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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만의 좌절은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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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만의 좌절은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현실"

故 서동만 교수 영결식 엄수…유가족·친지 눈물 속 영면

탈냉전기 북한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던 학자로 노무현 정부 초기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서동만 상지대 교수가 8일 영결식을 끝으로 영면했다.

지난 4일 폐암으로 별세한 서 교수의 영결식은 이날 아침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유가족과 선후배, 동료들의 눈물 속에 엄수됐다. 이후 그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영락동산에 안장됐다.

서 교수의 지인이었던 정한식 목사가 사회를 본 영결식은 묵념과 기도, 약력보고, 조사(弔辭), 고인의 생전 음성과 지인들의 추모의 말이 담긴 영상 시청, 유족인사와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 故 서동만 교수 영결식 ⓒ프레시안

이 자리에는 특히 고인의 도쿄대 지도교수였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가 참석해 조사를 낭독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서 교수는 자신의 저서 <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에서 와다 교수에 대해 "학문의 초보에서 연구의 전문 영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며 "육친 이상의 자애"를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방문 중 제자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급거 한국으로 온 와다 교수는 조사에서 "내가 뒤에 남고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서 내가 이별의 말을 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며 애석해 했다.

이어 와다 교수는 서 교수의 <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에 대해 "독창적인 성취"라고 평가하며 "당신이 나의 학생이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와 북한 사람들이 모두 평화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신과 나의 소원이었다"며 "부디 당신의 영혼은 우리들 위에 머물러 그 소원이 이뤄지도록 지켜봐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고인의 유학 시절 친분을 쌓은 김효순 <한겨레> 대기자도 추모사를 읽으며 후배이자 동지를 잃을 슬픔을 나눴다. 김 대기자는 특히 서 교수가 2002년 노무현 대선 후보를 자문했을 때부터 국정원 기조실장을 그만둘 때까지를 회고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김 대기자는 "당시 서동만의 관심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성역인 국정원과 국방부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며 "다른 부처와 마찬가지로 원칙대로 인수 절차를 밟으려 했지만 오랜 권력기관들은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 과정에서 의견충돌이 있었고 원칙을 주장하는 서 교수는 점차 고립됐다"며 "권력기관에 제 자리를 찾아주겠다던 그의 간절한 소망이 좌절되면서 심신을 서서히 갉아먹은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어쩌겠느냐. 그것이 서 교수의 운명이고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현실이고 이 나라의 현실이다"라며 "정권이 바뀌고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서 교수가 부재하게 된 아픔을 통감한다"고 덧붙였다.

영결식을 진행하던 정한식 목사도 "서 교수는 인생에서 강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세 번 있는데 그 중 한 번이 정부 일을 할 때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 ⓒ프레시안

학생운동을 같이 하며 친구의 연을 맺은 부윤경 삼성물산 상무는 "서동만은 포승줄에 묶여 법정에 섰을 때도 기개를 잃지 않았고 영등포구치소 0.7평 독방에 갇혀 있을 때도 실컷 책을 볼 수 있다고 오히려 즐겼다"며 "리영희 교수와 함께 통방하던 때가 그립다"고 회고했다.

그는 "친북좌파라는 말도 되지 않는 매도를 당하면서 간신히 임명된 국정원 기조실장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있을 때도 맑은 심성을 잃지 않았고 힘에 도취되지 않았으며 진정한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진정한 실천가"라고 고인을 기렸다.

조사 낭독 후 상영된 동영상에서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 평소 고인을 아꼈던 이들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고교 동창인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는 "한반도의 평화와 상생이라는 서동만 교수의 뜻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유가족 인사에서 부인인 김진영 연세대 교수는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사상사를 독서하며 즐거워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그의 가족의 일원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끝까지 같이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날 영결식에는 고인의 친구였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이화여대 김수진·최대석 교수, 동국대의 박순성·김용현 교수, 김근식 경남대 교수 등 10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해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와다 하루키 교수 弔辭 전문>

▲ 스승인 와다 하루키 교수가 조사를 읽고 있다. ⓒ프레시안
서동만 씨. 내가 뒤에 남고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서 오늘 여기에 내가 당신의 관 앞에서 이별의 말을 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애석합니다.

러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던 내가 북한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였습니다. 그런 나에게 연구가 하고 싶다고 당신이 나를 찾아온 것은 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나도 연구를 갓 시작했고 당신도 연구를 시작한다는 것이어서 우리 둘은 함께 북한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실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석사논문을 썼고, 그리고 결국에는 '북한 사회주의체제 성립사'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독창적인 성취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의 학생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훌륭한 박사논문을 써 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지 25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당신은 많은 불안과 초조 그리고 때로는 절망마저도 경험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억제하고 항상 자신을 제어하여 나를 대해주었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당신이 보기 드물게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 못된 병을 상대로 그토록 치열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런 당신을 나는 박수로써 보내고자 합니다.

당신은 생애에서 두 여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행복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 여성, 화열 씨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나는 특히 당신이 김진영 씨를 소개해 주었던 그날 밤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작년에는 몇 번이나 만났지만 그런 만남들이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러일전쟁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나의 희망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인천을 안내해 주었지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작은 여행이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북한 핵문제를 토의하는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던 시애틀에서였습니다. 우리와 북한 사람들이 모두 다 평화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신과 나의 소원이었습니다. 부디 당신의 영혼은 우리들 위에 머물러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겨진 부인과 따님을 꼭 안아주기 바랍니다.

잘 가세요.

<김효순 한겨레 대기자 弔辭 전문>

▲ 김효순 대기자 ⓒ프레시안
몇 달 전 집에서 비디오 카메라로 찍을 것을 정리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 3년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1995년 2월인데, 귀국하기 보름 전 집사람과, 서동만 가족과 함께 일본 여행을 한 것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즈 반도 어느 민박 여관에서 재즈 음악을 틀어 놓고 인생을 얘기하고 노래하고 그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화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서 교수의 외동딸 서화열, 화열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에 가서 3년간 살 집을 구해놓고 보니 우연히도 서동만 교수의 집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일본에서 만났을 때 서 교수의 심적 상태는 그렇게 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놀라서 물어보니 미행과 도청을 당하고 있어 학교에 가기 싫다, 가면 누군가 수상한 사람이 뒤를 밟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가 그랬습니다. 국내에서 누구를 만나려면 항상 두리번대야 하고, 전화 도청은 당연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해외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랬다니 너무나 서글픈 일이었습니다.

제가 서 교수하고 개인적으로 했던 일 중 가장 큰 일은 산에 데리고 다닌 것입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어하더니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후배들을 산에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말을 들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 교수는 귀국하기 전에 귀국해도 괜찮겠냐고 몇 차례 타진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문사 인맥을 통해 알아보니 '여전히 조사를 받아야 한다' '아직은 안 좋다' '들어오려면 일단 각오는 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공부하러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괜찮은지를 물어봐야 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나라에 살았습니다.

다행히 별 일이 없었고,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로 취직해서 서 교수도 기뻐했고, 저도 기뻤습니다.

2002년 12월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을 때가 생각납니다. 서 교수는 일찌감치 노무현 캠프에 들어가 외교안보 진영을 짜고 지식인들의 고민을 모아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인수위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던 서 교수가 연락을 해와 자기가 갈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인맥을 통해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서 교수가 '버릇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 교수를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는 자리를 넘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할 사람도 못되고 원칙과 신념의 사람입니다.

노무현 캠프에 들어간 것은 세상을 바꾸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위를 알아보니 인수위에서 몇 차례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서동만의 관심은, 이번 기회에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성역인 국정원과 국방부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처와 마찬가지로 원칙대로 인수 절차를 밟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권력기관이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달라지겠습니까? 여러 가지 인맥을 통해 통제에서 벗어나라고 했고, 그 과정에서 의견충돌이 있었고, 원칙을 주장하는 서 교수는 점차 고립됐다고 합니다. 국정원 기조실장을 맡고서도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권력기관에 제 자리를 찾아주겠다던 그의 간절한 소망이 좌절되면서 심신을 서서히 갉아먹은 게 아닌가 저는 추정합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그것이 서 교수의 운명이고,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현실이고,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서 교수의 부재가 더욱 아픕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이 김진영 교수와 화열 양에게 항상 격려와 지원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그를 보내지만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부윤경 삼성물산 상무 弔辭 전문>

▲ 친구인 부윤경 씨가 조사를 낭독하고 읽다. ⓒ프레시안
동만아, 이제 너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니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구나. 78년도에 너를 만나 5월, 하필이면 어버이날 함께 데모를 주동해 수감된 게 어제 같고 함께 보내온 시절이 꿈같기만 한데 너만 이리 황망히 먼저 가려 하느냐.

너는 그 젊은 시절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온몸을 던졌을 때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포승줄에 묶여 법정에 섰을 때도 기개를 잃지 않았었다. 영등포구치소 0.7평 독방에 갇혀 있을 때도 실컷 책을 볼 수 있다고 오히려 즐겼었다.

친구야, 너랑 이영희 선생님과 함께 통방하던 그 때가 오히려 그립구나. 미국에 있어 이 자리에 오지 못하고 애통해 하는 종성이도 너랑 통방하던 기억을 끄집어 내더구나.

동만아, 너는 시대의 과제에 대해 도피하지 않고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고 실천적인 해결책을 추구해 온 진정한 학자이자 실천적 개혁운동가였다. 네가 평생 스승으로 모신 와다 하루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는 학문적, 실천적 성실성과 엄격함이 몸에 배여 늘 진지하였지만 그래도 늘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너는 진정 따스하고 존경스러운 친구였다.

수많은 술자리를 함께 했어도 너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몇 년 뒤에도 그 자리에서 나누었던 얘기를 끄집어 낼 만큼 기억력도 뛰어나 늘 놀라게 했었다. 너는 친구들에게 늘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잘못된 점이 있을 때 비판하되 비난하지 않았고, 나무라되 오히려 그 나무람에 애정이 가득했다.

너는 국제정세나 정치정세에 대해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꿰뚫어 보고 명석하게 정리해 내곤 했었다. 너는 또한 북한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깊이 있는 연구와 분석으로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학문을 탁상공론의 장에 놔두지 않고 직접 현실에 뛰어들어 개혁하고자 애쓴 실천가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가 되리란 기대를 아무도 하지 않았을 때 너는 그밖에 없다는 통찰과 비전으로 그를 도와 당선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어느 자리에 가서도 해맑은 너의 심성을 빛이 바랜 적이 없었다. 친북좌파라는 말도 되지 않는 매도를 당하면서 간신히 임명된 국정원 기조실장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있을 때도 너는 그 맑은 심성을 잃지 않았고 힘에 도취되지 않으면서 진정한 개혁을 이루고자 애썼던, 너는 진정한 실천가였다.

동만아, 지금이야말로 너의 전문역량과 뛰어난 실천력과 통찰력이 더욱 필요할 때인데 이리 황망히 먼저 우리를 떠나는 게 말이 되느냐.

동만아, 병상에 초췌한 모습으로 있으면서도 해맑게 웃으면서 맞아 주던 네가 벌써 그립다.

위로받고 싶을 때나 고민스러울 때 이제까지처럼 네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이제는 어떡 하냐. 우재가 술 고플 때 이제 네가 없으니 어떡 하냐, 삼철이도 수천이도 철수도 관석이도 숭배도 우리 모두가 이리 애통해 하는데 어떡 하냐.

화열이도,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바쳐 너를 그리 지극히 사랑하는 진영 씨도, 너를 먼저 보내 그리 애통해 하시는 어머님도, 너를 그리 아끼는 누님들과 자형들, 네 동생도 이제 네가 옆에 없으니 어떡 하냐.

동만아, 네가 친구였다는 게 정말 고맙다. 사랑한다. 너는 그토록 소중한 친구였다. 동만아, 미안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네가 힘들어 할 때 더 자주 찾아보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도 동만아, 이제 잘 가라. 남은 식구들과 친구들 걱정일랑 이제 훌훌 떨치고 잘 가라. 저 세상에 가서 네가 그리도 바라던 대로 아무 부담 없이 정치사상사 책 읽으면서 즐겨라. 정말 잘 가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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