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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엄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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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엄덕문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31> 건축가 엄덕문과 세종문화회관, 광화문 ①

광화문에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사방 얼마큼의 지도가 환히 떠오른다. 16차선쯤 되는 넓은 도로는 언제나 차가 다니지만, 광장의 느낌이 여기 저기 번져있다. 경복궁과 고종즉위 기념비각이 한 시대를 전하고, 관청이 있던 육조거리는 현대사에서 정부청사, 세종문화회관, KT, 교보 같은 건물들로 나란하다. 자주 보든 오랜만에 보든 이곳은 땅 자체로 서울의 영원한 상징이다.

세종회관은 주변의 높은 빌딩들 사이에서도 늠름히 버티고 앉아있다. 고래등 같은 한옥, 혹은 관복을 잘 입고 앉은 사람의 위엄같다. 여기서는 어느 건물보다 많은 구조가 드러나 보인다. 육중한 열주에 두꺼운 추녀와 완자문 벽장식, 몇 개나 되는 조각까지 시야를 가로막는 담 같은 것 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 건물 한가운데 작은 동산에 오르듯 계단을 오르면 회랑앞에 돌마당이 펼쳐진다. 양쪽의 극장과 앞뒤의 거리로 통하는 광장이다. 여기서는 햇볕과 바람이 거침없이 와 닿으며 누가 스쳐가든 묵묵한 계단과 건물과 어울려 있는 것만으로도 자유와 현대의 냄새가 난다. 북쪽과 서쪽에 나무가 들어선 작은 공원이 여유를 준다. 극장에서는 30여년 동안 공연이 있어왔다.

▲ 세종문화회관 전경. 조각 옆에서 노는 어린이부터 멀리 드리운 북악능선까지, 이곳은 모든 것이 서로 만나는 광장의 의미를 가졌다. ⓒ하지권

올해로 개관 31년째를 맞는 세종문화회관은 2004년 이후 여러 군데가 개축되고 지금 광화문 주변은 온통 재건축으로 들썩이고 있다. 건축가 엄덕문이 설계한 세종문화회관은 한국적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근대건축으로 꼽히는 그의 대표작이다. 50대에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는 어느덧 90이 되었다. 2월과 3월에 걸쳐 만난 엄덕문선생은 긴 시간에 걸쳐 당시를 회고했다.

엄덕문 선생은 1919년 서울생이다. 일본 와세다대 부속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 가시마 건설회사의 건축사로 평안도 강선에서 제철회사를 지을 때 해방을 맞았다. 서울에 와서 서울공업고등학교와 한양대학 건축과에서 가르치고 홍익대에 건축과(건축대학의 전신)를 신설했다. 국전에 건축부문을 처음 포함시키고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활약했으며 엄덕문건축사무소를 이끌면서 과천정부청사, 마포아파트, 롯데호텔 등 많은 건축을 했다. 한국건축가협회장을 지냈다. 엄이건축사무소의 고문직함을 지니고 있지만 일선에서는 떠났다. 현재 서울 고덕동 자택에 머물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건축은 서울시가 주관한 1973년 현상설계로 채택되어 대림산업이 시공, 1974 -1978년까지 5년이 걸려 완공됐다.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의 사랑방입니다. 구조는 한옥의 안채와 별채를 세우고 두 건물을 이어주는 회랑과 한가운데 안마당에서 뒤뜰로 연결되는 개념을 현대건축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광화문이라는 위치에 짓는 기념 건물로 현대감각과 우리 정서가 어울리는 배치와 건축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한데 문제가 많았어요. 3,460평밖에 안 되는 좁은 땅에 서울시에서 평통 대의원 들어갈 5천석 강당과 국제회의실, 10개 단체 사무실, 식당 등등 요구사항이 많았습니다."

건축이 시작될 무렵 박정희대통령과 건축가가 만났다. 1년 반이 걸려 설계가 확정된 뒤 나선 대통령이 '기와집으로 하라'니 '설계에 기와집이 없던데 큰일났다' 싶었던 양택식 서울시장이 그를 대면시킨 것.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평양 만수대극장이 기와 씌운 2층 누각에 수천명이 들어간단다. 우리 건물엔 평통 대의원 5,000명이 들어가게 해다오, 국제회의실도 있어야겠다, 지붕엔 기와를 얹어주시오.'

'그건 평양의 특징이고 우리대로 창의할 문화가 있습니다. 건축은 시대의 상징이자 변이입니다. 건축기술이 발달해서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우리 정서가 들어가고 전통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것만은 건축가에게 맡겨주십시오.'

'서까래라도 내달라.'

'서까래도 봐서 조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재래식 서까래는 못합니다.'

'고집 센 사람이군.'

엄덕문의 설득이 힘을 얻었다. 대통령이 건축가와 직접 의견을 나눈 일은 처음이었다. 이 건물터는 1960년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회관으로 출발했다가 시민회관이 되고 이어서 세종문화회관으로 귀착된 것이다.

▲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엄덕문선생은 어느덧 90세가 되었다. 자택에서 건축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하지권

"박대통령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반영시키고자 했지만 내가 가진 개념은 이 건물은 누구 개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문화회관으로서 사명을 다한 건축이 되게 하는 겁니다."

두 개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됐다. 5,000명이 들어갈 건물을 지으란 것이었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운영을 생각해야 했다. 고용된 인원만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 건물을 공연장으로 대비해두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이 섰다.

대극장의 무대공간을 과감하게 객석과 같은 크기로 잡았다. 세계의 공연장이 무대에서 자동차가 지나갈 만큼 넉넉해지는 추세를 봐둔 터였다. 보통은 객석의 4분지1이면 무대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객석과 같은 비율의 무대를 설정한 것이다. 무대 뒤, 천장 위와 양옆에 각각 무대만큼의 예비공간을 포함시켜 무대를 깊숙이 하고 무대에서 슬라이딩과 회전, 위 아래로 이동이 가능하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하공간이 많이 필요했다. 예산은 없고 욕심내서 하자니 욕을 많이 먹고 진행이 어려웠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세종회관 건축담당으로 서울시를 좌지우지했다. 김 총리와는 워커힐 건축으로 알게 된 인연이 있었다. 그에게 "투자해야 된다. 천년 갈 건물이다. 60만원의 평당 비용은 적어도 80만원은 넘어야 된다."고 입장을 설명했다. 총리가 궁리궁리하더니 '오케이' 했다. 김종필은 문화에 일가견도 있었다. 파이프오르간도 넣자고 했다. 세종회관이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장으로 태어난 데는 이런 결단과 설계의 덕이 있다. 5,000의 압력을 받던 좌석수는 4,200석을 하고는 '더 이상 하면 3류가 된다'고 버텼다. 무대 뒤에 배우들 분장실을 두면서 주연급 배우를 위한 독자적인 분장실에 화장실과 목욕실까지 갖추었다. 무대를 손색없이 뒷받침할 획기적인 일이었다.

별관에는 소규모의 극장을 앉히고 회랑에는 국제회의실 등을 두었다. 예총 산하 10개 단체의 사무실과 연습실은 추녀를 두껍게 해서 그 안에 다 집어넣었다. 이들은 채광을 천장에서 받는다. 바깥에서 보면 그냥 지붕같아 보인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옥인동 골짜기와 누상동을 거쳐 세종회관 터로 해서 청계천 상류로 흘러나가는 지반이었다. 상당히 큰 하천을 복개해 쓰고 있던 터였는데 홍수가 나면 이 하천의 물이 넘쳤다. 지하 2m에서 물이 흘렀다. 이를 해결해야했다.

"수압은 무서운 것입니다. 홍수로 지하에서 물이 차오르면 수압이 올라와 건물이 꺾어질 위험이 있어요. 대극장이 꺾어지면 별관까지 건물전체가 위험합니다. 고민을 하다가 세종회관을 배라고 설정하고 무대를 두껍게 해서 닻처럼 물속에 고정시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땅속 지반의 모암(母岩)에 건물지하를 연결시켜 어떤 수압에도 배가 다치지 않게 고정시킨 닻의 기법을 쓴 것입니다."

건물 외벽에는 세계 어디 내놔도 예쁜 완자무늬, 격자무늬 장식을 했다. 대궐건축의 기둥과 문, 창살 무늬, 추녀선을 모티브로 한 건축요소는 세종회관 말고도 도원빌딩, 선문대학, 리틀엔젤스예술회관 등 모든 엄덕문 건축에 들어있다. 정면 벽 두 개의 날아오르는 비천상 부조는 한국 고미술에서 취해온 주제를 그가 디자인하고 김영중이 조각했다. 육중한 건물이 날아오르듯 가벼워진 느낌이 나고 예술의 경지가 스며있는 듯 암시를 준다. 권옥연과 변종하가 무대막 그림을 디자인했다. 2층 중간층 귀빈용 로비엔 십장생벽화가 있다. 엄덕문이 그리고 전뇌진이 조각했는데 질감, 촉감, 색감까지 같이 참여했다. 안전을 위해 가려져있어 일반은 이 조각이 낯설 것이다.

▲ 세종문회관 대극장의 화강암 열주와 완자문 벽면 장식. 비천상 부조 한쌍도 있다. ⓒ하지권

본관와 별관의 연결매개체로 큰 조각물을 세우려하니 서울시가 '돈이 없다. 못하겠다' 고 했다. 그가 "몽둥이라도 세우자" 고집 부렸다. 조각가 김찬식이 천하대장군이 합창하는 형상을 청동으로 조각했다. 지금 세종회관 돌계단 오른쪽에 서있는 푸른색 청동조각이다.

"그때 김찬식이 홍대 작업실 공간이 꽉 차도록 최대한 높게 해서 만들어낸 작품이죠."

로비에 설치한 7m의 청사초롱모양 수정같은 샹들리에 3개 묶음과 소극장 청사초롱도 엄덕문 디자인이다. 이 청사초롱을 본 신라호텔이 그대로 베껴다가 호텔 로비에 만들어 달았다. 중간에 누군가가 '세종회관의 것을 그대로 갖다쓰면 신라호텔 이병철의 체면이 서겠느냐' 해서 몇 년 지나서는 떼었다. 세종회관에서는 리모델링하면서 이 청사초롱 조명이 없어졌다.

건물의 환경을 위한 조영으로는 앞 광장에 느티나무와 연못을 두어 관객이 연못을 넘어 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했다. 차는 아래 지하도로로 지나게 만들고 그 위에 잔디덮인 넓은 광장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지금 시도하는 광화문 광장의 일부가 되는 시도였다.

"광장이란게 건물에 못지않는 아름다움을 조성해주는 공간입니다. 결국 터가 좁으니 건물도 길에 바짝 붙여지을 밖에요. 그걸 돌계단 안마당으로 올라가는 광장을 만들어 해소했습니다. 거기서 뒤쪽으로 연결되는 공간은 반드시 뚫려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은 뒤터가 생겼지만 그때는 거기가 도로였습니다. 건물이 다 된 뒤에 지금 공원자리가 생겨서 음악분수도 있고 낳아졌어요. 처음부터 그 대지가 확보됐더라면 좋았을 것을...."

감리도 나서서 했다. 서울시가 건축적 세부를 알 수 없으니까 시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독 못하고 설계사가 역학 공학적 부문까지 콘트롤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설계면 고만이지 감리는 무슨 감리' 하면서 감리하는 예산도 없었다.

"어느 부분을 다시 손보게 되면 비용도 많이 나가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그래도 그걸 끝까지 자문감리 하느라고 자하문 밖 내 소유 솔밭을 팔아 인건비로 충당했습니다. 설계가 돈 벌어지지 않아요. 그래도 세종회관만큼은 후회 안 합니다."

문화회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온 정력을 기울여 지었지만, 아쉬운 점이 남았다.

"대극장 좌석 수가 많아서 불만이었습니다. 3,000이 적절했어요. 부족한 점이 또 있어요. 터가 너무 좁아서 별관인 소극장은 남쪽이 여백 없이 바로 길에 붙어있어요. 대극장 옆처럼 소극장 옆에도 여유가 있어야 균형이 맞는데 지금도 아쉽습니다. 뒷면도 대칭의 구조로 기둥과 완자문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아직 설계대로 준공이 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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