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만화가 최규석씨에게, '21세기에, 한국에서, 만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 해달라고 청했다. 그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질문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나?
"굉장히 어려운 주제군요,"
질문이 어렵다는 게 아닌 것 같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잘 따라 잡을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 섞여 있다. 만화계에 생소한 상대가 허를 찔리는 순간이다.
"만화 판이 굉장히 '마이너'한데라서 설명할게 많아요. 뭘 한마디 하려해도 덤으로 말해야할게 많아서요. 구체적인 방식이 다 다르거든요. 돈을 버는 방식부터 달라요. 만화그림의 액수가 그룹별, 매체별로 다 다르거든요. 동일한 시장이 있는 게 아니에요. 웹만화, 만화잡지 신문, 시사 잡지 등등 제각기거든요."
그는 그중에 신문이 액수가 가장 높은 편이라고 덧붙인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최근 10여 년간 만화시장은 그전에 한창일 때와 비교할 때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시장이 위축 된 데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90년대 외환위기 당시 대여점 허가를 너무 많이 내준 것이 요인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대여점은 대본소와 다르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종일 틀어박혀 만화를 볼 수 있는 곳이 대본소, 즉, 만화방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아빠가 비디오를 빌릴 때 아이가 만화책을 빌려볼 수 있는 곳이 대여점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대여점이 싹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다들 망해서 나간거지요. 골목골목 있던 그 많은 대여점들이 없어졌으니 만화책을 사주는 데가 없어졌지요. 당연히 만화가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졌고요. 만화출판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좀 든든하게 지원해주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최규석씨는 우리나라 만화가 항상 새로운 취향만을 원하는 게 안타깝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요. 일본에서 새 스타일이 들어오면 전부 그쪽으로 쫓아가요. 우리 만화계에 있던 촌스러운 액션물은 맥없이 사라지는 거지요. 쌓이는 것 없이 새 것으로만 교체되는 것, 하긴 만화계만의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길거리 나가보면 다 보이지요. 자동차만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는 수십 년 전의 디자인들이 지금 것과 같이 흘러 다니는데 우리는 5년 단위로 취향이 달라져요. 쌓이는 게 없어요."
그를 가리켜 데뷔하고 단기간에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작가라고 한다.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그 사이 군대 다녀와서)2002년 LG 국제만화극화부문에서 대상을 받고 2003년에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제에 초청 받아 국제적인 호평을 받아 잘나가는 작가로 올라섰다. 2004년 서울 국제 만화애니메이션 축제 단편상, 대한민국만화대상 우수상, 오늘의 우리만화상…등등. 그리고 또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21세기…'라는 질문에 잘 대답해야할 의무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는 지난주에 또 상을 받았다. 얼마 전에 단행본으로 나온 <대한민국 원주민>으로 받았다. 상복이 많다고 하자 그가 손을 내저으며, 진짜 상 많이 받은 다른 만화가들의 이름을 줄줄 이어댄다. 덧붙여 아마 자신의 만화가 '상을 주기에 좋은 만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만화가 그런가?
"빡세게 그리고, 주제도 가볍지 않은 그런 내용으로 그린 거지요, 뭐…"
그리고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상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유명하지 않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받은 소설이 베스트셀러 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일까?
그의 가장 최근작은 <100도 C>, 6월 항쟁을 그린 작품이다. 최규석의 만화는 심각한 내용들이 많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문제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아니, 뭐, 그냥 다루기 편하고 그리기 쉬우니까요. 제 주위에 하층민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모습을 그리는 게 편해요. 저는 커피숍 같은 거 못 그려요. 자동차도 못 그려요. 노가다 판의 말투나 대사, 그 사람들의 복장, 이런 거 워낙 많이 봐서요. 그리고 저는 아줌마 그릴 때가 제일 편해요. 우리 엄마를 그리면 되니까요. 엄마 대사는 정말 쉽게 할 수 있어요… 하하하…"
그는 어릴 적부터 공부도 잘했지만 그림에 유난히 재능을 보였을 것이다. 그는 대학 입학때 다른 선택이 가능했지만 굳이 만화를 전공하기로 했다. 그는 평생을 진짜 만화가로 살겠다고 각오했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 까지는 뭔가 나눠진다는 것을 잘 몰랐어요. 내가 잘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리는 게 전부였지요. 도전이라고 할 때도 저는 사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만화계에 대한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형식적인 차이, 당신들처럼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죠."
신문에 연재했던 <습지생태보고서>는 환경에 대한 착한 이야기인가 싶을 것이다. 그게 비만 오면 물이 차는 지하 셋방에 사는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나면 어쨌든 웃음부터 나온다. 그는 진짜 유머를 아는 친구다. 자신의 유머를 그는 '좀 더 풍부한 맛을 주는 웃음'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의심 없이 믿는 바를 깨트리는 게 재밌어요."
사회문제를 다루는 만화는 재미없을 것이라는 기본의 인식을 그는 단번에 깨트린다. 정면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만화가 드물기도 했지만 대부분 엄숙하고 바른생활적인 분위기였다. "문제의식을 담은 만화는 별재미를 기대하지 않고 시작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지요, 일단 첫 장을 열면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없게 하려고요!"
지금처럼, 앞으로도 오직 욕심을 부리고 싶은 게 이것 한가지다. 물질적인 조건도 다음 작품을 위해 필요한 취재와 공부를 할 수 있는 정도라면 갑부라고 여길 것이다. 그는 한때 고향에 내려가서 학원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 만화를 전공하겠다는 아이들은 보통 가난한 집 애들이 많았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온 아이들은 컵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하기 일쑤였는데 학원비가 밀린 애들은 온수를 받으러 교무실로 가기보다 차라리 옥상에 올라가 생라면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 쪽을 택하더란다.
그에게 만화가의 길을 가는 게 후회할 때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럼요! 있지요.'
언제?
'마감할 때요. 와, 내가 뭐 하러 이걸 한다고 했나 싶지요.'
그가 씨익 웃는다. 진짠 줄 알았잖아….
'저는요. 이렇게 해서도 생각하게 만들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꼭 심각하게, 아주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된다는 거 보여주고 싶어서요.'
최규석의 만화는 소위 의식 있는 사람들이 즐겨 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별로 놀랍지 않다. 그의 주인공들은 가난하고 불평등한 삶의 조건에 내몰려 있다. 그들은 몰인정하고 가혹한 세상에 나약한 자신의 몸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운동하는 사람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만화를 찾아보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단다.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니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만화를 그려야 해요. 지금 제 만화를 보는 사람들은 사실은 안 봐도 되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미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잖아요. 이젠 그 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재정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반 만화 독자들이 아무 선입관 없이 자신의 만화를 보면서 아하, 할 수 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 만화가 칸을 메워 넣는 그림이지만 독자들도 칸 지워지게 만든다면 그건 진정한 만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노골리즘' 사상을 높이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세상이 너무 많은 장치와 수단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뿐이다. 그는 자신의 만화에서 일체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날려 버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쉽게 표현할 수 있는데 굳이 어렵게 빙 돌아가서 나타내는 방식, 꼭 그럴 필요 있을까요? 세상에 대한 발언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자기형식을 재구성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해고당한 환경미화원들을 만나러 새벽에 출동한다. 아마 다음 작품은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요즘 딱히 돈을 벌지 않고도 취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유는 작년에 벌어둔 돈으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의 삶이란 게 일반 월급쟁이와 같은 안정된 기반을 전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굳이 만화가만 그렇겠어요? 분야별로 나눠서 생각하면 안 되고요. 사회보장 잘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최저임금 올려주고 그러면 되지요. 우리도 접시 4시간 닦으면 작업할 시간 나오게 해주면 되잖아요. 문화정책, 그런 걸로 본질을 볼 수 없어요. 그냥 방세 낮추고 알바비 올리고 그러면 되죠. 엄마 아프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것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들 많아요. 의료보험 잘되고 생활비 얼마 안 들고 그러면 다들 예술가로 사는 것 어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살아가는 데 대한)공포심을 부추기면 문화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인터넷에서 웹만화들이 인기다. 그동안 잡지와 티브이, 극장 애니메이션까지 아우르면 만화문화를 즐기는 층이 더욱 다양하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최규석씨는 만화의 수준이나 품질이 향상되려면 당연히 기본적 고료가 안정화되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은?
"문화에 계층을 두고 보지 마시라고 말을 하고 싶습니다. 재밌으면 그냥 즐기면 되요. 레벨을 나눠서 정리하고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전에 한국만화에 대해 한창 떠들 때 만화가 제9의 예술이라고 했어요. 이제 드디어 예술적인 만화를 탄생시켜보자, 찾아보자, 그랬는데 웃기는 거지요. 전부터 있어왔던 까치, 독고 탁, 하니. 이런 게 다 예술인데 그냥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면 되는데 말이지요. 만화는 즐겁게 해주면 좋은 것이에요. 굳이 서열을 나눌 필요가 없어요."
최규석씨는 짧게 던지는 말에 많은 의미를 담아 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시종일관 그와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은 룰루랄라 하지 않았다. 그가 너무 진지했던 것일까? 만화를 손에 잡고 세상을 향해 반듯하게 서있는 한 젊은 친구. 그가 날린 마지막 멘트가 귀에 남는다. "겁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 항상 합니다." 내일도 우리는 용감하게, 거짓말하지 않으면서도 기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규석의 만화가 우리의 그런 모습을 그려내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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