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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만들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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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만들어졌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67>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⑤ - (1)

전근대 시기 민족의 중요성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중세시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대체로 부인한다. 그것을 18세기 말 이후 근대의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의미를 매우 과소평가한다.

따라서 근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긴요하다. 만약 단 몇 개의 민족이나 민족주의만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대주의적 해석의 기초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근대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존재는 비유럽지역의 민족과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민족의 존재를 서양만이 아니라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유럽지역의 민족주의도 서양으로부터의 수입 이데올로기라는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할 가능성을 갖는다. 즉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서양에서 받아들였으므로 그 민족들은 인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감정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1960, 70년대만 해도 민족주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생각되던 한스 콘에게서 비롯했다. 그가 1944년에 낸 <민족주의의 이념>에서 중세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보편주의 때문에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세인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생활했으므로 기껏해야 지역 공동체의 감각만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도 중세 말에 민족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후대에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첫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다. 대부분의 근대주의자들은 그의 이런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중세 시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중세에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역사학 훈련을 받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접근하기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수고스러운 작업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독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옳은 태도는 아니다.

중세사가들은 대체로 중세시대에도 민족이나 민족감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요한 호이징하나 마르크 블로크 같은 20세기 전반 중세사의 대가들뿐 아니라 현재의 많은 중세사가들도 그렇다.

근대주의자들 가운데 앤소니 스미스가 전근대 민족의 존재에 대해 비교적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은 그가 역사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겔너의 수제자라고 할 스미스의 이런 접근은 근대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예외적인 현상에 속한다.

중세시대 서유럽의 민족과 민족주의

서유럽에서 민족의 기원은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8세기에 잉글랜드인(gens Anglorum)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5세기 이후 영국섬으로 이주해 온 앵글, 색슨, 쥬트 등 여러 게르만 종족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공동의 관습과 법, 생활양식을 발전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9세기의 앨프렛대왕 때에는 왕을 '잉글릿쉬(잉글랜드인)의 왕'으로 불렀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잉글릿쉬로, 그들이 사는 땅을 잉글랜드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정치적 통일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나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066년의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수립했다. 그것은 정복자 윌리엄과 그 계승자들이 과거의 앵글로-색슨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토착 엘리트들을 그 통치체제 속에 잘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적이고 응집력이 있으며 효율적인 국가체제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권적 국가가 민족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보통법, 중세의회인 파러먼트, 그리고 영어의 사용(1363년에 파러먼트의 개회연설에서 영어가 공식 언어로 처음 사용되었다)도 역시 중요했다. 민족적 정체성은 14세기에 중반에 시작되어 한 세기나 이어진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으로 더 강화되었다.
▲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에 민족감정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 참석한 잉글랜드 대표단은 "민족이 다른 사람들과 혈연이나 관습, 언어에서 구분되는 사람들로 이해되든 말든, 또 민족이 프랑스 민족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영토로 이해되든 말든 잉글랜드 민족은 진정한 민족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 개념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혈통, 관습, 언어, 영토 같은 요소가 다 망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민족은 아직 잉글랜드인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략 전체 인구의 5% 정도인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만이 민족적 정체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 14세기 말과 15세기에 나타나는 많은 애국적인 글들에서 민족으로서의 잉글랜드인은 국왕과, 또 조국(patria)은 왕국(regnum)과 연결되어 논의되었다. 그 점에서 당시의 민족과 민족주의의 구심점은 왕과 왕국이었고 그 민족주의는 아직 대중적 지반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유럽대륙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분해가 중세왕국이 등장하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카롤링왕조의 프랑크왕국이 843년의 베르덩 조약으로 동, 서, 중프랑크 왕국으로 나뉘며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중세왕국의 기초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지역에서는 987년에 카페왕조가 카롤링왕가를 대체하였으나 초기에는 왕권이 매우 미약하여 프랑스인 전체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대영주들이 계속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또 브레타뉴, 노르망디, 가스코뉴, 플랑드르 같이 종족적으로,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지역들도 남아 있었다.

13세기 초의 필립2세 시기부터 왕권이 강화되고 영주들의 영지를 빼앗으며 왕령지도 점차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왕령지들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이 이루어졌다. 왕령지는 14세기에 프랑스왕국이 다스리는 백성이 약 2천만 명에, 그 면적은 20만 제곱킬로 이상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13세기부터 프랑스왕국 또는 Francia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왕과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프랑스 민족이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13세기 중반에 프랑스 법학자들이 유럽의 보편권력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황제의 권위를 부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언어, 문화, 영토에 따라 국가가 나누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1324년에, 이탈리아 출신인 마르실리우스가 쓴 <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라는 책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각 민족들의 분화과정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은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통해 더 강해졌다. 또 이탈리아인들과 14세기에 벌인 문화논쟁도 그에 기여했다. 페트라르카가 로마를 기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주장한 데 대해 프랑스인들은 문화의 중심지가 이미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졌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15세기에는 프랑스내의 오키탄어나 브레타뉴어, 바스크어, 플랑드르어 등 다른 언어에 대한 불어의 지위 상승과 결합하며 민족문화라는 생각도 등장했다.

15세기 후반의 Robert Gaguin이라는 사람의 글을 보면 당시의 민족적 정체성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France)를 조국(Patria)이라고 부르며 조국에 대한 사랑, 프랑스의 영광과 명예가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 프랑스의 영토, 역사, 민족성과 관련해 열렬한 민족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1500년이면 프랑스지역에도 잉글랜드보다는 못해도 민족적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것은 아직은 좁은 엘리트 집단에 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만을 다룬 것은 두 민족의 규모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 때문이다. 그러나 해스팅스(A.Hastings)같은 학자는 서유럽 대부분의 주된 민족들이 15세기까지는 성립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들과 근대의 민족들과의 관계는 너무 밀접해서 그 상관관계는 결코 우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의 출현에 더 중요한 시기는 18세기까지의 근대 초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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