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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신년 공동사설, 무엇인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한반도포커스'] 역사적 맥락으로 본 '신년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한반도포커스> 5호(2010년 1~2월호)를 전재합니다.

<한반도포커스>는 극동문제연구소의
교수진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한반도 문제 관련 정책소식지입니다. 이번 5호는 '북한 신년 공동사설과 한반도'를 주제로 7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1월 첫째 주 동안 매일 1편씩 소개됩니다.

1972년 설립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는 북한·통일 문제에 관한 연구와 정책 제안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최고의 민간 연구기관입니다. <편집자>

<전체 내려받기>

제1호(2009년 5~6월호) 북한의 미래와 한반도

제2호(2009년 7~8월호) 2차 북핵실험 이후 한반도 정세

제3호(2009년 9~10월호) 한반도 정세, 국면전환은 가능한가?

제4호(2009년 11~12월호) 북핵문제 해결의 전망과 과제

제5호(2010년 1~2월호) 2010년 북한 신년 공동사설과 한반도

신년사 형식의 변화과정

북한의 신년사는 1946년 1월 1일 김일성이 "신년을 맞으면서 전국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한 것이 최초였다. 그 후 김일성의 신년사는 매년 계속되었다. 다만 권력투쟁과 숙청이 진행되었던 1957년과 1966년~1970년까지 5년 동안은 김일성의 신년사 없이 로동신문의 '신년사설'이나 '신년 축하연에서의 연설'로 대신하였다.1) 1987년에도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았는데, 이는 새해를 앞두고 12월 30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이 행한 '시정연설'로 신년사를 가름하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 신년사는 일정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신년사, 축하문, 연설, 신년사설, 공동사설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김일성 생존 시에는 신년사의 형태로 김일성의 육성으로 발표되었고, 그 내용이 로동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김일성 사후, 즉 1995년 이후에는 권력을 승계한 김정일이 직접 신년사를 하지 않고 매년 1월 1일 당보(로동신문), 군보(조선인민군), 청년보(청년전위) 등 3개 신문의 공동사설 형식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물론 방송에서는 아나운서가 낭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1998년도에는 공동사설에서 청년보(청년전위)가 빠진 적이 있는데, 이는 1997년 10월 8일 김정일이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추대된 것에 따른 조치, 즉 김정일의 공식 직함이 당 총비서와 인민군 최고사령관임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다시 3개 신문 공동사설 형식으로 발표되고 있다. 북한은 1946년 이후 2010년 현재까지 모두 신년사 36회, 연설 7회, 축하문 1회, 신년사설 5회, 공동사설 16회를 발표하였다.2)

▲ 조선중앙TV 아나운서가 1일 노동신문 등 3개 신문에 실린 신년공동사설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년사의 성격과 의미

북한은 신년사를 "당과 국가의 수반이 새해를 맞이하여 시행하는 공식적인 연설이나 그 연설문"이라고 정의한다.3) 당해 연도 국정 전반에 대한 지표를 제시하고, 정책방향을 대내외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수령의 공개적·강령적 교시로서 일 년 동안의 분야별 정책추진과제를 직접 밝힌다는 것 이외에도 이를 토대로 모든 행정기관, 기업소, 협동농장에 이르기까지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지침이 되기 때문에 신년사는 공식적이고 포괄적인 정책 제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신년사는 북한 주민에 대한 통치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년사가 발표되는 1월 1일 아침에 전 주민들은 의무적으로 신년사를 청취해야 하며, 각 시·도 및 단체 그리고 공장·기업소 별로 신년사 관철 결의 모임과 궐기대회를 거의 한 달 동안 진행한다. 그러므로 신년사는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주민에게 직접 부과하는 과업 제시인 셈이다.

김일성 생전 신년사는 로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주요 신문의 전면을 장식하였으며, 사후에 신년사를 공동사설의 형식으로 발표하고 있는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북한에서 언론의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언론을 '수령의 사상을 실현하는 강력한 사상적 무기'로 ①인민대중에 대한 사상교양자적 역할, ②조직동원자적 역할, ③문화교양자적 역할, ④대적투쟁·대적언론전의 강력한 무기로서의 역할, ⑤대외선전과 외교의 수단으로서의 역할 등을 수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4)

북한 신년사가 '당과 국가의 수반이 대내외적으로 표방하는 국정전반의 지표 제시'인 만큼 로동신문을 중심으로 북한의 모든 언론들은 연간 지속적으로 신년사의 주요 내용에 대해 주민을 대상으로 한 지도와 선전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당연히 북한 주민들은 신년사를 외워야 하고, 이것이 어려우면 신년사의 기본적인 체계라도 숙지해야 한다.

북한을 연구하고 관찰하는 입장에서 보면, 신년사 또는 신년공동사설은 북한의 정세를 분석 전망하고 지난해와의 차이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료이다. 지금은 북한 관련 자료가 다양하고 신속한 입수가 가능하지만, 김일성 사망 이전만 하더라도 신년사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높았다. 신년사는 북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료일 뿐 아니라 정치·경제·군사·대남·대외관계 등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육성으로 발표되었다는 점에도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신년사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 신년사와의 비교이다. 발표에 걸린 시간, 분량(글자 수), 제시된 과업 등 모든 것을 우선 전년도와 비교한다. 북한 신년사는 일반적으로 △서론, △전년도 평가, △새해 추진과업, △결론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정일 시대 신년사의 특징

김일성 시대에서와 달리 1995년 이후 소위 김정일 시대에 공동사설 형식으로 신년사가 발표되면서 신년사의 맥은 이어 지고 있지만 김일성 시대와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북한 주민들의 신년사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김일성 시대 신년사와 달리 김정일 시대 신년사는 공동사설의 형식으로 발표되면서 중량감이 많이 떨어졌다. 더욱이 김일성 주석처럼 직접 신년사를 육성으로 들려주지 않는데다, 신년사에서 제시된 계획이 희망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이 주민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둘째, 김일성 시대와 달리 김정일 시대 신년사는 공동사설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신년사의 구조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공동사설은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당과 군을 찬양하는 내용이 대폭 늘어났으며 '주체사상 4대원칙'이나 '3대 혁명력량 강화론'과의 연계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공동사설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신년사의 위상이 다소 약화되더라도 이를 통해 당면과제인 유훈통치의 부각이나 김정일 중심의 권력체제 강화 등에 신년사를 활용하는 것은 훨씬 용이해졌다. 빠르게 바뀌고 있는 내외정세의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도 일관성이 강조되는 김일성 시대의 신년사 보다 공동사설의 형식이 덜 부담스럽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신년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새해 추진과업'이다. 이는 한 해 정책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각 분야별 시정지침과 중요한 대남 및 대미제안이 포함되어 있는 정책대강을 밝히고 구체적 과제를 제시하는 일종의 국정지표라 할 수 있다. '새해 추진과업'은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개요, △사회주의 건설, △대남·통일, △대외관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김일성 시대보다 김정일 시대에 '사회주의 건설' 부분이 내용구성면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5) 아울러 김일성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대남·통일' 부분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비해 김정일 시대에는 '대남· 통일' 부분이나 '대외관계' 부분의 비중이 김일성 시대에 비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당히 낮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이는 김일성 사후 북한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과 체제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외부적인 문제보다 내부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건설' 부분 언급 시 '경제' 분야를 먼저 언급했던데 비해 김정일은 '사상' 분야를 먼저 언급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만 2010년 공동사설에서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경제' 분야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6) 내용 구성면에서 보면 '경제' 분야가 공히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김정일 시대에는 '사상'과 '내부결속' 분야가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역시 김정일 정권이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때마다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3대 진지 강화'(1996년), '붉은기 사상'(1997년),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1999년), '4대 제일주의'(2002년) '선군사상'(2003년) 등 다양한 통치노선을 제시했던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김일성은 그 동안 '사회주의 건설', '대남·통일', '대외관계' 등 '3대 혁명력량' 부분을 예외 없이 모두 언급한데 비해 김정일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간은 대외관계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정세나 대남 및 통일 환경의 변화가 '3대 혁명역량 강화론'을 계속 견지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음을 반증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998년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헌법」을 개정하고 김정일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신년사에 곧 바로 반영된다. 1999년 신년공동사설에서 "선군혁명령도"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되었으며,7)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2003년에는 "위대한 선군기치 따라 공화국의 존엄과 위력을 높이 펼치자"라는 제목의 공동사설을 발표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 때 '선군사상'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최초로 공동사설에 등장한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선군사상'을 새로운 통치이념의 하나로 설정하고 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통치 행태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005년에는 "전당, 전군, 전민이 단결하여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라는 공동사설을 통해 선군정치 체제의 확립을 촉구하였다. 북한은 '선군령도' 10년 만인 2009년 4월 다시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에 국가주석의 권한을 부여하고, 주체사상과 함께 '선군사상'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규정하였다.8)

1999년 공동사설의 제목은 "새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였다. 즉 김정일 시대가 지향하는 목표가 사상·군사·경제대국을 이루는 것, 즉 '강성대국 건설'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신년공동사설에서는 강성대국 건설의 3대 기둥, 즉 '사상중시', '총대중시', '과학기술중시' 노선 하에 총진군할 것을 강조하였다. 2002년에는 강성대국 건설에서 비약의 해로 빛내이기 위해 '우리 수령', '우리 사상', '우리 군대', '우리 제도' 등 '4대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2009년에는 "총진군의 나팔 소리 높이 울리며 올해를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빛내이자"라는 제목의 신년공동사설을 발표하였다. 이 사설은 모든 초점이 김일성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에 '강성대국의 문을 열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는 '제2의 천리마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듯 김정일 시대의 신년사의 주된 흐름은 '선군령도'라는 통치방식과 그 목표로서 '강성대국 건설'로 압축될 수 있다. 김일성 시대와 달리 공동사설이라는 형식으로 인해 내용의 일관성은 떨어지나 내외 상황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신년사에 대한 북한 주민의 흡수력과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매년 새로운 용어로 '총적 과제'가 제시되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김일성 시대 신년사가 '대남·통일'분야와 '대외'분야에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김정일 시대에서는 '사상'이나 '내부결속'을 강화하는 내부용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과거보다 수세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0년 신년공동사설 "당 창건 65돌을 맞은 올해에 다시 한 번 경공업과 농업의 박차를 가하여 인민생활에서 결정적 전환을 이룩하자"는 전환기적 상황에 놓인 북한의 상황인식과 대응방향이 담겨 있다. 동시에 대남·대미관계에서는 유화노선 지속 입장을 시사하고 있다. 공동사설에서 나타난 특징을 철저히 점검하여 새해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시키는 '대전환의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註>

1) 한국전쟁 중 이었던 1953년 당시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 자격으로 김두봉이 '신년사'를, 김일성은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축하문'을, 그리고 로동신문은 '신년사설'을 발표하였으나 별도로 분류하지 않고 하나의 신년사로 간주하였음.

2) 연설 7회는 1954~1956, 1958~1959, 1969, 1987, 축하문 1회는 1952, 신년사설 5회는 1957, 1966~1968, 1970, 공동사설 16회는 1995~2010.

3) 『조선말대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2), p. 1912.

4) 엄기영, 『신문학 개론』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9), pp. 23~26.

5) 최경석, "김정일 시대의 신년사와 통치강령 변화에 관한 연구" (2006년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박사학위논문) pp. 76~80. 참조.

6) 1995년 공동사설에서 '경제' 분야 우선 언급 이후 15년 만에 처음 언급.

7) 2003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사회주의 강행군을 현명하게 이끄시는 김정일 동지의 활동은 선군혁명령도로 일관되여있다. 인민군대를 핵심으로 하여 혁명대오를 튼튼히 꾸리고 혁명적 군인정신을 무기로 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밀고 나가는 것은 김정일 동지의 독특한 령도 방식이다"라고 김정일 시대 통치형태의 특성을 밝히고 있음.

8) 2009년 개정 「사회주의 헌법」 제3조.

* 원제 : 북한의 신년사, 의미와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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