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리의 건물은 전후 고단한 서울생활의 몸부림 같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규모도 작고 별 조화도 없이 들어서있다. 바느질 솜씨좋은 아주머니가 여성들의 혼수용 버선을 만들어 팔면서 모은 돈으로 지은 3평짜리 2층 '빌딩'도 그러했다. 버선이 생활에서 사라지면서 이 빌딩은 '혼수버선' 간판을 내리고 '번역, 호적' 업무를 보는 곳이 되었다.
수십년 전 한 떼의 학생들 틈에 끼어 찾아왔던 낙지집 선술집 같은 업소는 여러 군데다. 그런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 50여년을 지내는 동안 어떤 곳은 청진동의 명소가 되었다. 두 남자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빗속을 서둘러 가더니, 빈대떡집으로 쑥 들어간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음식접시를 나르는 풍경이 유리창 밖으로 보인다.
▲ 열차집에서 만난 얼굴들- 젊은이들의 등장과 그들의 웃음소리는 풋풋해 보였다. ⓒ하지권 |
수년 전 문화재청이 발굴조사를 하고 이곳의 좁은 골목길이 종로통 큰 길의 번거로움을 피해 생겨난 피맛골이라고 했다. 어디나 오래된 도시라면 반드시 이런 골목들이 있다. 파리에서도 교통통제 심문 등의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큰 길을 피해 좁은 골목길로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 아찔한 추억이 남은 곳은 바로 이런 골목길이었다'고 한 사람은 말했다.
40미터나 될까, 건물 뒷벽에 가려져 지저분하고 일년내 햇볕 한 번 안 드는 서울 도심의 이 뒷골목을 십수년전 화가 권옥연 선생이 '맛있는 집이 있다'고 일행들을 안내하려 했을 때는 막상 그 어두컴컴한 골목에 들어가는 일이 끔찍해 소가 뻗대듯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사진가 하지권 씨와 헐리는 청진동 길을 걷다말고 '이 골목도 들어가 보자' 하고 발걸음을 떼었을 때 열차집 문이 스르르 열리며 주인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맞는 것이었다.
뒷좌석 손님과 등이 부딪칠 만큼 좁은 걸상에 자리잡고 보니 점잖은 손님들이 편안한 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담배를 피우는 30대가 있는가 하면 등산길에서 내려온 일행이 방을 다 차지하고 정답게 술들을 권하며 떠들고 한구석에는 마치 연구소에서 나온 것처럼 조용해 뵈는 중년 일행이 있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 가있다가 둥지를 찾아온 분위기 같았다.
젊은이 두사람이 들어와 빈대떡 한 접시를 시키고 재미나게 이야기 하며 젓가락 씨름도 하고 웃곤 했다.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떠나간 젊음이 거기 있었다.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 같고 젊음과 중년과 장년의 서정, 왁자지껄함이 그대로 꽉차있는 공간이었다. 박인환의 시처럼 '세월은 가도 사랑은 남는 것', 벽에 '자연과 인문을 논하다'는 글귀가 있었다. 이 말을 변형시켜 '시정과 인문을 논하다'는 표현을 써본다. 부동산 이야기부터 형이상학적인 내용까지 가끔씩 옆자리에서 들려왔다.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들이 얽혀 열띤 분위기를 내는 가운데 모든 계층이 어울려 있다는 사실은 특별해 보였다.
열차집은 6.25 이후 초토화된 서울거리에 피난민들이 하나 둘 돌아오던 때 역시 피난민이던 안덕인 할아버지 내외가 이곳 어느 집 추녀 아래서 무허가로 빈대떡을 부쳐 팔던 게 첫 시작이었다. 판자때기로 양쪽을 막은 길다란 자리가 기찻간처럼 길다고 열차집이라고 부르며 올해로 57년째 이르렀는데 빈대떡에 막걸리와 소주를 팔던 것도 그대로이고 손님들은 '거의 다 단골' 이라고 지금의 주인 우제은씨는 말한다.
새 손님들은 단골손님이 데려오거나 하면 따라 들어왔다가 단골이 되기도 한다. 학생서부터 할아버지까지 손님층은 다양한데 시간대 별로 달라서 낮에는 은퇴한 노년층이 서울 시내를 돌아본 뒤 옛날에 들렸던 이 집에서 한 잔 하고 간다. 왕년에 내노라 하던 직업인들이었다. 오후 5,6시 넘으면 직장인들이, 밤 9시 넘으면 학생들이 오고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온다. 혼자 와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 늘 같이 오던 사람이 저세상으로 가고 난 뒤 남은 한 사람은 앞자리에 빈잔을 놓고 울면서 술을 따랐다.
▲ 대작 중인 김정훈 사장과 이기진 교수. 막걸리 따르는 법이며 장소에 대한 시적 분석까지 이곳은 철학적인 장소가 되었다. ⓒ하지권 |
얼마전 사업가 김정훈씨가 "청진동 없어지기 전에 거기 일주를 하는 거에요. 우선 열차집에 가서 빈대떡에 막걸리 먹고 그다음엔 참새구이 집에 가서 청주대포 한잔에 참새구이랑 은행 한꼬치 먹구. 그다음엔 낙지볶음집에 가서 소주하구 낙지 먹어요. 한집에서 조금씩만 먹어야 세집 다 가요."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에게 와서는 이곳 피맛골에 있는 열차집의 막걸리 미학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들 두 남성께서 열차집의 저녁 시간을 같이 했다.
"우리 아버지가 지금 여든 넘으셨는데 그때도 이 집에 다녔대요. 난 선배따라 처음 와보고 본격적으로는 10여년 전 유학에서 돌아온 뒤 부터에요. 여긴 부담없는 장소이면서 비밀스러운 장소입니다. 누구와 만나든 막걸리 한 병 놓고 둘만의 분위기에 집중해서 머리를 숙인 채 맞대고 열심히 얘기하고 듣고 그러다 목적지에 다다라 열차에서 일어나듯 자연스럽게 떠나죠."
"여긴 오래된 친구하고만 오게 돼요. 바이어랑은 올 생각이 안나지요. 아내와 딸도 한번은 데리고 왔었는데. 아무래도 여기선 막걸리가 제격이고 안주는 빈대떡이 맞아요. 오래 앉아있지는 않고 옆집도 가서 분위기 바꿔가며 맛보고 순례하는 재미가 있어요."
▲ 열차집에서 만날 때면 수백년된 조선백자잔을 소중하게 싸들고 나와 마시는 이기진교수. ⓒ하지권 |
'병을 흔들지 말고 각도를 이만큼 기울여 맑은 윗물과 가라앉은 부분이 섞이기 시작하는 게 2잔쯤이 나온다'고 한다. 맑은 회백색으로 가라앉은 수백년된 백자에 담긴 희고 뽀얀 술색갈이 생각을 한번 더하게 했다. 플라스틱 잔에 담긴 술에서는 그렇게 염려(艶麗)한 느낌이 나지 않았더랬다. 막걸리도 '격'이 있고 이처럼 오묘하게 다루어지는구나 알게되었다. 두 남성은 대접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마셨다. 입에 닿는 그릇 언저리의 섬세한 느낌이 '관능적' 이라고 했다. "백자를 지금은 이렇게 얇게 만들지 못한대요." 술에 관한 두 남성의 관점은 치밀한 듯 했다.
"플라스틱 잔보다 시원합니다. 여름엔 특히 더 좋겠습니다."
열차집에서 제일 많이 나가는 품목은 단연 빈대떡에 막걸리와 소주라고 했다. 노릇노릇하게 부쳐 입에 넣기 좋게 한가운데를 꾹꾹 금 그어주는 빈대떡은 수십년동안 크기나 맛이 똑같다. 자극적인 맛없이 집에서 만들어먹는 빈대떡처럼 순했다. 부엌이 따로 없이 가게 안에서 오전 중에 녹두를 갈아놓고 전면에 놓인 화덕철판에서 부쳐준다. 곁들여먹는 어리굴젓이 나오는데 한번에 50kg분량을 담근다.
'40년 전 큰길가에 있을 때부터 왔다' 고 김사장이 말하니 주인이 "그때는 냉장고도 선풍기도 없던 때라 하루치 받아논 술과 음식만 팔면 다였어요. 지금은 우리가 특별히 맞춘 냉장고에 술을 넣어두고 온도를 맞추고 음식은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려 맛있게 잡숫도록 하죠."라고 말한다.
"뒷맛 없이 깨끗한 맛을 내는 국산녹두에 북한산을 같이 써요. 조미료같은 것 안 넣고 우리가 짠 돼지기름에 돼지고기 몇점만 얹어요. 굴은 서해안 굴을 쓰다가 배에서 기름이 유출되고 난 뒤에는 몇 년째 통영에서 갖다 쓰지요. 서해안 굴은 아직도 더 있어야 한대요."
"윤이상네 고향에서 굴이 온대요."
▲ 열차집 단골 유쾌한 손님들.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지권 |
"그럼요. 참새집도 주인의 자존심이 걸려있어요. 참새 보구 혹시 메추리 아니냐고 했다간 주인이 열 받아서 '비교해 보쇼!' 하구 나와요."
"여기는 저 냉장고가 막걸리 맛의 비결이에요. 0도 가깝게 맞춘 술을 주거든요. 의자도 테이블도 기차속 같은 기분나죠. 자기 내릴 곳이 되면 떠나고 또 새 손님이 그 자리에 와 앉고. " 젊은 이 교수는 시인 같았다.
두 남성은 술의 고수들로 보통사람은(혹은 여자들은) 잘 모르는 술의 세계에 달통했다.
"통금 있을 때는 한강에 나가 배를 타고 밤새 떠있으면서 작은 보트가 소주랑 오징어랑 싣고 오는 것 사먹으면서 놀기도 했어요. 배 타고 있으니까 많이 마시지는 못하는데 강가운데 가져오는거라고 값도 꽤 비쌌어요. 새벽 4시에 사공이 배를 백사장에 대주면 그때 차타고 집에 가는 거에요."
사진을 찍으니까 옆 테이블에서 "우리두 한 장! 찍구 싶어요" 했다. "우린 낮부터 와서 이만큼 마셨어요. 인제 그만 가야지. 먼저 갑니다." 유쾌한 옆자리 손님은 술 한병을 사진가에게 보내고 나갔다.
▲ 황금색으로 부쳐주는 빈대떡. 부쳐주는 이의 카리스마까지 느껴진다. ⓒ하지권 |
열차집에서 일어나 그 다음은 참새구이집, 그 다음은 낙지볶음집에 가는 코스를 따라다니는데 어디나 잔치집같은 분위기를 내면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강남에는 이런 재미가 나는 골목이 없다고 했다. 언제 헐릴지 모르는 골목길의 몇집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대신 근처 이상한 외국이름을 가진 새 빌딩에 피맛골이란 문패가 걸려있는걸 보았다. "여기가 어떻게 피맛골이람. " 김정훈씨가 어이없어했다.
▲ 오래된 도시 서울에서 보는 지저분한 뒷골목의 전형 피맛골. 하지만 그 안에는 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온갖 계층의 유쾌한 담소자리가 있다. ⓒ하지권 |
지저분한 골목이라고 안 오는 사람도 있겠다는 말에 주인은 "쓰레기는 모아놓으면 시간맞춰 가져가는데 그 사이 또 쌓이는 거라... 저희도 께름직한데 건물도 워낙 낡은데다 손님들이 그것 때문에 시비를 걸진 않아요." 했다.
하지만 그토록 속수무책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동네 업소들끼리 의논해 '지저분한데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었을까. 그렇게 해서 도시의 명물을 다 같이 아끼고 자랑하고 돈도 벌수 있는 그런 노력이 있었다면 무섭다시피 여겨지는 이 골목의 첫인상을 바꿔 놓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교수가 말했다.
"지저분하고 쓰레기가 널부러진 것도 있는 그대로 보는 이런 장소도 서울 시내에 한군데는 있어야 해요. 단지 파리같은 데서는 시에서 나와 이런 오래된 골목길을 치워주기도 하고 소독도 해주면서 보살핀다는 것을 과시하고 다같이 아끼지요.
우리는 왜 기껏 5,60년 세월 걸려서 이런 문화 만들어진 걸 다 뒤집어 부숴버리고 또다시 원점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시작해야 합니까. 고작 전통을 보존한다는게 민속촌이나 한옥마을 같은 가짜전통이나 뒷북치듯 세워놓고.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질 않잖아요. 서울시가 나섰어야죠. 외국엔 백년도 더된 이런 집들이 있어요. 여행객이 10년 후, 20년 후에 가도 그 집이 그냥 있어요.
난 학생들에게 이런 골목도 와보라고 권해요. 지저분해 보이는 전통 속에서도 미래를 어떻게 내다볼 것인가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저런 얘기 속에 목적지가 다된 즈음에서 일행은 골목길을 나섰다. 이 골목은 그렇게 빨리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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