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를 대체할 통화 바스켓에는 엔화, 위안화, 금, 중동 산유국들의 새로운 공동통화 등이 포함되며, 이런 작업이 완료되는 9년 뒤에는 '달러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앞으로 달러 가치는 폭락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일까.
나아가 미국의 패권이 작동하는 기존 질서에서 미국의 동의 없이 기축통화 지위를 박탈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런 움직임은 경제질서 뿐 아니라 국제정치역학에 중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인데, 그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 석유시장에서 달러를 배제하려는 국제적인 비밀회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 이후 달러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연합뉴스 |
이런 의문들에 대해 <인디펜던트>는 7일 후속 보도들을 통해 다각도의 분석을 시도했다. 우선 이 신문은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미국의 저명한 한 투자전략가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비밀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당사국들이 부인하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시장에서 이런 반응에 대해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정리했다. 시장은 금값의 사상 최고치로의 폭등, 그리고 달러 가치 하락으로 반응해 이 보도내용에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여줬다.
'달러의 종말' 특종보도로 국제금값을 폭등시켰던 로버트 피스크 기자 역시 사우디아라비아 중앙은행장 무하마드 알-야세르의 부인성 발언에 대해 "통상적인 걸프 정치학의 일환"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중대한 정치적 함의를 지닌 금융혁명(A financial revolution with profound political implications)'이라는 분석 기사에서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사담 후세인의 군대가 사우디 국경에 배치된 상황임에도 미국이 전세계에 이라크의 침공 소식을 방송할 때까지 이 사실을 부인한 전력이 있지 않느냐"면서 "이 정도의 변화가 몇 년에 걸쳐 일어나려면 언제나 비밀스럽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피스크는 "석유시장에서 달러를 배제하려는 계획은 최소한 2년 이상 공공연히, 그리고 은밀하게 논의되어 왔다"면서 "석유 거래가 달러 시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계획은 정치적으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피스크는 이번 움직임에는 수십년 동안 미국이 정치 및 경제적 패권을 휘둘러 온 것에 대해 중동, 유럽, 그리고 중국에서 커지고 있는 적개심이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비밀회의 참여국, 전세계 달러 표시 외환보유액 80% 차지"
피스크에 따르면, 전세계 7.2조 달러의 외환보유액 중 아랍국가들이 2.1조 달러를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은 2.3조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혼자서 9000억 달러 상당의 달러 표시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등 이번 비밀회의 참여국들은 전세계 달러 표시 외환보유액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단합할 경우 아무리 미국이라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동국가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중동산유국들은 오랫동안 미국에 대한 경제 및 정치적 의존에 대해 점차 인내심을 잃어왔다.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는 대표적인 친미정권으로 알려져있지만. 지난 2007년 이후 슬그머니 러시아와 국방, 군수, 석유 정책에 대해 공조체제를 가동시켜왔다.러시아 역시 이번 비밀회의의 참여국이며, 통화 바스켓에 루블화도 편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은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의 손아귀에 철저히 장악됐으며, 아랍국가들은 1973년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금수조치로 서방에 압력을 가할 힘을 잃었다. 이에 따라 중동국가들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경제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아랍 땅에서 이스라엘 축출하려는 목표와 연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스라엘이 아랍 땅에서 떠나는 대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해주자는 제안을 아랍국가 전체에 제시한 바 있는데, 사우디 측은 이 제안에 '시효가 없다'고 말한다. 피스크는 "이런 제안이 무시되거나 거부된다면 그들은 새로운 금융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중동평화를 도모할 동맹국들을 찾을 것이며, 중국은 기꺼이 동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피스크는 "석유 시장에서 달러를 배제하면서 촉진되는 거대한 금융 변혁은 중동에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면서 "특히 아랍세계를 무대로 미국과 중국의 경제패권 다툼이 본격화될 경우 그렇다"고 지적했다.
달러를 대체할 통화 바스켓으로의 전환에는 현재 2018년까지 9년 후의 일로 계획돼 있다. 중국과 아랍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9년이라는 시간을 설정한 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흔들리지 않을 것인가.
이에 대해 피스크는 "사우디 당국은 이 기간 중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잘 알고 있다"는 말로 이스라엘과 미국의 동맹관계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토대가 흔들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 사이에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7% 증가할 경우 10조 달러로 현재의 두 배가 되는 반면 미국이 전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달러 가치 하락, 오히려 미국의 행운?
이런 흐름으로 볼 때 달러는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달러 가치가 폭락하는 양상으로 진행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과 중동의 산유국 등 달러 자산이 외환보유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들은 '달러의 덫'에 걸린 처지이기 때문에 달러 가치가 급락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달러 가치가 서서히 하락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미국일 수 있다. <인디펜던트>의 스티븐 폴리 기자는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저명한 경제학자 사이먼 존슨 MIT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이런 시각을 전했다.
존슨 교수는 "국제상품 결제통화이자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자산으로서 달러의 지위를 손상시켜 달러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오히려 미국에게 좋은 소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도 달러 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하는 것을 바랄 것"이라면서 "립서비스 차원에서 미국은 강한 달러 정책을 말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누군가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려 한다면 미국에게는 행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폴리 기자도 "오바마 행정부는 달러 가치 하락에 대해 '사실상 용인'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는 관측이 무성하다"면서 "달러 가치 하락은 경기침체로 초래된 경제적 타격을 어느 정도 줄여주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주말 IMF 총회에서 환율 시장의 안정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요구를 미국이 거부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달러 가치 하락을 바라고 있다는 관측을 촉발시켰다. 그 근거는 이렇다. 경기침체로 세수가 부족해지고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느라 현재 미국의 정부 부채는 11.86조 달러에 달한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부채 상환 부담이 줄어든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고 제조업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반면 다른 정부들은 곤경에 처해 있다. 금융위기에 대비해 막대한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 나라들이 달러 가치 하락으로 금이나 다른 화폐로 바꾸기 시작하면 전세계 시장에 갑자기 달러가 넘쳐나게 되고 달러 가치는 더욱 추락하게 된다. 산유국에게 이런 사태는 특히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다. 원유 수출대금을 달러로 받게 돼 있어 이들 국가들은 달러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달러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의 화려한 귀환', 서서히 몰락하는 달러 패권
주목되는 것은 '금의 화려한 귀환'이다. 폴리 기자는 "미국 달러 패권에 기초한 기존 경제질서가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전세계 시장에서 금값이 폭등하고 있다"면서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이후 금은 국제통화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앞으로 통화 바스켓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투자자들도 달러 가치 하락이 불가피한 것으로 우려하면서 달러와 그 이외의 미국 자산의 대안으로서 금을 확보하려고 노력해 왔다.
세계금협회(WGC)의 아람 시시마니안 회장은 "지난 18개월 동안 금융 및 경제의 혼란을 거치면서 금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관심이 비상하게 높아졌으며, 전세계의 정책전문가, 중앙은행, 투자자들 사이에서 그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금값의 변동과 금의 위상 변화는 달러 가치 폭락을 예고하기보다는 달러를 앞세운 미국의 패권시대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는 바로미터로서 계속 관심의 초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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