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정부의 재원을 기초로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최대 1조 달러의 부실자산을 처리한다는 민관합동투자프로그램(PPIP:Public Private Investment Program)의 세부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2월10일 윤곽만 발표한 금융안정계획의 후속이다.
▲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로이터=뉴시스 |
이 계획에는 정치적 의미도 크게 부여되고 있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이미 오바마 정권을 '월가의 끄나풀'들이 장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어, 이번 계획의 성패를 오바마 정권이 금융위기를 해결하려는 순수성을 지녔느냐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등 오바마 지원군, 등 돌리나
벌써부터 일부 학자들은 '가이트너 방안'은 과거 여러 차례의 금융위기에서 이미 검증된 '선 국유화-후 민영화'라는 간결한 해법을 외면한 '혈세 퍼주기'라는 혹독한 비판을 하면서, 오바마 정권의 진정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뉴욕타임스>는 '가이트너 방안'이 나오자, 간판 칼럼니스트를 한꺼번에 총동원해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분노를 완전히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대통령직은 물론이고 미국 경제마저도 마비돼 버릴 것"이라며 그의 정치적 역량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대선 때 일찌감치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던 신문이라는 점에서 인터넷정치전문 사이트 <폴리티코>는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십자포화는 매우 이례적으로, 이같은 비판은 취임 두 달을 맞은 오바마 정부를 바라보는 워싱턴과 뉴욕 지도층의 시각을 반영한다"고 전했다.
특히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번 방안에 대해 "절망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 고정칼럼니스트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해 지난 9년간 신랄한 비판을 하면서 민주당과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해온 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오바마 지지층의 이반'을 예고하고 있다.
크루그먼 교수는 'Financial Policy Despair(금융정책에 대한 절망)'라는 <뉴욕타임스> 칼럼(원문보기)을 통해 "이 계획은 부시 행정부 말기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내놓았다가 폐기한 '현찰로 쓰레기 매입하기'의 재탕"이라면서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낀다"고 성토했다.
"오바마의 정치적 자산 사라지고 있다"
나아가 그는 "마치 오바마 대통령은 월가와 지나치게 밀착돼 있다는 세간의 인식을 확인시켜주려는 것 같다"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노선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면, 이미 정치적 자산은 사라졌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크루그먼 교수가 이처럼 혹독한 비판을 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이 계획은 월가의 금융업체들이 근본적으로는 건전하며, 금융인들이 해결책을 알고 있다는 전제 위에 있다. 즉, 은행의 부실자산은 시장에서 지불하려는 가격보다 사실은 훨씬 더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금융업체들은 파산 위기를 겪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폴슨 전 재무장관은 공적자금을 동원해 부실자산을 '공정가격'으로 매입하려 했다. 이 방안은 '공정가격'이란 사실상 '공적자금으로 비싸게 사주기'라는 비판 속에 폐기됐다. 이런 비판을 의식한 가이트너 현 재무장관은 공적자금을 토대로 민간자본과 '시장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부실자산을 매입하겠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이번 계획에 따라 조성되는 민관펀드는 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6대1까지 인정된다. 예를 들어 140억달러의 부실자산을 매입할 경우 이 펀드는 그 7분의 1인 20억달러를 갖고 나머지 120억달러를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으로 조성한 자금로부터 대출받을 수 있다. 또 기본 자금 20억달러는 민관이 1대1로 부담하기 때문에 정부와 민간이 10억달러씩 내면 된다.
하지만 가이트너의 방안은 위의 사례처럼 결국 동원되는 자금의 90%(140억 달러 중 130억 달러)가 정부 쪽에서 나오기 때문에 납세자의 부담만 키우는 것이다. 부실자산이 매입가격보다 상승하면 투자자들이 이득을 보지만, 반대의 경우 손실은 정부가 거의 대부분을 떠안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안도 폴슨 방안과 마찬가지로 부실자산 매입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간접적이며, 위장된 보조금 지원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오바마 행정부가 본질적으로 폴슨 방안과 같은 계획을 3차례나 포장지만 바꾼 채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놓고 있다면서 "정말 수상하다"고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크루그먼 "가이트너 방안은 작동 불능, 실패할 것"
금융업체들이 부실자산을 투자자들이 만족할 만한 가격에 입찰할 지도 의문이다. 서로 이득이 되는 가격을 산정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민간자본이 예상대로 투입될 수 있을지, 또 금융업체들이 부실자산을 거래 가능한 가격에 내놓을지 월가에서조차 반신반의하고 있다.
'가이트너 방안'이 제시한 자금 규모가 부실자산 처리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디스이코노미닷컴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는 "은행들은 현재 2조5000억달러 규모의 부실자산을 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1조달러 부실자산 매입만으로는 은행 시스템을 정상화시킬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는 부실자산구제계획(TARP) 잔여금에서 750억~1000억달러를 출연하기로 했지만, 출연금은 점차 3000억~4000억달러 수준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라며 "결국 의회에 추가 승인을 요청해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크루그먼 교수는 "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시장에서 작동할 수가 없다는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일단 계획을 시행해보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 교수는 "매달 6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면서 "더 중요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계획은 실패할 것이 거의 틀림없으며, 그렇게 될 경우 오바마는 우선적으로 했어야 할 일을 위한 자금을 추가 요청하기 위해 의회를 설득할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