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자는 건 1971년 우리가 남북 적십자회담을 제안하면서 말했던 건데, 원래는 일종의 대북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전까지는 우리가 북쪽보다 못 살았는데, 70년대로 넘어와 남북한 체제 경쟁에서 북쪽과 상대해도 뒤질 게 없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이산가족 만남을 제안하려고 했던 겁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국내언론에는 보안을 강조하면서도 외국 언론한테는 좀 후한 편인 것 같아요. 당시 총리였던 JP(김종필)가 일본 언론한테 대통령의 8.15 경축사 내용을 미리 말해버리는 바람에 6~7월 경에 이미 공개가 돼버렸어요. 그러니 대통령이 8.15에 제안하는 게 김이 빠졌고, 그냥 8월 12일에 대한적십자사 총재 명의로 제안하게 됐던 겁니다.
주변 정세에 대한 고려도 있었어요. 70년대 초 미소 간에 긴장 완화 분위기가 있었는데 71년 4월 대선에서 DJ(김대중)가 그 흐름을 타고 남북 교류·협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걸 보고 박 대통령은 남북문제의 국내정치 이슈화 선점권을 야당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구상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 역시 정치적 계산이었죠.
북쪽도 남쪽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정치적 비난을 받을 수 있고, 미소·미중 화해 분위기 속에서 외교·안보 차원에서 상대방 의중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았습니다.
상대방의 실정도 파악하고 자기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선전하고 싶은 정치적 계산이 맞아 떨어져서 적십자회담이 몇 번 이어졌는데...그러면서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적십자회담은 정치선전장이 돼버렸어요. 처음에 북한은 난데없이 각 면(面)마다 소위 '료해요원'(해설요원)을 한 명씩 보내서 적십자 사업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설명하자는 제안을 했어요.
실제로 와 보니까 남측 체제를 흔들 수 있다는 판단을 했는지...제안의 속셈이 뻔하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 쪽은 거부했지만, 실랑이 끝에 우리가 상호주의로 하자고 그 제안을 받아버리니까 이번에는 이산가족이 만나기 위해서는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가 선행돼야 한다고 떼를 쓰더군요. 그러니 그 일이 되겠어요?
그렇게 국제정치적 배경, 국내정치적 의도, 안보 차원에서의 상황 점검을 목적으로 했던 적십자회담은 실질적인 상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나 버렸어요.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 숨은 정치적 의도
▲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한 장면 ⓒ연합뉴스 |
설운도가 그때 '잃어버린 30년'이란 노래를 불러서 유명해졌습니다. 그걸로 아마 가수상도 받았을 겁니다. '잃어버린 30년'은 북쪽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헤어져 살게 됐고, 민족의 비극이 심화됐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사·작곡을 한 사람들이나 가수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그렇게 활용됐던 측면이 있었어요.
약간의 시차가 있지만 '금강산댐' 사건도 있었어요. 북한이 댐을 만들어서 남쪽에 수공(水攻)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거였는데, 분단국가에서는 안보가 가장 중요하고, 그만큼 군부가 정치에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숙명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KBS 이산가족 생방송은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눈물정치'를 해보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거였습니다. 북쪽 때문에 전쟁이 났고, 전쟁 때문에 이산가족이 생겨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메시지였죠. 신군부는 눈물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보강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KBS가 뉴스만 잠깐 하고 아침부터 심야까지 이산가족 생방송만 틀어주면서 눈물정치가 계속되던 끝에, 10월 9일 버마 랑군에서 아웅산 폭파 사건이 터집니다.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였는데 외무장관을 비롯해서 수많은 수행원들이 사망했어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북한과는 도저히 대화도 안 되고 이산가족 상봉도 어려울 것이다...이런 식으로 완전히 보수화됐어요.
아웅산 사건을 일으킨 북한은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유화 공세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84년 초, LA 올림픽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자면서 체육회담을 제안하는 식으로...일종의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그런 제안을 한 것 같아요.
당시 대부분의 통일부(당시 국토통일원) 사람들은 반대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청와대가 그 제안을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투덜대면서 체육회담을 준비하고 치렀어요. 그렇게 체육회담을 위해 남북이 몇 번 만나다 보니까 아웅산 사건에 대한 책임 문제가 상당히 묽어지더라고요.
최근 들어 북한이 유화 제스처를 쓰고 나오는 것에 대해 우리 정부 사람들은 국제사회의 제재가 아프니까 그걸 벗어나려고 하는 전술이라고 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단순하고 아전인수적 해석입니다.
그동안 지켜 본 바로는, 북한은 긴장지수·위기지수를 최고조로 높인 다음에 상대가 '또 무슨 일을 벌일까'하고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타이밍에 딱 유화적으로 나오면서 상황을 대화국면으로 끌고 나가는 짓을 잘 하더군요.
미국은 올해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에 대해 화를 냈지만 한편으로는 잔뜩 긴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기 전에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의가 나올 때쯤 북한이 협상 쪽으로 치고 나왔단 말예요.
미국인 여기자의 국경 침범 사건이 마침 생겨서 그걸 카드로 최대한 활용하면서...북한은 그렇게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킨 다음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유화 전략으로 쓰면서 상황을 주도하곤 합니다.
LA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체육회담은 체제 논쟁으로 번지면서 아무런 성과도 못 내고 끝났지만 세 번의 체육회담이 계속되면서 북한은 랑군 사건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셈이 됐습니다.
북한은 또 84년 여름 남쪽에 수해가 크게 나니까 구호물자를 주겠다고 했는데 수재물자 인도인수를 위한 남북 실무접촉이 적십자 본회담으로 이어지면서 85년 이산가족 교환방문 사업에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상봉 행사가 열렸습니다. 남쪽에서 이산가족 50명이 올라가서 북쪽의 가족을 만나고, 북쪽에서도 50명이 내려왔습니다.
그때는 이산가족 상봉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예술공연단도 교환 방문했는데, 그것도 굉장히 정치적인 행사였어요.
북한은 자기네 체제를 노골적으로 선전하는 공연을 서울 국립극장에서 했습니다. 남쪽도 공연단을 평양에 보냈는데, 희극배우 김희갑이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고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고 그랬어요.
그건 북쪽 사람들을 감동시키겠다는 의도보다, 평양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남쪽에 방영되면서 남쪽 사람들에게 눈물정치를 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거였습니다.
그 후 이영덕 대한적십자사 부총재가 또 이산가족 방문단을 데리고 올라갔었는데, 북한이 김일성경기장에 군중을 잔뜩 모아 놓고 그 사이에 이영덕 씨의 누님을 데려다 놓아서 남매가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했답니다. 그런 계획이 사전에 감지돼서 공연 관람을 중단하고 돌아오면서 결국 판이 깨져버립니다.
당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것은 남북이 피차 국내정치적인 맥락에서 제안하고 운영 자체도 국내정치적 효과를 겨냥해서 이뤄졌습니다. 프로그램 구성도 그랬고요.
2000년 이후 16차례 상봉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적으로 빈번하게 이뤄지고, 연속성이 생기면서 이산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줬던 것은 역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였습니다.
2000년 8.15에 시작된 이산가족 대면 상봉은 2007년 10월까지 7년 3개월 동안 16차례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3443 가족 1만6000여 명이 대면상봉을 했어요. 1년에 두 번 이상은 만났다는 얘기입니다.
2005년 6월 정동영-김정일 면담 이후에는 대면상봉에 추가해서 화상상봉도 했어요. 557 가족 3748명이 화상상봉을 했고, 편지교환도 했습니다.
물론 2000년 이후의 이산가족 상봉에 있어서도 남북 모두 정치적 계산이 없을 수 없었어요. 남쪽의 경우는 이산가족 행사를 통해 화해·협력을 심화시켜서 남북간 긴장을 완화시키는 촉매로 활용하려고 했다고 봐야 합니다.
북쪽도 긴장이 완화되면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이 줄어드는 측면이 있지만, 상봉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에서 적지 않은 양의 쌀과 비료가 들어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또 상봉 자체를 통해 북쪽 주민들이 남쪽의 가족들로부터 선물과 돈을 받아 오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인도주의로 규정하고 부각시키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북 쌀·비료 지원과 교환성이랄까 상호주의적 연계가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첫 해인 98년 4월 베이징에서 남북 비료회담이 열려서 내가 수석대표로 갔었는데, 그때도 비료 20만 톤을 우리가 주는 대신 가을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게 목표였습니다.
나는 봄에 비료를 주고 상봉은 가을에 하는 '비동시', 비료를 주는 대신 사람을 만나게 하자는 '비대칭', 비료를 사는 데 돈이 많이 들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약간의 경비가 들기 때문에 '비등가' 상호주의를 기조로 협상했는데, 그때는 북이 그것도 수용을 못 했어요.
북한 대표단은 내 제안에 대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이산가족 상봉이 순수하게 인도적인 사업이냐? 그건 매우 정치성이 강한 인도주의 사업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정확하게 성격을 규정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랬던 북한이 2000년 이후에는 왜 이산가족 상봉을 수용했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쪽이 자기네를 흡수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 쌀과 비료가 올 수 있다는 전망이 서니까 인도주의와 인도주의를 바꾼다는 생각도 하게 된 겁니다.
98년 비료회담 때만 해도 북측은 '햇볕정책으로 우리를 녹여 먹으려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하면서 굉장히 경계했어요. 그런데 정상회담 후 우리가 자기네 체제를 흔들려고 하는 게 아니고 화해협력하면서 공존하자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이산가족 상봉이 16번이나 가능했던 겁니다.
▲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26일부터 금강산에서 진행되고 있다. 남측의 이정호 씨가 북측의 형 이쾌석 씨에게 떡을 먹여주는 장면 ⓒ공동취재단=뉴시스 |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정말 다르고 싶은가?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16차 상봉 후 1년 11개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1년 7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는 겁니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했던 걸 무시해서 그러는지 '17차 상봉'이라고 하지 않고 차수도 안 붙였어요. 그건 좋아요. 김대중 정부 때도 85년 상봉은 안 치고 2000년부터 1차라고 했으니까, 그건 좋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장면이 보도되고 국군포로와 납북어부의 가족들까지도 만나면서 이산가족 상봉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국민들 사이에서 간절해졌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명박 정부는 남은 임기 3년 반 동안에,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연 평균 2회를 했으니까, 이 정부 임기 동안 최소한 7번은 하라 이겁니다. 그래야 이전 정부와 다르다, 혹은 못하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또 지난 정부에서는 한 번에 100명 씩 만나게 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더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한 번에 200명 씩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최소한 150명으로라도 늘려야 '우리는 지난 정부하고 다르다'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이명박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지난 번 적십자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도 주장했습니다. 다행입니다. 다행인데, 그럼 이전 정부보다 좀 더 잘하길 바랍니다. 이산가족 면회소도 완공됐으니까 더 많이, 더 자주.
정례화를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가? 답은 뻔합니다. 상봉이 지속될 수 있는 자양분·추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번 폴란드까지 가서 대북 지원이 핵무장에 전용됐다고 했고, 그래서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 관광이 재개되지 못하고 있지만, 쌀과 비료로는 사실 핵무기 못 만드는 거 아닙니까?
김대중 정부 때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고 하니까 보수진영에서는 이런 공격을 했어요.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인데 한 번에 100명 씩 만나서 어느 세월에 다 할 생각이냐. 김대중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제대로 하긴 하려는 거냐?'
그렇게 공격했던 사람들이 이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 정부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 다르게 하라 이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모두 이제는 '1000만 이산가족'이란 숫자의 진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숫자는 80년대 초 정치권에서 나온 겁니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끝날 때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숫자, 즉 1세대 월남자 수를 계산해 보니까 130만 여 명이 됐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렀으니까 남쪽에서 자식·손자가 태어났고 그렇게 3대를 다 치면 390만에서 400만. 사사오입하면 500만. 북쪽에도 똑 같은 수가 있다고 쳐서 '곱하기 2'를 하니까 1000만이 된 겁니다.
그렇게 숫자를 크게 부풀린 것에도 대북 압박의 의미가 있었어요. '누가 이렇게 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었느냐? 북한이다.' 이걸 주장하기 위해서 숫자를 부풀린 겁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담론 차원이나 정치 선전 차원에서 맴돌 때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이산가족 상봉이 막상 현실화되니까 그 숫자가 정부한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어요.
2000년 정상회담 후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를 집계해 보니까 13~14만 명이었어요. 밖에서는 '이산가족이 1000만인데 한 번에 100명 씩 만나면 어느 세월에 다 만나느냐'는 공격이 들어올 땐데, 정부가 '신청자가 14만 밖에 안 됩니다'라고 말해도 그건 기사도 안 되더라고요.
그 후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셔서 지금은 8~9만 밖에 안 됩니다. 한적 유종하 총재가 27일 금강산에서 "얼마 전에는 (남측 이산가족 분들이) 한 달에 2000~3000명 정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은 4000~5000명 수준"이라고 말했다는데, 어쨌든 이명박 정부 3년 반 동안 7번 이상 만나게 하고, 한 번에 200명 씩 만나게 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보다 낫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쌀과 비료가 가야 합니다. 유종하 총재가 금강산에서 북측의 조선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장재언 위원장을 만났는데, 장 위원장이 '이번 상봉은 북에서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이다. 이에 대해 남쪽에서 상응하는 호의를 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상응하는 호의'라는 건 쌀·비료를 의미하는 겁니다. 노무현 정부 말기 북한에 옥수수 5만 톤을 주기로 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안 주면서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됐는데, 쌀·비료를 주고 이산가족 상봉을 7회 정도라도 한다면 이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비난은 받지 않을 겁니다.
특히 머잖아 북미 접촉이 있고 그 후로도 계속 될 겁니다. 중국도 협조할 거고, 일본의 민주당 신정부도 자민당 아베-아소 정권 때처럼 납치 문제를 북일 대화나 북핵문제의 조건으로 걸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포괄적 패키지'로 협상을 하되 이행은 단계적으로 하는 식으로 북핵 문제가 풀려 갈 겁니다. 그럼 어차피 6자회담에서 남북이 만나야 하는데,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인도적 지원의 물꼬라도 터놔야 6자회담장에서 남북이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모양새를 연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손문상 |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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