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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3>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③

(3)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부여계가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국의 사학계는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연구는 열도(일본)에서는 상당히 진행되었고 거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경우 내물왕(356~402),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346~375), 고구려는 태조왕(53~146) 이전은 전설시대라고 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열도(일본) 연구의 큰 흐름은 만주 지역에서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크게 격파된 부여계가 옥저쪽으로 피난 갔다가 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건국했거나 한반도의 한족(韓族)과 연합하여 고대국가 백제를 건설했다는 논리인데 일본에서는 거의 정설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들의 견해와 제 견해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그리고 이들의 분석의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상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부여계의 한반도 남하에 대하여서는 일찌기 이나바 이와끼치(稻葉岩吉)가 지적하였습니다. 이나바 이와끼치에 따르면, 285년 경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공격을 받은 부여의 잔여 세력들이 동옥저로 피난하여 정착했다가 4세기초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나바이와끼치는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위례성(慰禮城)을 들면서 위례라는 말이 만주어의 우라(江城)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추정하였습니다.9)

그런데 이 분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이왕 즉 부여왕 울구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방을 무조건 황해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당시는 고이왕(234~286) 말년에 해당하는데 고이왕은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대방 땅에서 요동부여(또는 남부여)를 건설했다가 공손씨(公孫氏)의 몰락과 함께 한반도 쪽으로 남하해갔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설령 이 때 사용된 대방이 황해도라고 한다면 그것의 원인은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이전에 위나라 명제(明帝)의 명을 받은 사마의와 관구검에 의한 공손씨(公孫氏) 토벌이 그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대쥬신을 찾아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여계의 역사에 대해 가장 주목할만한 견해는 열도 사학계에서 만주사에 대한 토대를 구축했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입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라토리는 4세기 초 동북아시아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에서 한족(漢族)을 몰아내었고 전연을 건설한 모용씨(慕容氏)가 크게 성장하여 주변을 압박한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 과정에서 부여계가 대이동을 했으며, 이 대이동으로 한반도에서도 씨족제도(clan system)에 기반했던 백제(伯濟)가 고대국가 백제(百濟)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4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백제를 포함한 삼한은 씨족제도 수준에 불과했는데 부여계의 대이동에 의해 고대국가로 탈바꿈했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285년 모용씨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부여왕가의 일족이 옥저(현재의 함흥 지역)로 피난갔다가 313년 대방군이 축출되자 주변의 예맥과 함께 서진하여 대방을 점령하기 위해 국제전쟁에 참가하던 가운데 한반도에서 북상한 강력한 세력인 백제의 걸사(乞師)의 요청을 받고 이들을 구원하고 연합하여 통일국가로 백제를 형성하였다고 시라토리구라키치는 주장합니다. 당시 새로운 국가는 부여족에 의해 장악되어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삼한의 한족(韓族)들은 피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백제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 주요한 예가 된다고 합니다.10)

전체적으로 타당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당시 한강유역의 백제(伯濟)를 과대평가했다는 것과 부여계의 이동을 대방군의 점령이라는 사건과 연계를 시킨 것입니다. 즉 시라토리의 분석의 문제점은 당시 삼한 지역에서 절대강자였던 백제가 부여족과 연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백제라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며 백제가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소국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그 이름 또한 백제(伯濟)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11) 그러니까 한반도의 미약한 소국들 가운데 절대 강자는 오히려 만주에서 이동한 부여계입니다. 그들은 한 때 공손연과 더불어 중원을 도모했던 사람들이고 『후한서』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 요동지역의 부여계는 당시로서는 고대국가로서도 대규모인 2만여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삼국사기』(태조대왕 69)에는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니) 고구려가 대패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라토리구라키치의 분석은 대륙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한반도 남부의 정치세력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본 것도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이왕 계열의 부여계의 남하는 공손연의 몰락과 관계된 것이지 모용씨와 관계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더구나 대방군의 점령(245)과 연계시키는 것도 잘못입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게 일어난 일이라 맞지 않습니다(제4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봅시다. 모용씨의 타격으로 부여계가 궤멸한 것은 285년으로 이 때는 고이왕(234~286)이 서거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북사』등에는 구태(고이왕)라는 분이 백제의 건국시조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도대체 언제 백제를 건국하여 발전시킵니까? 고이왕이 한반도로 내려오기 전에 백제는 없었지요. 한반도에는 수십개의 소국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이름없는 백제(伯濟)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246년(고이왕 12년에 해당) 위나라와 고구려의 요동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전쟁의 후반부에서 고구려는 유격전술과 탁월한 전투의지로 위군을 결국 몰아냅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전쟁이 종결되어 압록강에서 요하지역까지는 상당한 힘(Power)의 공백상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한반도 남부로 내려간 부여계는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벌게 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시기 부여계의 적은 위나라와 고구려였습니다. 고이왕의 부여계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틈을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또 다른 수혜자는 선비계의 모용씨입니다. 즉 위 - 고구려 전쟁으로 양국이 모두 타격을 받은 사이에 모용씨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부여계는 각종 체제정비를 하게되는 것입니다.
▲ [그림 ④] 3세기 고구려와 위의 요동전쟁(245)

부여계의 이동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봅시다. 임나일본부 설을 제창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주장한 스에마쓰 카즈요시(末松保和)는 대체로 저의 견해와 흡사합니다. 즉 스에마쓰는 만주에서 크게 침공을 받고 고립된 부여계가 옥저 지역(현재의 함경도 지역)을 거쳐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인 백제(伯濟) 지역으로 남하하여 머무르다가 마한을 통일하였고 이 과정에서 350년경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12)

이 견해의 문제점은 부여계의 이동이 3차에 걸쳐서 일어난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북사』,『주서(周書)』,『수서(隋書)』등에 명백히 구태(仇台)가 백제를 건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백제 건국에 대한 인식은 주로 만주에서 모용씨(慕容氏)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에 쫓겨서 옥저 지역(함경도)으로 피신하였다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이 주된 논리입니다. 이것은 열도(일본) 사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또 백제가 건국된 시기는 모용씨가 제국을 선포한 시기(352년)와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시작한 때(372년) 사이에 백제의 건국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13)

그래서 미즈노유(水野祐) 교수는 "백제의 건국연대는 4세기 전기 근초고왕이 즉위한 346년경이며, 신라의 건국도 356년 경"이라고 주장합니다.14) 열도의 사학계는 고구려가 강성해지고 그 세력이 남하하면서 생긴 위기감이나 압박이 백제와 신라의 건국을 촉진하였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면,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되어 늦어도 4세기 중엽에는 백제, 신라 등의 국가가 형성되었다."라고 하고15) 우에다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4세기 초 고구려의 강대화는 조선 남부의 정치세력에도 변동을 주어 제 한국의 지역통합을 자극하여 마한의 통일에 의한 백제왕국의 출현,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신라왕국의 건설 등이 그 구체화된 현상"이라고 합니다.16) 그리하여 사카모토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는 "370년에 마한에 백제가, 진한에 신라가 대두하였다."라고 합니다.17)

그러나 이상과 같은 열도 사학계의 분석은 반도 사학계와 마찬가지로 관념 속에 탁상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남하는 백제의 건국과정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고구려의 남하는 오히려 열도부여의 건설을 촉진한 것입니다. 반도부여는 부여계의 이동에 의해 생긴 세력이지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을 받아서 생긴 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열도(일본) 사학계 논리의 문제점은 ① 백제의 시작을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 ② 부여가 한반도와의 연계를 가진 시기를 근초고왕 이후로 보고 있다는 점, ③ 모용씨 이전의 변화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으며 고이왕계가 한반도 방면으로 남하해 온 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 ④ 일본의 건국과 관련하여 백제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 사학계의 연구태도의 이상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의 기점을 고이왕으로 보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있다는 얘깁니다. 부여계의 남하가 열도부여의 야마토 왕조를 건국한 사실에 대해서 이들은 이미 다 아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백제의 시작을 굳이 근초고왕으로 본다는 것은 열도부여가 반도부여(백제)를 거점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설령 야마토 왕조가 근초고왕 또는 개로왕의 후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궁극적으로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열도에 도달한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게되면, 한반도는 부여계가 단지 지나쳐가는 장소에 불과하게된다는 논리지요. 즉 부여계는 만주에서 열도로 이동하여 일본을 건설을 하였는데 한반도 지역의 반도부여의 거점이나 지원은 불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열도를 장악한 부여계가 군대를 돌려 한반도를 식민지화할 수 있었다는 논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지요.

하나의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백제가 한강에서 자생하여 거대 제국을 만들었다는 반도쥬신(한국)의 사학계만큼이나 한심한 것이 열도쥬신(일본)의 사학계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식민지화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 같습니다. 반도쥬신은 열도를 무조건 백제의 식민지라고 합니다. 반대로 열도쥬신은 반도가 열도의 오랜 식민지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학문적 과오를 극복하고 쥬신의 정체성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연구 가운데 고이왕에 주목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기록(구태라는 자가 있어 대방의 고지에 백제를 세웠다)들을 근거로 하여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미천왕은 사마염의 서진(西晉)이 무너지고 모용씨가 중국의 군현을 압박함으로써 요서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는데 고구려의 미천왕(300~331)은 이런 정세를 활용하여 낙랑과 대방을 합병합니다. 이후 미천왕은 구태(仇台)라는 인물을 대방의 고지에 파견하여 군사령관으로 삼았는데 구태는 주로 중국인 주민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342년 전연(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큰 타격을 입었을 때 구태는 자립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것입니다.18)

오카다 히데히로의 견해는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구태에 대한 분석이 잘못되었습니다. 즉 오카다히데히로의 견해는 ① 구태를 미천왕 당시의 인물로 추정한 점(사실은 부여왕 울구태), ② 구태가 새로운 점령지의 군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는 근거를 알 수가 없다는 점, ③ 모용씨의 성장으로 요동·요서 지역이 사실상 전쟁터가 되어있는데 그 와중에서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점 등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에 있어서 구태의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억측에 가까운 견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열도의 여러 연구들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부여족 남하설'과 '기마민족 신라정복설' 등으로 더욱 체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여족 남하설의 내용은 부여족이 김해 지역을 점령하고 금관가야를 건국했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대성동고분군과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 가운데 3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라는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구야국과 독로국의 중심 지역인데19) 3세기 말부터 도질 토기의 출현과 함께 북방의 유목민족 특유의 유물과 습속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대성동 유적과 양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오로도스형 동복(양쪽에 끈을 매달 수 있는 이동식 솥)은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성 북부지역의 출토품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가 사실상 와해되고20) 그 일파가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현재의 두만강 하류 지역)로 이동했다가 다시 동해안 해로를 통해 김해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의 주된 내용은 3세기말부터 4세기 초 사이에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대이동의 와중에서 그 일부가 신라 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금관총, 천마총 등)이 유독 경주 분지에만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적석목곽분은 주로 중앙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유목민족들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적석목곽분이 4세기 초에서부터 6세기 초까지 느닷없이 경주를 중심으로 조성되었고 그 주인공은 왕족과 귀족들이었으며 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이 대부분 북방계의 유물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

신라 지역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흉노의 나라, 신라)를 통하여 충분히 검토된 사항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열도쥬신(일본) 사학계의 부여계의 대이동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을 살펴보고 그 문제점들을 파악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분석들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필자 주

(9) 稻葉岩吉『朝鮮滿洲史』(平凡社 世界歷史大系 11. 1935) 52쪽.
(10) 白鳥庫吉「百濟の 起源について」『白鳥庫吉全集 3』(1970) 485~499쪽.
(11) 『三國志』「東夷傳」
(12) 末松保和「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1954) 135쪽.
(13) Gari K. Ledyard, 「Galloping Along with the Horseriders : Looking for the Founding of Japan」『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 No.2, 1975 234~235쪽.
(14) 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1967) 175쪽.
(15) 井上光貞『日本古代國家の硏究』(1965) 571쪽.
(16) 上田正昭『日本古代國家硏究』(1968) 119쪽.
(17) 坂元義種『古代東亞細亞の日本と朝鮮』(1978) 333쪽.
(18) 岡田英弘「倭國の時代 - 現代史としての日本古代史」, 1976, 259~260쪽 ; 岡田英弘 『倭國』(中公新書 : 1977) 120~121쪽.
(19) 『三國志』魏書「東夷傳」弁辰條.
(20) 『通典』 夫餘傳 太康 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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