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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동만 교수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한반도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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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동만 교수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한반도의 미래

다시 읽어보는 그의 칼럼과 대담, 인터뷰

4일 별세한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생전에 수많은 말과 글을 남겼다. 30년 가까이 북한을 연구하고 한반도 문제를 고민하면서 여러 저서와 학술 논문, 언론 칼럼, 각종 토론회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남북의 화해와 협력,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를 역설했다.

대학생 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일을 시작으로 2002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통일, 외교, 안보 분야 참모진을 이끌었던 현실 참여의 경험은 세계를 보는 그의 눈을 더욱 깊게 했다.

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초대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에 임명되면서 수구언론과 냉전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국정원 개혁을 시도하다 내부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한 경험은 공직을 떠난 후 그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서 교수의 학문적 성과는 일본어로 된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을 한글로 번역해 2005년 출간한 <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 : 1945~1961>에 집대성되어 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1950년대 북한에 사회주의 체제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파헤친 노작으로 북한 연구의 중요한 성과물로 평가받고 있다.

원서인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은 저명한 동북아 전문가 와다 하루키 교수의 지도하에 집필된 것이다. 서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학문의 초보에서 연구의 전문 영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와다 교수로부터 배웠다"며 "육친 이상의 자애"를 느꼈다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동국대 북한학과의 김용현 교수는 "서동만의 30~40대의 땀과 혼이 깃든 역작으로 학자로서의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책"이라며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가장 분석적으로, 치밀하게 북한의 역사를 연구한 파노라마"라고 평가했다.

2004년 공직을 그만 두고 상지대 교수로 복귀한 후 <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 출간을 마친 서 교수는 <프레시안>, 계간 <창작과 비평> 등에서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론의 주제는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것이었는데, 참여정부가 초심(初心)을 잃어 가는데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칼럼으로는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쓴 것으로, 미국의 대(對)한반도 전략을 '북핵문제를 이용한 남한 길들이기'라고 분석한 "미국의 초점은 애당초 북핵이 아니었다" (프레시안 '한반도브리핑), "북한의 핵실험과 미국의 성동격서 전략" (창비주간논평) 등이 있다.

서 교수는 또 노무현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면서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의 지지세력이자 참여정부의 출범을 가능케 했던 '평화의 지배블록'을 깨뜨렸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이에 관한 칼럼으로는 "'평화의 지배블록' 깨뜨린 참여정부의 과오", "참여정부는 初心을 버렸는가?", "한미FTA로 잃은 지지층, 언론정책으로 재결집?", "'노무현' 대신할 '새로운 중심' 세워야" 등이 있다.

▲ 2006년 2월 전문가 대담 당시의 서동만 교수 ⓒ프레시안

아울러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국정원의 개혁 과제와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결정 구조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발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만복 씨를 국정원장에 임명하자 인터뷰를 통해 국정원의 정치화를 우려했고(☞"'김만복 국정원'은 정치화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 후반 나타난 '외교부 주도' 현상을 적극 비판했다. (☞미사일사태에서 NSC는 '국가안전을 보장'하고 있나)

그밖에도 서 교수는 2007년 초 북한이 '반보수대연합'을 주장하자 "6.15 공동선언을 다시 읽어보라"며 북한의 행태를 비난했고, "부동산 광풍의 물꼬를 北으로 돌려라", "이제는 '적대적 안보개념' 벗어던져야" 등의 글을 통해서는 한반도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6.15 공동선언의 의미를 새롭게 규명하거나, 남북 통합으로 한반도경제공동체를 재형성해야 하지만 생태적 관점이 결합돼야 한다는 등 2006~07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소논문들은 지금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 외에 서 교수는 국정원 개혁을 위해 의기투합했다가 불법도청 사건 등이 터져 나왔던 2005년 11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수일 전 국정원 제2차장의 영전에 추모사를 바치기도 했다. (☞"고 이수일 선생, '침묵'의 뜻을 되새깁니다")

그는 또한 영화애호가이기도 했는데 "지금 참여정부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가?" 같은 글에서는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 등을 영화광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동시에 영화에 대한 식견을 과시하기도 했다.

당시 서 교수가 프레시안에 썼던 칼럼 중 위에서 소개되지 않은 것들, 그리고 몇 차례의 전문가 대담과 인터뷰를 모아 본다.

<전문가 대담>

1. "분단 현실 망각한 양극화 논의는 공허" - 2006년 2월 20일 백낙청 당시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와의 대담

2. "한나라당, 아베의 실수를 따를 텐가" - 2차 남북정상회담 발표 다음날이었던 2007년 8월 9일 김근식 경남대 교수, 정창현 <민족21> 편집주간과의 대담

<인터뷰>

1. "'NSC 위기' 근원은 직책-권한 불일치" (2005년 5월 23일)
2. "이제부터가 시작…우리 정부 과제 많아" (2005년 9.19공동성명 타결 직후)
3. "YS식 대응은 안 된다" (북한 1차 핵실험 며칠 후인 2006년 10월 12일)
4. "'김만복 국정원'은 정치화할 수밖에 없다" (2006년 11월 2일)

<칼럼>

1. 정치주체의 와해가 대선패배 불렀다 (2007년 12월 26일)
2. '아베의 패배'에서 한국 대선 후보들이 배울 점은? (2007년 8월 1일)
3. 그날 평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2007년 6월 20일)
4. 임기말의 남북관계…정략적 접근을 경계한다 (2006년 12월 20일
5. "남측 정부의 안이한 정세인식이 문제" (2006년 6월 21일)
6. '남북관계 정상화'의 출발점…'김정일 답방'이 관건" (2005년 8월 16일)
7. 현충원에서 한반도의 '과거'와 '미래'를 보다 (2005년 8월 15일)
8. 북, 경의선 연결까지 갈까 (2002년 2월 22일)
9. 남북관계의 국면전환 (2002년 1월 25일)
10. 동북아 신질서는 남북화해로부터 (2001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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