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 신경림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
50주기를 맞아 기념사업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여러 곳에서 기념세미나를 하였고 또 할 예정으로 있다. 진보당 사건의 피고인으로 법정에서의 사진이 신문에 났던 인사들 중 막내 격인 정태영 씨가 몇 달 전에 별세하여 이제 생존인물은 없다.
50주기를 맞아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죽산 생시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주간 희망> 1956. 11.23).
▲ 죽산 조봉암(1898. 9. 25 - 1959. 7. 31) |
또한 진보당 창당 당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직업을 빼앗길까봐 못 들어왔다며 "진보당에 들어온 사람은 룸펜(lumpen)이어야 한다, 이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룸펜대장인 셈이지요"라고 익살로 말하기도 했다.
진보당에 대한 지지가 어느 정도였냐 하는 것은 1956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알 수 있다. 그때 이승만 504만 표에 조봉암 216만 표(총 유효투표의 30%)였는데, 주로 부정개표로 엄청나게 많은 표가 도둑 맞았다고 요즘까지도 주변에서 가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사전선거운동금지 조항이 생겨난 것은 진보당의 진출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세미나에서 서울대 법대의 송석윤 교수는 당시 이기붕과 그 참모들이 급상승하는 진보당을 견제하기 위해 낸 꾀가 사전선거운동금지 조항이었다고 말하였다. 마치 노동관계법에서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학생시절에 학우의 소개로 죽산과 동암(東庵) 서상일(徐相日) 을 각각 자택으로 방문한 일이 있다. 죽산은 초면임에도 행동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동암은 도의론만을 말한 듯하여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죽산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준다. 악수 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
명동의 극장에서 열린 진보당 창당대회도 참관하였다. 시골장터 약장사 악단과 같은 음악 반주와 박지수 시인의 열렬한 시 낭송이 기억에 남는다.
진보당을 생각할 때 고위 당직자는 아니었지만 죽산의 측근이었던 전세룡 씨의 회고담이 되살아난다. 그의 글에 의하면 진보당사에 나오는 사람들의 1/3은 진보계이고 1/3은 동암계이며 나머지 1/3은 각종 정보기관원인 '정보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 때 지방에서 선거운동을 거의 못했다는 증언이다. 신문지에 쓴 벽보 약간 붙여놓고 한 지역에서 잠깐 연설을 하다가 경찰들에 억류될까봐 급히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만 했던 그런 떠돌이식 엉성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 공판정에 앉아 있는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관련 피고인들. ⓒ연합뉴스 |
첫째는 자유당이 이승만 박사의 3선을 위해 4사5입 개헌이라는 무리수를 두었을 때 야측은 범야 연합전선의 신당(나중에 민주당이 됨)을 추진하였다. 그때 죽산은 그 신당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진보당을 독자 창당하려 한 것이 아니라 범야 대동단결의 정당에 그 구성원으로 들어가기로 한 중요한 노선상의 판단이다. 그때 서상일 등의 혁신파는 지지하였으나 김준연, 조병옥 등 보수파가 죽산의 공산당 전력을 들어 한사코 반대하여 그의 가입은 좌절되고 말았다.
둘째는 그후 서상일 씨 등 혁신파와 죽산계가 진보정당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실패하여 동암계는 민주혁신당(민혁당)으로, 죽산계는 진보당으로 나뉘게 된다.
표면상은 동암계와 정책상의 노선이 달라 당을 같이 할 수 없었다고 죽산조차 그렇게 언급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범야 대동단결에 참여하기로 한 바로 앞선 태도와 전혀 맞지를 않는다.
죽산의 일급참모였으며 일본에 망명하여 <통일일보>를 발행하던 창정(蒼丁) 이영근(李榮根) 씨는 그때 "죽산이 동암이라는 갓을 썼더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한탄하곤 했다. 한민당의 8총무 가운데 하나이며 대구의 프린스로 불리었던 동암과 굳게 손잡았더라면 자유당이 그렇게 쉽사리 음모를 꾸며 법살 할 수 있었겠느냐는 상상이다.
이영근 씨의 설명은 죽산을 둘러싼 이른바 약수동파라는, 지역색을 강하게 띤 파당이, 동암을 '지주반동' 한민당 출신이라고 배격하여 모욕적 언사를 계속 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죽산을 만난 것은 사직동의 이른바 도정궁에서였는데 그후 약수동으로 이사했다)
지금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진보당 때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6월항쟁과 민주노동운동의 강화 이후 국면이 달라졌다. 죽산도 룸펜대장이라고 자학을 했지만 그때는 8할이 농민이었고 노동계층은 거의 형성되지 못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주먹구구로 말하여 반 이상을 노동계층에 기반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을 편의상 구별하여 말한다면, 진보세력이 연합할 것인가(죽산의 첫 번째 방식), 또는 독자 행동할 것인가(죽산의 두 번째 방식)의 노선 상의 중대문제가 있다. 미국에서는, 물론 군소정당이 있기는 하지만, 진보세력이 민주당과 연합한 셈이다. (미네소타 주에서는 아직도 당명이 민주-농민-노동당이다)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정당이 큰 정당으로 있으며 집권당이 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정강정책의 차원에서 진보당은 맑시즘에서 벗어났다고 보여진다. 이동화, 신도성 씨등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진보적 학자들이 작업에 참여했었으나 지향했던 것은 민주사회주의적인 '복지사회의 건설'이었고 좀 선동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수탈 없는 경제'였다.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평화 통일'을 들고 나온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가 말하고 있어 진부한 느낌이지만 자유당 정권이 '북진 통일'을 외치고 있을 때 '평화 통일'로 받아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그것이 국민을 크게 움직였다고 보여진다.
지금의 진보정당에 예를 들어 아직도 국유화론·계획경제론 등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렵고 까다로운 얘기지만 국민의 실생활에서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북한과의 문제다. 죽산은 제헌의원이 되었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데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을 크게 긍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런데도 냉전적인 국제상황과 독재정치의 제물이 되어 2중간첩의 조작된 증언에 희생물이 되었다. 살얼음판이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사이에 종북주의 운운을 두고 싸움을 하고 분당사태가 났다. 북은 분명 실패한 체제이다. 괴멸하는 것보다 연명시켜 스스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죽산사건과 같은 제2의 법살이 우려되기도 하고, 아니 진짜 간첩사건이 생길까봐 걱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죽산사건이 법살임을 인정하고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리고 죽산의 신원(伸寃)을 위한 대법원의 재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원혜영·박상은 등 국회의원과 이부영 씨 등 여러 사회 저명 인사들이 발벗고 나서 조속한 대법원의 재심을 재촉하는 성명을 30일에 냈다. 망우리 산마루 죽산 묘소의 묘비는 뒷면이 이제껏 백면(白面)으로 있다. 차마 참혹하고 억울한 법살을 기록할 수 없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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