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북한이 정치·경제적으로 점차 '북방'에 통합될 경우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한국의 발언력이 약해지는 것을 물론 향후 남북 경협의 비용도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러 접근 경계하던 北, 전격적인 태도 변화
북한의 대(對) 중국·러시아 '쏠림 현상'은 북한이 최근 두 나라에 라진항을 개방하기로 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북한은 얼마 전 러시아에 라진항 3호 부두를 50년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줬다. 또한 2008년 라진항 1호 부두에 대한 독점 사용권을 얻은 중국에 그 기한을 2028년까지 10년 연장해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북한은 그간 태평양으로의 물류 통로 확보를 위해 라진항에 눈독을 들여 온 중국과 러시아에 소극적으로만 협조해 왔다. 외국에 부두 사용권을 주는 게 일종의 '조차(租借)'로 비춰지는 것에 대한 경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라진항 개방 확대 조치는 오히려 북한이 주도적으로 움직인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1월 4일 라선시를 특별시로 승격했고, 27일에는 '라선경제무역지대법'을 개정해 이 지역을 본격 개발하고 외부로부터 투자를 촉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또 유엔개발계획(UNDP)이 추진해 온 북한-중국-러시아 3국의 두만강 개발 계획에 조만간 복귀해 사회주의권 투자를 유치하는 방식으로 경제 개발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북한은 국가개발은행을 설립하고 그 외자 유치 창구로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을 지명해 경제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평건투자그룹이란 회사가 '평양 살림집 10만 호 건설 사업' 등을 위해 해외 기업에 투자의향서를 보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겨냥한 둔 행보다.
북중 양국은 작년 10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올 2월 왕자루이 (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방북, 김영일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의 방중 등 고위급 인사의 왕래를 통해 경제 협력의 밑그림을 그렸다.
북한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작년 11월 말 단행한 화폐 개혁으로 물가와 환율이 폭등하면서 심화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화폐 개혁 때문에 북중 협력이 추진되는 게 아니라 북중·북러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큰 그림 속에서 나온 게 화폐 개혁"이라며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는 한국·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면 화폐 개혁은 중국·러시아와의 협력을 내다보고 마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2월 4박 5일간 베이징에 있으면서 중국 측과 핵 문제의 해법을 숙의했다.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 부상이 그처럼 긴 기간 중국에 머물면서 오직 중국 정부의 관계자들만 만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정치적으로도 양국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밀착됐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 지난 2월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왼쪽)의 방북으로 북중 경제 협력은 더욱 심화됐다. 왕 부장이 가져온 선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연합뉴스 |
'통미봉남'도 '통미통남'도 안 통했다
북한이 이처럼 중국과 러시아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여의치 않은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2009년 초 오바마 미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북미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려 했다. 그를 위해 작년 상반기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을 감행한 뒤, 8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기점으로 대화 모드로 돌아섰다. 긴장 지수를 높인 후 대화 테이블에 앉는 북한의 '고전적인' 행동 경로였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평화협정 등 체제의 안전을 꾀하겠다는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부시 시대 10년을 거치며 미국 내 대북 불신 여론이 뿌리 내린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에 허용된 운신의 폭이 좁아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미국 내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고 오바마 대통령은 이른바 '군수자본'의 힘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북핵 문제가 당장 급하지 않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판단 또한 북미관계 개선을 더디게 했다. 오바마 정부는 의료보험 개혁, 아프가니스탄 전쟁, 기후변화 입법안, 경제 문제, 민주당 의석 감소 등 산적한 국내외 현안을 다루는 데에만 에너지를 쏟을 뿐이었다.
남북관계가 무너진 상황도 북한의 발걸음을 중국과 러시아로 향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한때 통미봉남(通美封南. 북한이 남한을 제치고 미국하고만 상대함)적 태도를 보이던 북한은 작년 하반기부터 '통미통남'으로 전략을 바꿨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그같은 북한의 태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핵 문제 우선 해결 원칙만을 고수했다. 남북 정상회담이 논의되던 국면도 있었지만, 국군포로·납북자 송환 등 북한이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면서 사실상 없던 일이 돼버렸다. 그러다 보니 최소한 노무현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 수준까지만이라도 교류를 회복하겠다는 북한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북중관계 강화로 南의 위상 약화 필연적
그렇다고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 남쪽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를 아주 버렸다고는 볼 수 없다. 향후 북미 추가 회담에 이은 6자회담이 개최되어 핵 문제의 가닥을 잡는다면 미국·한국과의 협력도 중국·러시아와 협력 못지않게 진전시킬 수 있다.
대풍그룹이 개성공단 및 남북 경협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전해졌고, 라선경제무역지대법에는 "공화국 영역 밖에 거주하는 조선 동포도 라선 지대에서 경제·무역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조문을 추가했다. 이는 북한이 특히 남쪽과의 협력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가 현재와 같은 태도를 고집한다면 북중·북러 관계가 구조적으로 심화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러한 경향이 계속될 경우의 문제점에 대해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북중 경협은 남북 경협과 경쟁관계"라며 "북중 경협이 활성화·구체화되면 광물자원, 노동력 등 한정된 북한의 자원을 둘러싸고 남북 경협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철 숭실대 정외과 교수는 "북중 경제 관계가 깊어지면 산업 표준이 중국식으로 정착되어 남북 협력이나 통일 국면이 올 경우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우리의 4강 외교에서 남북관계는 하나의 중요한 지렛대였는데, 그 축이 무너짐으로써 우리가 '약소국 외교'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대북 전문가는 "북한이 작년 중반까지 추구했던 통미봉남이 현실화했더라도 우리가 미국에 강력히 요구한다면 그런 상황을 깨뜨릴 수 있다"며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봉북(封北)'으로 북한이 중국·러시아 쪽으로 기운다면 이쪽에서 주도적으로 봉북을 풀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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