경 받는 언론기관으로부터 끊임없이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언론을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총리가 된 다음 RAI에 측근 인사를 심어 공영방송을 자기의 사유물처럼 취급하고 있다. 언론을 기업이나 정치의 도구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의 나쁜 버릇을 배우고 모방하는 것이 두렵다. 유감스럽게도 KBS 사장 인사를 비롯해서 그 동안의 행동을 보면 MB정권도 다분히 베를루스코니의 언론 패턴을 모방하고 있는 듯하다.
RAI가 문밖으로 밀어낸 정치토론, 인터넷 창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런데 이제 베를루스코니의 반(反)언론적 행동에 대해서 말로만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움트고 있다. 지난주 베를루스코니 하수인의 편파 보도 압력에 항의하면서 앵커 자리를 그만둔 마리아 부시나 5년 전에 베를루스코니의 뉴스 간섭에 대들고 RAI를 떠난 여성 앵커 그루베르도 언론의 정도를 지키기 위해 불의에 도전한 용감한 언론인들이지만 최근 더 극적인 안티 베를루스코니(anti-Berlusconi) 의거(義擧)가 일어나고 있다. <르몽드>에는 사건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보도됐지만 국내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건 전말을 간단히 설명한다.
사건은 이탈리아 지방 선거일을 3일 남겨둔 지난 3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08년 세 번째로 총리가 된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는 유럽 연합 회원국 중에서도 경제위기에 잘 대응하지 못해 국가경제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다. 베를루스코니도 기업인이지만 경제는 잘 모른다. 외신에 이미 보도된 것처럼 이탈리아는 스페인이나 아일랜드와 함께 그리스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악영향을 받을 위험이 높은 나라로 분류돼 있다. 중간평가의 성격을 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전망은 베를루수코니 정권에게 그리 밝지 못했다. 베를루스코니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장악된 공영방송 RAI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심층 정치 토론 프로그램의 제약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일을 3일 앞두고 3월25일 마지막 정치토론이 예정돼 있었다. 국민이 관심을 갖는 중요한 토론이었다. 그런데 RAI 이사회에서는 2월 중 정당별로 안배된 방송 시간이 우익 정당에 불리하게 책정됐었다는 이유를 들어 이날 토론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RAI 규제위원회 내의 우익 대표 제안에 따른 것이다. 토론이 여당에 불리하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리라. 야댱에서는 당연히 이 결정을 정권 차원의 사전검열이라며 규탄했다.
정치토론 프로그램 아노제로(Annozero-투표함)를 맡은 산토로는 검열에 대한 항의 표시로 3월 25일 RAI 채널의 정치프로그램의 일시적인 삭제에 대한 여론의 분노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라톤 항의방송 라이페르나노테(Raipernanotte)을 편성하기로 마음먹는다. 라이페르나노테는 사간 제한 없이 계속되는 마라톤 토론이라는 뜻으로 만든 말이다. 방송을 금지당한 이탈리아 기자들이 조직한 반(反)베를루스코니 마라톤 텔레비전 방송에 30만 네티즌이 참여했다. 표현의 자유에 헌정한 라이페르나노테는 볼로냐에서 생방송하고 로마와 나폴리를 포함해서 200개의 도시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서 중계했다. 특히 40개의 지역 TV와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에 중계방송됐다. 30만 명의 네티즌이 접속했고 시청률은 13%에 이르렀다.
토론 프로그램을 이미 준비해둔 방송의 편성팀은 RAI 고위층의 방송 금지 결정에 따르지 않고 예정대로 토론을 진행했다. RAI 채널로는 방송할 수 없으니 지방 TV와 위성방송 인터넷을 통해 방송했다. 편성팀은 별도의 장소를 빌려 토론을 진행하고 토론 장면을 로마 나폴리 볼로냐를 비롯한 200여 개의 도시에 미리 설치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했다. 또 40개가 넘는 지방TV방송국이 토론을 중계했고 수많은 인터넷 홈페이지가 방송을 스트림해서 중계했다. 토론장에 참가한 인원은 5000 명을 넘었고 앞에서 밝힌대로 방송을 접속한 네티즌 수는 30만 명을 넘었고, 시청률은 13%에 이르렀다. 대성공이었다. RAI가 방송을 안 하면 토론이 무산될 줄 알았던 베를루수코니 정권의 안이한 계산이 완전히 오산으로 들어남 셈이다.
이 '해적 방송'은 단순히 방송을 접속한 네티즌의 숫자나 시청률을 넘어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같은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방송되게끔 하기 위해 무려 6000명에 이르는 RAI 방송기자노조와 전국기자노조 이탈리아 신문편집협회 인터넷 신문들이 힘을 합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한 주간지가 "웹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라는 평가를 내릴 만큼 이태리 언론계를 흥분시킨 사건이었다.
방송·신문·인터넷 신문 공동으로 베를루스코니에 정면도전
투표 결과는 예상 밖으로 야당인 좌파의 패배였고 베를루스코니와 우익 연합세력인 자유인민당(PDL)의 승리였다. 왜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는가? 여기에는 좌파의 분열과 야당이 눈을 끌만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베를루스코니 정권이 텔레비전을 거의 90% 장악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검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좌우를 불문하고 정권이 텔레비전을 장악하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지난 3월말에 있었던 RAI 기자와 신문협회 등 언론계가 총동원 되다시피 한 라이페르나노테(Raipernanotte) 행사는 이탈리아 언론인들이 단합하면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 제국에 끌려다니고 있는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비극을 중단시킬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했다. 하나의 고무적인 '집단적 해방의 의식'과 같은 의미를 지닌 언론자유 운동이었다.
이들은 토론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뭇소리니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다큐 필름을 보여줌으로써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정권을 닮아가고 있음을 경고했다. 그리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지오르지오 나폴리타노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우리는 아직 파시즘 치하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닮은 일들이 나타나 불안합니다" 라는 긴급 호소문 SOS를 보냈다. 대통령이 위협받고 있는 민주주의를 지켜달라는 SOS였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런 SOS를 보낼 대통령이 없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지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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