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공공성과 소통의 문제를 줄곧 제기해온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와 <프레시안>이 '소통과 미디어, 그리고 한국사회'라는 주제로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정부와 국민간 소통의 문제, 언론의 문제, 언론 정책의 문제가 한꺼번에 불거져나오는 2009년, 이창현 교수의 깊이있고 날카로운 칼럼이 독자 여러분들에게 길라잡이가 되길 바랍니다. |
요즘처럼 소통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사회적 소통이 그만큼 제대로 안 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다면 누가 소통을 이렇게 자주 논하겠는가? 소통이 자주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벌어지면서 대통령 스스로 '국민과의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사과하면서 부터다. 부랴부랴 청와대에서는 국민소통비서관이라는 직책을 도입하였으며, 인터넷의 국민여론 등을 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했다. 늦었지만 청와대가 '국민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에 국민들은 안도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만들어진 국민소통비서관은 결국 용산철거민사망사건을 연쇄살인범 사건으로 덮으라는 이메일을 경찰청에 보내는 일을 하다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민과의 소통이 안 되어 청와대에 자리까지 만들어 사람을 앉혔더니, 바로 그 사람이 국민과의 소통은커녕 사실상 언론조작의 지침을 하달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통령도 국민과의 소통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일방적으로 라디오 연설만을 지속하고 있다. 대통령의 TV토론도 일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과의 소통을 화두로 삼았지만, 소통의 기본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소통의 예의범절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일단 국민을 국민으로 인정하라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소통에도 예절, 즉 예의범절(禮儀凡節)이 있다. 예의범절이란 '일상생활에서 갖추어야 할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말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소통을 위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와 절차를 지켜야 한다. 개인적 소통에서도 예의범절이 필요한 것인데 국민과의 소통에서는 그 예의범절이 더욱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소통은 한자 뜻으로 보면 트일 소(疏)와 통할 통(通)이 결합된 단어이다. 막힌 것이 트이고 서로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통이라고 해놓고는 언로가 꽉 막힌 상태에서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소통의 단어 뜻도 모르는 것이다. 예의범절을 외래어로 표현해보면 에티켓(etiquette) 또는 매너(manners)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소통의 에티켓과 매너는 무엇일까?
첫째, 소통의 기본적 예의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認定)이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소통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즉, 쳐다보지도 않고 이야기 하는 것은 소통의 예의가 아닌 것이다. 국민과의 소통을 논하려면 일단 어떠한 국민이든 국민으로 인정해야한다. 특히 사회적 소수자들을 인정해야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오히려 귀를 더 기울여야 한다.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이들을 국민과의 소통의 대상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국민과의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을 소통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홍보의 대상쯤으로만 간주한다면 국민과의 소통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용산철거민을 테러리스트라고 치부하고 그들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뉴타운 등 도시의 재개발과정에서 철거민이 어쩔수 없이 발생하게 된다면 이들을 인정하고 이들과 소통해야한다.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정책과정에서 배려하지 않으면 이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할 수 없게 된다. 누가 뭐래도 소통은 사회통합의 기본 전제이다.
둘째, 소통의 기본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信賴)에서 비롯된다.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자기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신하는 사람과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될 수는 없다. 상대방을 불신하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고 때로는 위장하게 된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 만으로도 인신구속 등의 피해를 입을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인터넷 공간에서 누구라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누군가 감시하고 내용을 통제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소통은 왜곡되는 것이다. 용산철거민들은 생존권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구청과 조합 측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를 갖지 못했다. 구청과 조합측이 지주들의 재산권과 대비해서 철거민의 생존권은 존중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 측에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했다. 정부는 이해당사자인 조합측과는 달리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철거민이 갖고 있었던 정부에 대한 믿음은 전광석화와 같은 공권력의 진압으로 무너져갔다. 철거민에게 있어서 정부는 더 이상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소통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정부의 공권력은 철거민을 소통의 대상이기보다는 진압의 대상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 지난 2월 4일 청와대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려했던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유족들은 경찰의 제지에 막혀 두시간 가까이 농성을 벌여야 했다. ⓒ프레시안 |
셋째, 상대방을 인정하고 신뢰하였다면 다음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경청(傾聽)해야 한다. 경청은 상대방의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서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막힌 것이 트일 수 있으려면 즉, 소통을 하려면 일단은 들어야 한다. 귀가 잘 안 들린다면 보청기를 이용해서라도 들어야 한다. 의사들이 청진기를 대듯이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의 소리까지도 들으려고 노력해야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들리지 않으면 말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들어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듣지 않고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이것은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없다. 일방적인 이야기는 소통의 예의를 갖춘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런 말은 공허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렇기에 용산 철거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재산권을 중시하는 보수신문의 언론보도와 이들을 도심의 테러리스트로 언급하는 국회의원의 질의만을 듣기 보다는 우리의 이웃인 용산 철거민의 목소리에 우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손을 잡고 철거의 현장상황을 파악해야한다.
상대방의 코드에 맞추어 들어보았나
넷째, 소통은 일방향이 아니고, 쌍방향(雙方向)이 되어야 한다. 소통에서 '통하다'는 것은 숨이 통하다는 말처럼 들고나는 것이 자유로운 상태이다. 숨이 들고나야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것처럼 소통도 쌍방향이 되어야 생명력을 갖게 된다. 판소리에서 소리꾼의 소리와 관객의 추임새가 쌍방향의 소통을 이룰 때 제대로 판이 구성되는 것처럼, 정부와 국민도 쌍방향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가 일단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정책을 만들었더라도 그것의 집행과정에서 국민적 반응을 살펴야 한다. 판소리의 내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추임새가 없고 관객들이 시큰둥하다면 뭔가 전달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판소리의 내용과 형식을 조금 바꿔서라도 관객에 호응해야한다. 그래야 판이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섯째, 소통은 상대방의 코드에 맞추어 제대로 디코딩, 즉 해독(解讀)해야 성공한다. 상대방이 쓰는 언어의 문법과 표현양식을 잘 알고 상황적 변수까지를 고려해서 해독을 해야만 한다. 인터넷 세대의 표현양식을 신문세대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의 표현을 한국어의 문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인터넷세대와 신문세대가 소통하려면 서로의 문법을 알아야 한다. 인터넷 댓글을 인쇄된 신문기사와 같이 인식하는 순간 인터넷은 욕설만이 난무한 불순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용산에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의 표현양식을 한번쯤은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이 세운 망루와 시너 통에서 그들의 절박함을 해독할 수 있어야 소통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망루와 시너 통을 범죄의 물증쯤으로만 해독한다면 철거민과 소통할 수 있는 해독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불통의 정부에서 사회통합은 불가능하다
소통의 예의범절은 누구나 지켜야할 소통의 기본원리이다. 예절을 지킴으로서 소통은 훨씬 원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을 외쳐왔던 정부가 이러한 예의범절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통의 시대에 불통의 정부로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많다. 불통의 정부에서 사회통합은 불가능하다. 국민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의 통합이 가능하겠는가? 정부가 지금이라도 소통의 예의범절을 잘 지켜서 국민과의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마디 첨언한다면 소통만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과의 소통은 무엇보다 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단순하게 정책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콘텐츠가 들어있어야 한다. 소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못 얻어 낸다면 그것은 소통의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책의 내용이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면 소통은 반쪽짜리 소통이 되고 말 것이다.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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