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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비폭력·비반미' 노선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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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중의 '비폭력·비반미' 노선이 남긴 것

[DJ를 기억하며] 민족사의 거인을 보내며

우리는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야 한다. 역사상 보기 드문 한 명의 거인을 떠나보내야 한다.

격동의 한반도에서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를 거쳐 민주주의를 꽃피웠고 민족의 화해의 씨를 뿌렸던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가 이룬 역사적 업적을 기리며 그가 쌓은 성취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며 김대중을 회고해 본다.

모험주의와 기회주의 모두를 멀리한 김대중

김대중은 정치의 거인이었다. 청년 실업가로 성공한 그는 올바른 정치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비난하고 모두가 폄훼하는 정치지만 떳떳한 정치야말로 제대로 세상을 개조할 수 있는 근본적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인이었기에 그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되 그 이상을 실현하는 방식은 철저히 현실에 토대를 뒀다. 이상을 지향하되 접근방식은 가장 실용적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독재에 떠밀려 이른바 '재야'의 중심이 되었어도 그는 한 번도 폭력을 찬양해본 적이 없었다. 전두환 독재 시절 젊은 대학생들이 DJ를 중심으로 반미투쟁을 요구할 때도 그는 한 번도 반미에 동조하지 않았다. 비폭력·비반미라는 제도권 정치의 금기를 결코 벗어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4수 끝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연대하는 이른바 'DJP 연합'이라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작품이었다. 세상을 변혁시키자며 구호만 앞세운 요란한 진보 입장에서는 보수와의 야합이라고 비난했고 기득권 유지에만 목숨을 거는 무능한 보수 입장에서는 DJ에게 당할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렇지만 1997년 대선 승리가 민주주의 공고화의 역사적 계기가 되고 인권 향상과 경제위기 극복에 결정적 토대가 되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정답은 알지만 구현하지는 못하는 비현실적 모험주의와 현실적 처세만으로 원칙마저 포기하는 기회주의 모두 정치인 DJ에겐 반드시 피해야 할 양 편향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유연한 정치인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지향과 원칙을 훼손하거나 포기하는 데까지 나가진 않았다. 의회주의와 타협을 일관되게 주장한 그였지만 박정희 독재가 유신체제로 그 본색을 드러낼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투쟁했다. 투옥과 감금, 납치와 살해위협에도 불구하고 유신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광주항쟁을 짓밟고 등장한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목숨을 담보로 전향을 회유 받았지만 결코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지향을 훼절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어 햇볕정책을 펼 때도 보수 진영의 근거 없는 모략과 중상이 극심했지만 민족화해와 평화공존이라는 원칙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정치적 박해와 탄압의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장 인간적 정치인이기도 했다. 정치적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목숨을 위협했던 전두환 정권이지만 그는 결국 전두환을 용서했다. 병문안과 조문을 온 전두환의 모습에서 우리는 DJ의 정치적 용서의 힘을 본다.

투옥과 살해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던 박정희 정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대통령 재임 시절 박 대통령을 용서하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승인한 후 국가보조금 지급까지 결정한다. 자신을 죽이려 한 박정희까지도 용서하는 모습이야 말로 원칙을 지키되 용서할 줄 아는 가장 인간적인 정치 거인의 힘일 것이다.

▲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 ⓒ연합뉴스

김대중이 가는 길은 대세가 되었다

또한 김대중은 민족사의 거인이었다. 한반도에서 정치인은 한반도 반쪽에만 머물 수는 없다. 분단과 적대의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정치는 항상 불완전하고 불충분했다.

DJ는 일찍이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의 혜안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이미 1970년대에 평화통일론을 주창했고 남북의 교차승인과 유엔 동시 가입 그리고 공화국연합제를 제안했다.

이후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 한소수교와 한중수교로 남북의 교차승인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1991년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도 실현되었다. 그의 공화국연합제는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내놓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남북연합'으로 저작권을 공식 인정받기도 했다. 수십 년 전에 이미 그는 한반도의 변화와 남북관계의 발전 방향을 꿰뚫고 시대를 앞서간 것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통찰력은 대통령이 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햇볕정책의 추진과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괄목상대할 남북관계의 진전은 김대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수십 년 지속된 대결과 반목의 적대적 남북관계가 아니라 상호 인정과 공존의 화해적 남북관계를 통해 평화정착과 평화공존을 이루는 것, 그리고 북한의 점진적 변화와 평화통일을 이루는 햇볕정책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불가피한 대북정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남남갈등과 논란도 있었지만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대북 포용정책의 흐름은 이제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김대중은 민족화해의 선구자를 넘어 실천가였던 것이다.

퇴임 후에도 그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대북 송금 특검으로 정상회담 업적이 정치적으로 공격당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이 성공하기를 기원했고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노력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6.15 공동선언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북핵 해결을 위해서도 다시 9.19 공동성명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6.15 선언 9주년 행사 주제로 '6.15를 살리자'를 내세운 것은 고령의 전직 대통령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이 한반도를 긴장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리고 그 시정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정치의 거인 DJ는 한반도 반쪽에만 머물지 않고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의 거인이어야 함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남북의 분단과 적대를 해소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마음의 휴전선을 걷어치움으로써 결국 반쪽의 정치는 완성된 한반도 정치로 진전될 것이다. 그는 민족화해를 지켜내는 수호자였다.

잠들기 전 나라 위해 기도하는 전직 대통령

김대중은 인간적으로도 거인이었다. 그의 끊이지 않는 학구열은 공부를 업으로 사는 필자에게 항상 모범이 되었다. 누구를 만나도 배우고자 하고 반드시 메모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느 자리에도 항상 준비된 연설과 핵심을 찌르는 논리 전개가 좌중을 압도한다.

빈틈없는 노력과 준비가 일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간직했다.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깨알 같은 글씨의 편지에서 인간적 고뇌와 진한 정이 배어나는 것은 오직 김대중이기에 가능했다. 식당 종업원에게 건네는 구수한 농담과 자상한 배려의 모습은 필자가 식사 자리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금년 6.15 행사를 마치고 행사위원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그가 강조한 '행동하는 양심' 이야기는 그의 인간적 고뇌와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서민경제가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매일 밤 자기 전에 부인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한다는 그의 고백은 행동하는 양심론의 전제였다.

투쟁을 선동하는 게 아니라 노부부가 잠들기 전 두 손을 맞잡고 이 나라를 구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퇴임한 전직 대통령이 나라의 위기를 걱정하며 눈물로 밤마다 기도하는 모습이야말로 그의 가장 인간적인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퇴장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단지 거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할 일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걱정했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위기가 해소되고 그가 바라던 반듯한 대한민국이 자리 잡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죽음으로도 남북관계에 밀알이 되었다. 그렇게 애타게 바라던 한반도 대화국면이 그의 죽음으로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으로 남북관계의 정상화에 실낱같은 희망이 열렸다면 이제 북한의 특사 조문단 방한을 계기로 그 희망이 실제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DJ가 죽음으로써 마련한 남북관계의 정상화 계기를 또 다시 무시하고 놓친다면 이명박 정부는 영영 돌이키기 힘든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통민봉관이라는 이유로 조문단을 만나지 않는다면 민족의 화해라는 큰 흐름을 편협한 자존심 때문에 역행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 생존한 사람을 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김대중이 생존했을 때에도 항상 그를 본받고 싶은 인물로 여기며 살아왔다. 이제 고인이 되어 모든 이에게 편하게 존경받을 수 있는 역사의 거인이 되었으니 편하게 눈감으시길 간절히 바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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