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2월 21일 생방송 출연해서 "정부는 첫째도 일자리, 둘째도 일자리, 셋째도 일자리라는 생각에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막상 내놓고 있는 정책은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임금삭감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여력이 있는 공기업과 대기업들이 앞장서서 임금삭감 경쟁을 벌이고 있고 2월 23일에는 아예 노·사·민·정 합의라는 이름 아래 한국노총까지 끌어들여 '임금동결, 반납 또는 절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들어서 이미 1월부터 전년 대비 취업자 수가 10만이 감소하면서 우려하던 고용대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통계청이 작성한 공식 실업자는 85만에 불과하지만 구직 활동을 못 하고 쉬는 사람들 177만명과 아직 취업을 못한 취업 준비생을 포함하면 314만명에 이른다. 여기에 추가적인 일자리가 필요한 단시간 노동자 63만명을 더하면 실질적으로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은 무려 377만명이나 된다.
그러나 정규직 고용대란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지금의 취업자 감소는 지난해부터 꾸준히 줄어왔던 자영업이나 임시, 일용직 노동자들이 대폭 감소한 결과다. 지난해 12월부터 -18.6%로 추락하고 있는 산업생산지수와 62.5%로 떨어지기 시작한 가동률이 고용에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하면 중소기업과 대기업 정규직에까지 고용충격이 확산될 것이다. 통상 고용사정 악화가 경기침체보다 3∼6개월 정도 늦게 나타나는 것을 감안하면, 고용불안은 올해 중·후반기에 갈수록 심각해질 전망이다.
임금삭감은 있는데 고용창출은 안 보이고
특히 현재의 고용불안은 정리해고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웠던 11년 전 외환위기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대기업의 부실 ⇒ 대형은행 부실 ⇒ 대기업 정규직 정리해고 ⇒ 중소기업과 자영업 고용악화로 이어지는 '고용충격 하향전달구조'를 보였다면, 현재는 자영업 폐업 ⇒ 임시, 일용직 정리해고 ⇒ 중소기업 정규직 감원 ⇒ 대기업 정규직 고용불안으로 이어지는 '고용충격 상향전달구조'를 띠고 있다.
당장 중소기업과 대기업 정규직이 해고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과거처럼 퇴직금으로 자영업에 뛰어든다든지 임시, 일용직으로 위기를 피할 수가 없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악화되어가는 고용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 고용불안이 곧바로 노동자와 서민들을 한계상황으로 내몰 가능성이 높다.
다가올 고용빙하기를 앞두고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은 고용안정과 고용보호정책이라기보다는 그동안 고용불안의 주범으로 비판받아왔던 '고용유연화정책 강화'다. 문제는 고용유연화정책이 고용안정대책으로 탈바꿈해서 잇달아 발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이라든지, 최저임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고, 특히 임금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대책이 그렇다. 임금삭감정책은 경제불황을 핑계로 일부 기업들이 고용창출 없이 무분별하게 노동자에게 임금삭감만을 강요할 가능성이 높고, 반면 고용과 임금유지를 위해 애쓰는 선의의 중소기업들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극히 위험한 대책이다.
임금삭감 없이도 고용유지와 확대 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절반 이상이 임금삭감정책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등 임금삭감대책들만 쏟아져나올 뿐, 그 댓가로 일자리가 얼마나 유지되고 신규로 늘었는지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실태는 무분별한 임금삭감대책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지금은 가급적이면 임금과 소득을 유지해서 최대한 구매력을 높여주어야 내수를 살리고 경기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턱없이 미흡한 현행 고용보험제도
고용불안이 본격화되자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이 신청하는 실업급여는 뛰고 있고, 고용유지를 위해 기업들이 신청하는 고용유지 지원금 역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노동부 발표에 의하면 실업급여 신청자가 2008년 1월 9만 4천명에서 1년 뒤인 올해 1월에는 12만 7천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주목할 것은 기업들이 신청하는 고용유지 지원금 건수가 2008년 1월 418건에서 2009년 1월에는 무려 3874건으로 폭증했다는 것이다. 9배가 넘게 늘어난 수치며, 해당 기업에서 지원금을 받을 노동자들도 같은 기간 4천명에서 3만 2천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부가 자기 재원도 아니고 노동자와 고용주가 적립해왔던 고용보험기금을 마치 자신의 자금인 것처럼 생색을 내며 고용안정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그나마 그 혜택을 볼 수 있는 대상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현재 고용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용보험에 가입된 약 940만 노동자다. 물론 처음 실시되었던 1995년 400만명 수준이었던 데 비하면 14년 동안 두배 정도 증가했다. 그러나 그 속도는 완만하기 그지없다. 현재 통계청에서 발표한 노동자 수가 약 1600만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 노동자의 6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취업자 인구는 실업자까지 포함하면 약 2400만명에 이른다. 여기에 취업준비생과 그냥 쉬는 인구까지 합치면 2600만명을 넘는다고 볼 수 있다. 고용보험 이외에 고용관련 안전장치가 전혀 없는 우리나라 실정에서 사실상 고용보험의 혜택을 입어야 할 인구가 줄잡아 2600만명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고용보험제도는 고용보험 보호를 받아야 할 잠재적인 대상자의 겨우 1/3을 포괄하고 있을 뿐이다. 반쪽짜리 고용보험도 안되는 셈이다. 이 정도 수준의 고용안정 장치를 가지고서 앞으로 다가올 외환위기 이상의 고용대란을 감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1/3이 아니라 80퍼센트 이상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현재의 고용보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용보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에 준하는 수준으로까지 고용보험 적용대상을 확대시켜야 한다. 우선 현재 임의가입 방식으로 되어 있는 일용, 건설노동자 등은 물론이고, 이미 국민적 공감대가 확대되고 있는 자영업인들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적용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나아가서 심각성을 더해가는 청년 실업자들도 끌어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 과제는 기금 재원마련이다. 특히 자영업자나 청년 취업준비생에게 고용보험 납부를 요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고용문제가 더이상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책임 영역임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우종원 일본 사이따마대 경제학 교수도 최근 한 일간지 기고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회보험을 적용받는다는 원칙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적자금, 고용안정에 가장 먼저 투자하라
특히 지금과 같은 심각한 경기침체 상황에서는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적극적으로 고용보험기금을 확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금융기관들을 위한 채권안정펀드나 은행자금확충펀드에는 10조, 20조의 자금을 투입하면서 고용안정을 위한 기금에는 한푼도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미 기획재정부도 2월 23일, 약 15조~20조의 추경편성을 예고하면서 10조원 이상을 투입하여 취약계층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저소득층 소비쿠폰 지급에 소요될 2~3조원을 포함해서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실업자, 휴·폐업 자영업자, 실업급여 지급 기간이 끝난 실업자 등을 구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파편적인 일회성 대책 남발로는 장기화될 고용대란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 없다. '전국민 고용보험제'라는 종합적 사회보장씨스템을 구축하여 제도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비용 측면에서나 효율성 측면에서 훨씬 효과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생방송에서 일자리를 그토록 강조했던 대통령의 의지가 진심을 담은 것이라면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