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말 스코틀랜드인의 아브로스 선언
전근대 민족주의의 한 예로 아브로스(Arbroath) 선언을 살펴보자. 이것은 1320년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작성한 것으로 중세말의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 태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아주 희귀한 자료이다.
이것은 당시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1세가 계속 스코틀랜드를 괴롭히자 스코트족의 지도자들이 로마교황에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에서는 '스코트 족은 대 스키타이에서 와서 ----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많은 승리와 노력을 하여 오늘날의 영토를 확보했다. 이 왕국은 대대로 130명의 왕이 다스렸고 한번도 외부인에 의해 왕통이 무너진 적이 없다'고 먼저 그 민족의 기원과 영토, 정치적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이라고 표현하며 '다른 탁월한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 민족은 많은 특징에 의해 구분된다'고 그 민족적인 특수성을 주장한다.
또 '우리는 영광이나 부,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만을 위해 싸운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이라면 죽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다'며 '우리는 100명이라도 살아남는 한 결코 어떤 조건하에서도 잉글랜드인의 지배에 복속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곳이 아니면 갈 데가 없는 불쌍하고 약소한 스코트족에게 독립을 주도록' 교황에게 요청하고 있다.
처음의 민족적 기원, 영토에 대한 언급은 민족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민족적 특수성의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인에 의해 왕통이 무너진 적이 없다는 것과 자유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고 잉글랜드인에게 복속되지 않겠다는 결의는 민족자결권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이 당시 스코틀랜드의 지배계층인 영주, 성직자, 부유한 자유농들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민족주권도 범위에서 상당히 제한되기는 하나 존재한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근대민족주의의 요건인 민족자결권, 민족정체성, 민족주권이라는 요소들을 어느 정도는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이 근대 민족주의와 다른 점은 먼저, 스코트민족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포괄하는 민족주권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특권층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코트민족 전체 공동체를 위해 발언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민족정체성 속에 기독교적인 '선민(選民)'의식이 나타난다. 이렇게 종교와 결합해 있으므로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생각되는 근대 민족주의와는 다르게 보인다. 또 잘 알 수는 없지만 그 민족의식이 정치운동을 일으킬 만큼 대중적인 기반을 가졌거나 강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당시에 마찬가지로 위협을 받았던 웨일스가 잉글랜드에게 굴복하여 그 후 200년 동안 차별을 받은 데 비해 스코틀랜드는 강한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독립성을 계속 유지한 것을 보면 그 정도를 과소평가하기도 어렵다. 반면 민족자결권과 관련해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근대 민족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것은 사실이나 공통적인 요소도 있다. 그러면 근대 초의 잉글랜드를 보자.
근대 초 잉글랜드의 민족주의
잉글랜드는 근대 초 민족주의의 고전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비교적 대중적인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민족주의의 원형(原型)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개혁이 로마교황청에서 벗어난 앵글리칸처치의 발전을 가져오고 영어판(버내큘러) 성경의 발간을 통해 민족의식이 고양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이미 했다. 물론 종교개혁이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나 민족의식이 아직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본격화하는 것은 엘리자베스시대 중기부터이다. 1570년 교황 피우스 5세에 의한 엘리자베스여왕의 파문, 잉글랜드에 다시 카톨릭을 복구시키려는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싸움(1588년) 등을 통해 그것은 점점 뚜렷해진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많은 민족문학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뒤에도 왕을 살해하려한 카톨릭의 건파우더 음모사건(1605년), 17세기 말에 제임스2세가 취한 친카톨릭정책, 카톨릭국가로서 스페인을 대치한 프랑스의 위협이 이어지며 카톨릭에 대한 두려움이 18세기 중반까지 한 세기 반 동안이나 잉글랜드인의 의식을 강하게 지배했다. 이 기간은 또한 잉글랜드가 혁명기의 내전으로 완전히 분열된 시기였고 동시에 아일랜드와 북아메리카를 식민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카톨릭적인 내외의 적과 계속 대립하고 싸우는 가운데 민족주의가 발전했으므로 그것은 당연히 프로테스탄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보통 '프로테스탄트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대중의식의 성장은 출판물의 수를 통해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1560년에서 1611년 사이에 영어판 성경이 100종이나 나왔고 1612년에서 1640년까지는 약 140종이 나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강제적으로 교구교회에 참석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성경과 기도서를 통해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다. 외국의 위협이 민족주의적 성경해석을 불러온 것이다.
그 외에도 16세기 후반에 나온 존 폭스의 <순교자의 책>이나 리처드 해클류트의 <잉글랜드 민족의 주된 항해, 여행, 발견>은 프로테스탄트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폭스의 책은 1570년 이후 모든 교회에 성경과 함께 반드시 비치하도록 된 것으로 잉글랜드에서의 카톨릭과의 싸움을 그린 일종의 '민족사'이다. 해클류트의 책은 잉글랜드인의 대외팽창을 서술한 것으로 인기가 높았다.
영국혁명기(1642-49년)에는 대중적 출판이 훨씬 늘어나 1645년에는 무려 722종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어느 해에도 400종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또 이 시기에 발행된 팜플렛은 매년 1,000종 이상이었다. 그것들은 매우 프로테스탄트적이었고 평등주의적이었다. 이런 출판물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정치의식과 프로테스탄트적 의식을 크게 고양시켰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선민'으로서의 잉글랜드인이 강조되었다.
1649년에 찰스1세가 처형당하고 1688년의 명예혁명을 겪으며 잉글랜드에서 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했다. 그리고 점차 의회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또 프로테스탄트적인 의식은 17세기 말에 가면 점차 약화되었으나 그럼에도 잉글랜드의 광범한 대중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프로테스탄트 민족정체성이었다.
잉글랜드는 1707년에 스코틀랜드와 통합하여 영국(Great Britain)왕국이 되었다. 따라서 그 후에는 두 민족의 통합을 위해 '영국성(Britishness)'을 선전하고 보급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잉글랜드민족주의는 점차 영국민족주의로 바뀌었다.
린다 콜리는 18세기 영국(British)민족주의의 상세한 분석을 통해 그것이 훨씬 오래된 잉글랜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영국성(Britishness)은 프로테스탄티즘, 프랑스와의 전쟁, 제국의 확보와 밀접하게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콜리 테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국의 전근대 민족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 종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사회적 범위는 출판물의 범람에서 알 수 있듯 비교적 넓은 편이다. 여기에는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중들도 널리 참여했다. 한 편에서 영국인으로서의 민족정체성 형성에 전쟁과 제국형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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