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은 단순한 소유형태, 운영모델이 아니다. 저널리즘의 높은 수행성을 통해 공적 정치영역을 실현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의 배치를 통해 민주적 대중교통 가능성을 높이는 서비스체제를 공영방송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기피하는 '공영방송'은 실제가 아닌 환영, 수사에 불과하다. 지향해야 할 가치가 아닌, 지양되어야 할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2009년의 KBS는 공영방송이 아니다. 진실의 저널리즘, 대중의 민주주의와 상관없는 제도로서의 공영방송일 뿐이다. 공적영역의 불능화를 초래하고 일방선전의 공포를 강화하며 대중의 자율적 교통정치를 방해하는 점에서, '국민의 방송'이라기 보다는 권력의 방송에 해당한다. '국가기간방송'인지는 모르겠지만, 국가기관방송임은 확실하다. 추락한 신뢰도와 영향력, 한참 뒤쳐진 <9시 뉴스> 시청률이 이를 입증한다.
2009년의 KBS는 공영방송이 아니다
왜 이리 간단히 정리해버리냐고 불만을 터트릴지 모르겠다. 지금의 KBS 문제가 그렇게 쉽게 정리해버릴 사안인지 반문할지 사람도 있을 것이다. KBS 내부 사람들이 특히 그럴 것이다. 시시콜콜 근거를 대야 하는가? 구체적인 자료로 내 주장을 입증해야 하나? 거꾸로, 그러하지 않다는 증거를 대보시지. 만약 그런 게 충분히 제출된다면, 약속컨대 생각을 확바꿔 공영방송 KBS 찬가를 부를 것이니. KBS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공영방송이라 역설할 것이고, 그런 KBS를 지켜내기 위해 더욱 더 분투할 것이다. 달랑 다섯개 지상파 채널만 나오는 고물 TV를 돌려가며 비교 모니터링하는 시청자로서, 명색이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스스로 저널리스트라 자칭하는 학자로서, 그리고 현장에서 나름의 미디어문화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현재의 KBS는 '진정한' 공영방송이 아니다.
▲ 서울 여의도 KBS 사옥. ⓒ프레시안 |
KBS 미디어비평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방송되지 않았지만) 용산의 화염(flame)이 연쇄살인범의 프레임(frame)으로 대체되는 기막힌 양상을 지적했다. 복지국가를 치안국가가 완전 대체함으로써 빚어진 '사회안보(social security)'의 구조적 붕괴와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적 인명살상의 이슈였다. 그런 사회적 문제를 얼굴 드러낸 사이코패스에 의한 개인안전(personal safety)'의 위협, 그 해소를 위한 경찰 CCTV '공권력' 강화라는 사법적 문제로 대체했다고 분석했다. 정확히 KBS가 그랬다고 비판했다. 그렇게 의제를 교묘히 바꿔치기하는 KBS, 용산관련 뉴스보다는 꽂미남 연예인 기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코자 하는 <9시뉴스>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며칠 뒤 청와대 이메일 홍보지침이 폭로되었을 때, 까무라칠뻔 했다. 정권보다는 차라리 KBS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역겨움을 느꼈다.
용산사태는 신자유주의시대 대중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졌는지를 드러낸 사건이자, 신권위주의 국가권력의 테러가 얼마나 공포스러울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준 사건이며, KBS가 어떻게 공영방송의 위임된 위치에서 이탈해 기관방송으로 전락했는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 사건이다. 최상재 전국언론노조위원장은 최근의 한 토론회에서 KBS의 후진 용산보도가 제작 거부 행동에 들어간 의식있는 기자, 피디들을 대신해 투입된 사람들의 탓이라고 분석했다. 부분적으로 맞을 성 싶다. 그러나 <9시뉴스>와 여타 보도 프로그램들, 그리고 이전에 꽤 성실한 수행력을 보였던 PD저널리즘 프로그램들이 그후 어떤 진실교전, 권력적대의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나? 한 치 반성이나 변화의 모습도 없어 보인다.
KBS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규제할 것인가?
바로 이런 위기의 KBS가 한국사회를 더욱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름만 '공영방송'인 KBS, 무늬만 '국민의 방송'인 KBS, 허우대만 그럴듯한 '국가기간방송' KBS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 저널리즘 본령을 포기하고, 진실억압과 권력선전의 채널을 자임하며, 여론을 회피하고 그럼으로써 교통대중의 민주=정치를 위반하는 KBS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규제할 것인가? KBS 통제의 (재)민주화, KBS 규제의 (재)사회화 문제다. 분투 중인 KBS 내부의 수백명 기자/피디들의 '사원행동'에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긴급한 공통사안이다. KBS의 반정치, 반민주, 반사회적 권력기관방송으로의 타락 현실을 정확하게 정리한 상태에서, 어떻게 정치적=민주적=사회적 공적영역으로 재구축할 것인지, 그 전략과 방안을 마련하는 데 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서강대 원용진 교수의 제안처럼 KBS의 모든 인터뷰, 출연 요청을 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잠깐 고민했다. 그렇지만 그런 냉소적 절연, 소극적 거부의 태도보다는 훨씬 적극적인 관여, 여전히 능동적인 개입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이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비평의 무기, 비판의 역능을 KBS 문제에 더욱 집중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비평적인 참여로써 KBS를 불편케 하고, 본인이 속한 단체와 연구소를 통해 뉴스 등 프로그램 편성 문제를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해 볼 계획이다. 아울러 지금의 상당 수준 전문적이고 실행력 높은 운동망을 통해 KBS의 구조적 위기 문제를 계속해서 의제화, 여론화, 쟁점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역사적 체험과 해외의 사례, 이론적 원칙에 기초해, KBS의 재민주화/재공영화의 모형을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많은 작업들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지금의 KBS로 안 된다는 다수의 여론이 존재한다. 교통대중들은 이미 판단을 끝낸 것 같다. 변화를 요구한다. 이렇듯 외부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데도, KBS는 한가롭게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미디어/언론악법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논리나 설파하면서 밍그적거린다. '공영방송법'도 정권이 KBS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없다고 희희낙낙 주산질에 열중한다. 옴부즈만 프로그램에서조차 자기검열의 횡포를 부리고, 홍보 프로그램 편성을 위해 정권과 직접논의하는 KBS. 그렇게 무능하고 무력하게 머물면 2TV를 유지하고, 고대하던 수신료를 인상시킬 수 있으며,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인가? 사측도 그렇지만, 노조 또한 마찬가지인가? 그런 꿩먹고 알먹기, 일석삼조의 유치한 잔머리가 급한 권력은 몰라도 예민한 대중들에게 과연 통할 수 있을까?
KBS를 공영방송으로 원위치시키는 것과 치안스테이트를 정치스테이트로 변화시키는 것이 무관할 수 없다. KBS를 '국민의 방송'으로 원상복구시키는 작업과 국가테러의 공포를 주민대화의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일이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KBS 문제는 동시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다. KBS는 어찌 자신이 지닌 공익/공공적 책무를 져버리고 국가/권력에 빌붙음으로써 위탁자 대중, 위임자 사회를 배신하는가? 그래서 결국 역사의 냉정한 재판장으로 다시 끌려 나올 운명을 자초하는가? 판단하는 대중, 행동하는 대중들을 무서워할 것이다. 이들이 수신료 인상을 결정할 주체이시기 때문에. 국가권력이나 자본권력, 선전권력 등 그 어떤 권력보다도 두려운,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지성대중을 못보는 우물안 개구리가 사회를 책임질 수 없다.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다. 이제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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