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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다

[윤재석의 '갑론을박'] 정부의 인권위 축소 기도

12일자 한겨레신문 20면 '길을 찾아서-한승헌-산민의 사랑방증언'을 찬찬히 읽으면서 아련한 추억에 잠기기에 앞서 1970년대 초의 암울하고 참담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 시절 절대 빈곤으로부터의 탈피를 명분으로 박정희 정권이 추동(推動)했던 개발 드라이브 시책에 매몰됐던 몇 가지 원칙들이 되살아나서였다.

40년 전 악몽 떠올라

헌법과 집권당의 명칭 속에까지 또렷이 존재했던 '민주'는 실제론 박제화된 채 다락 속에 처박혔고, '법치'라는 용어는 가두질서 확립이라는 허울로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무엇보다 인류 보편 가치인 '인권'이 도처에서 갖은 작태로 유린되고 내팽개쳐졌다.

근 40개 성상(星霜) 저편의 음울한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연유는 지금 이 순간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 법치, 인권의 실종 사태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민주사회에서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인권에 대한 우리의 인식, 아니 통치권의 인식이 이토록 천박했는가에 대한 개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天賦 권리 짓밟는 政府

지난 11일 행정안전부가 국가인권위원회 인력을 30% 구조조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축소 방침을 밝혔다. 그것도 당초 절반 축소에서 대폭 양보한 수준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방침은 대략 3가지였다. △5국 22과 체제를 3국 10과로 축소하고 △부산, 광주, 대구 등 3개 지역 사무소를 폐쇄하며 △정원 208명을 146명으로 감축하는 것 등.

우선 계수적 측면에서 당위성이 취약하다. 얼마나 방만한 구조라고 3분의 1 가까운 감원을 하겠다는 건지. 기능에서 변동이 거의 없는 법무부와 국방부, 노동부 등 다른 부처의 인력도 많아야 2% 정도를 줄이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해 보자.

이보다 더 중요한 사항. 행안부는 독립기관인 인권위의 위상을 격하하려는 데 혼신의 힘을 쓰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가 구상 중인 구조조정안을 인권위가 거부할 경우 대통령령인 국가인권위 직제령을 개정해 강제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정당성 애매한 구조조정

과연 인권위의 축소 시도는 정당한 것인가?

인권위의 업무는 지금도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형편이다. 진정, 상담, 민원의 건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인력 증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작년 한해 동안 530여건의 진정서를 인권위에 제출했지만 처리율은 48%에 불과했다고 한다. 구조조정보다 외려 전향적 조직 확대를 고려해야 할 판이다.

인권위에 폭주하고 있는 업무량만 봐도 그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다. 출범 이듬해인 2002년 이후 진정 건수가 2배, 상담 건수는 약 4배, 민원 건수는 10배가 늘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정부에 대해 수다한 인력 증원을 요청했고, 정부도 긍정적으로 이를 고려해 왔다(2007년 10월 31일 당시 행정자치부는 인권위 안에 장애차별시정1팀의 신설과 인력 20명 증원을 승인한 바 있다).

그러나 작년 1월16일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인권위를 대통령직속기구로 전환하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하는 등 인권위 장악 작업에 들어간다. 당연히 장애차별시정1팀 신설과 인력 증원도 자체 인력 전환 배치로 수정돼 유야무야 되어버린다.

사실 인권위 조직 구성은 행정안전부의 정부조직관리지침에도 어긋난다. 지침에 따르면 1개 과 구성인원이 최소 10명이 돼야 함에도 인권위는 1개 과 직원이 평균 7.8명에 불과하고 심지어 5명으로 구성된 '미니 과'도 5개나 된다고 한다.

인권 보호 거점을 폐쇄해?

구조조정과 관련해서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의 극치는 바로 지역 사무소 폐쇄 방침이다. 인권위 업무 수요 중 상당 부분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소외 빈곤계층, 오지 거주 고령층 등은 상당수가 지방 거주자들이다. 이 같은 추세는 앞으로 더욱 뚜렷해질 전망이다. 그만큼 업무수요가 새로 발생하리라는 것이 자명한 상황이다.

인권위가 최근 4년간 3개 지역사무소에서 면전 진정과 상담 민원의 건수가 대폭 증가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참고로 2007년 7월 2일~2008년 11월 30일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 상담, 안내 민원 총 6만 9,535건 중 3개 지역사무소가 22.6%인 1만 5,709건을 처리했다.

더욱이 접근성이 취약한 구금·보호시설로부터의 지역사무소 진정접수율이 55.1%를 차지하고 있고, 면전 상담의 경우 59.8%에 이르고 있을 정도로 인권 취약 계층에 대한 역할이 지대하다.

A급 인권위의 긍지 스스로 격하

일반 정부부처가 이른바 파킨슨의 법칙에 따라 무한 확장 본능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에 견준다면, 정부 안의 마이너리티인 인권위의 인력 증원 노력은 어느 면 눈물겨운 생존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대한민국 인권위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A등급을 받은 국가인권기구다. 게다가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OC) 부의장국을 맡고 있다. 국제사회가 알면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할 사안이다.

부상하는 음모론

믿고 싶지 않지만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다. DJ정권 시절에 출범해 인권 관련 제반 사항에 개혁적인 스탠스를 밟아온 인권의의 행보에 이명박 정부가 인수위 시절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겨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추정은 상당한 논거 위에 나온 것이다. 실제로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고 부단히 시도하고 있고, 정치 편향이 강한 인사를 인권위원에 임명하기도 했다.

특히 촛불 시위 등의 상황에서 인권위가 보여준 '반정부'(그들이 보기엔) 성향도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권위 개편안은 인권위를 무력화하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려는 불순한 기도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정황이 뚜렷하다.

정부에 한번 묻고 싶다. 가뜩이나 용산 참사 처리에서 보여 준 '반인권적 행태'로 국제사회까지 우리에게 실망스런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인권위까지 쥐락펴락해서 '반인권 정권'이라는 오명을 써야 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21세기 대명천지다.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놓고 교과서적인 논박을 주고받는 불상사가 없기 바란다. 우리나라에 인권위가 설립되게 된 연혁에 관해 살펴보는 것으로 이번 담론을 마치고자 한다.

<인권위 설립연혁>

1993년 12월 유엔총회에서 파리원칙이 채택된다. 이 원칙은 국가인권기구설립에 관한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기본준칙으로 '국가 인권기구는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그 구성과 권한의 범위를 헌법 또는 법률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부여받아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앞서 1993년 6월 비엔나세계인권회의 참여를 계기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가 정부에 국가인권기구 설치를 촉구했다, 인권에 별로 관심이 없던 YS정권을 지나고, 1997년 11 DJ가 대선공약으로 '인권법 제정 및 국민인권위원회 설립'을 천명했다. DJ정권 출범 후 '국민인권위원회설립준비단'이 발족됐고,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와 권한 문제 등으로 법무부와 인권단체 간 갈등을 거쳐, 2001년 5월24일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제정 공포된다. 그해 11월25일 파리원칙에 입각해 독립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한다.

필자 이메일: blest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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