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애매한 발언, 언론의 적극적인 해석
이명박 대통령은 5일 민주평통 상임·운영위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남북기본합의서든 6.15공동선언이나 10.4 정상선언이든 남북이 직접 만나 대화해야 한다"면서 "대화를 하면 북한도 우리의 진정성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은 "북한 당국에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 것을 거듭 제안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이날 민주평통 운영·상임위원회 합동회의에서 "남북대화를 중단시킨 것은 우리가 아니"라며 책임을 북측에 돌렸다. 그는 이어 "(북한이)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북한이 이행을 요구하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도 전면 배치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수준에서든지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평통 운영·상임위원들은 '상생·공영의 새 남북관계 정립을 위한 결의문'을 채택해 6.15선언 및 10.4선언 이행 문제 협의를 위한 우리 정부의 대화 제의에 즉각 호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 이명박 대통령과 김하중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
DJ '베를린 선언'과 MB '연락사무소 제안'의 차이
이런 식의 '대화 제의'는 과거에도 여럿 있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 국회 연설에서 과거 남북간 합의들에 대해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며 "남북 당국의 전면적인 대화가 재개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김하중 장관이 지난달 27일 개성공단 상품전시회 축사에서 "당국자들이 만나 이번 조치(남북 출입 제한·차단)에 관해 협의할 것을 제의한다"고 말한 게 있다. 통일부 대변인은 이를 "남북 당국간 협의 제의"라고 규정했고, 진짜 대화 제의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렇게 해석한 것일 뿐"이라고 알쏭달쏭하게 답했다.
그러나 이는 대화의 용의를 밝히는 것일 뿐, 공식적인 제의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대화를 하려면 언제 어디서 무슨 내용을 논의하자고 공식 채널로 제안해야 한다"며 "축사나 격려사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대화 제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들어 공식적인 대화는 군사회담 2회밖에 없었는데 그건 모두 북한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이 남북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의 해법으로 2000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방식을 언급한다. 김 대통령은 그 선언에서 당국간 직접 대화와 특사 교환을 제안한 뒤 귀국, 실제로 특사 접촉을 성사시켰고 그해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제의'라고 부르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이 대통령의 남북 연락사무소 설치 제안이 대표적인 예다. 말을 꺼냈으면 귀국해서 관련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구체적인 대북 제안은 전무했다. 이후 있었던 각종 '제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칼은 내려놔야지…"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대북 제의의 진정성 문제를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가 유엔 대북 인권결의안에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한다거나 대북 삐라 살포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등 대화와는 상충되는 행동을 하면서 한 편으로 대화를 하자는 건 공허하다는 것이다. 그는 "칼을 들고 대화할 수 없다. 최소한 칼을 내려 놔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대화를 하려면 여러 현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정리되고 큰 방향과 답을 가지고 제안이 들어가야 한다"라며 "그러나 지금은 실체가 불분명하고, 구체성도 없고, 진짜로 하겠다는 의지도 없다"고 지적했다.
수십 차례의 남북대화를 이끌었던 전직 고위 당국자는 "대통령의 말은 남북관계가 더 이상 경색으로 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지만, 대화 중단의 책임을 북측에 넘긴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북한 때문에 남북대화가 중단됐다고 하면 얼마나 동의가 가능하고 실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라며 "남북관계는 남측이 북한의 상황을 감안해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식으로 우리가 주도해야 하는 거지 얘기 한 번 하자고 말로만 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삐라를 확실히 막지 못하고 대화하자고 해 봐야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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