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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를 보는 관점들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65>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③

민족주의 이론의 논쟁점

오늘날 민족주의 이론에서 가장 본질적인 논쟁점은 민족과 민족주의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최근에 등장한 근대주의적 해석이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적인 현상으로 보면 종족성과의 관련은 별 의미가 없어지고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도 크게 이야기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근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민족은 인위적인 산물, 사회공학의 산물이라고 해도 별 문제가 없고 이제 지구화에 따라 용도 폐기되고 있는 중이므로 금방 사라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근대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이 자기네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매우 훌륭한 도구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만약 전근대에도 민족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또 전근대적인 형태의 정체성이나 민족의식이 근대에 와서 민족주의나 근대적 민족의식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이런 주장을 계속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민족 정체성이나 전근대적 민족의 존재 여부와 함께, 전근대적인 요소들이 존재했다면 그것이 근대의 민족이나 민족주의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가 중요한 쟁점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영속주의, 원초주의, 근대주의가 그것이다. 이것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영속주의적 해석

우리는 보통 민족이 기억할 수 없는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게는 수천 년, 또 짧아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최근까지도 민족에 대해 소박하게 갖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가 단군을 민족의 조상으로 생각하며 민족이 그때부터 존재해 왔고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관점이 영속주의(perennialism)이다.

▲ 우리는 우리 민족을 단군의 자손으로, 또 그 역사가 5천년이나 되었다고 믿는다. 이렇게 민족의 오랜 역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영속주의적, 또는 원초주의적 태도이다.

영속주의는 오늘날에는 서양에서 '근대주의적' 해석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민족주의 연구에서 주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도 민족의 긴 역사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각 중요 민족의 기원을 중세시대에 기원을 둔 각 지역의 종족들과 연결시켜 생각했다.

영속주의는 지속적 영속주의와 재발적 영속주의의 둘로 나뉜다. 앞의 것은 민족이 그 기원을 고대, 또는 중세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되 지속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단절이나 불연속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지속성이 보다 강조된다.

그러나 재발적 영속주의는 반드시 지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족이 역사상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항상 발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다른 시기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지는 몰라도 그 공동체는 언제나 같은 형태의 집단적인 문화적 정체성의 발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영속주의는 대체로 역사가들이 좋아하는 해석이다. 역사적 현상의 연속성을 믿기 때문이다.

원초주의적 해석

원초주의(primordialism)는 민족을 원초적인 사회적 결속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은 가족이나 친족 같은 자연적인 조직으로서 그것에 대한 애착은 우리의 체질 속에 항상 존재하며 자연의 질서와 같은 원초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친족을 친족이 아닌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유전인자를 남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유전적이며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원초주의자들에게는 개인이 민족에 대해 갖는 정체성의 감각은 이 공동체 안에 속해 있는 그의 위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연히 종족공동체는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덕적 의무를 갖는 윤리적인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종족의식이야 말로 개인적 정체성의 중심적인 부분이며, 유일한 진짜 민족주의는 공동의 조상과 생김새, 언어, 종교를 가진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애착인 종족적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류학자들이나 사회동물학자들이다. 개미나 벌이 하나의 군집을 형성하고 사회적으로 살듯이 인간도 그런 원초적인 사회적 본능을 갖고 있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영속주의와 원초주의는 민족의 오랜 기원을 주장하는 점에서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래서 자주 혼동되고 또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영속주의와 원초주의는 분명히 구별된다.

영속주의자가 원초주의적 개념을 가질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영속주의자들은 민족을 자연적, 유기적, 원초적이라고 보는 비역사적인 설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원초주의자는 영속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근대주의적 해석

근대주의적 해석은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보는 견해이다. 대체로 그것을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로, 즉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 근대국가의 형성이나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200여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를 갖는 셈이다.

이런 견해는 1960년대에 영국의 사회학자인 어네스트 겔너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짧은 기간에 많은 추종자들을 얻으며 지금은 민족주의 연구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겔너가 당시까지 이데올로기로만 취급되던 민족주의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민족주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1983년에 쓴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책은 이 해석에서 고전 역할을 하고 있으며 80년대 이후에 많은 민족주의 연구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상상의 공동체(1986)>라는 책을 통해 그 말을 유행시킨 베네딕트 앤더슨이나,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는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0)>를 쓴 에릭 홉스봄도 모두 근대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근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사회와 관련시켜 논의하고 전근대적 요소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전근대에도 근대의 민족과 비슷한 원(原)민족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은 근대의 민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믿는다.
또 보통 생각하듯이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민족은 근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며 그 기능을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많은 경우 민족은 19세기의 민주화 시대에 지배계급이 대중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민족공동체를 내세우며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으로 만든 것이므로 억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윤리적으로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이 민족적 정체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족이 인위적 구성물이므로 그 정체성도 강인한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며 쉽게 생기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적 정체성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러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서 클럽, 학급, 갱단 등의 정체성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지구화 시대에 들어와서 초국적 기업이나 국제적 기구가 점차 강화되고 있고 유럽연합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경계도 약화되고 있으므로 민족은 당분간은 남아있다 해도 그 전성기는 이미 지났으며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고 전망한다.

이렇게 근대주의적 해석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으며 대체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 근대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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