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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부여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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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부여의 여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2>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②

(2) 험난한 부여의 여정

『후한서』에는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부 즉 모용씨는 선비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민족명이 아니라 다만 선비산(鮮卑山)에 살고 있어서 선비족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민족명이 아니죠. 선비산에 산다고 해서 선비족으로 부른 것을 정상적인 민족명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비란 한족의 사가들이 임의로 부른 말인데 계보적으로 본다면, 몽골 쥬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반도 사학계의 용어로 쓴다면 동호(東胡)에 해당합니다. 또는 후에 이들이 스스로 '쉬', '쉬웨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예(濊)에 가까운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고조선계라고 보면 됩니다. 이 점을 좀 보고 넘어갑시다.

동호계(東胡系)는 선비·오환(오랑) 이후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습(飁),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 지역) 등인데7), 이 한자(漢字) 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iron, sun, bird, east)]에 가깝게 납니다. 즉 해(奚)는 쉬[xī], 습(飁)은 [xí], 실위(室韋)는 [shìweí] 등으로 소리가 나서 범한국인을 의미하는 예(濊 [쉬]) 또는 예맥(濊貊 : [쉬모])과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물론 이 발음들이 그 당시에 어떻게 불리었는 지를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고대의 운서(韻書)를 보더라도 그것을 해설한 발음을 오늘날에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민족을 지칭 하는 말들이 하나의 공통된 발음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 수렴의 정도를 토대로 이 민족을 부르는 말들을 추정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오랑캐로 알고 있는 말갈(靺鞨)도 실제 발음은 [모쉬] 또는 [모허]로 나타나 예맥을 거꾸로 부른 말로 추정됩니다. 즉 말갈도 맥예(貊濊)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는 "해(奚)는 본래 흉노(匈奴)의 별종", 『북사(北史)』는 "해(奚)는 그 선조가 동호(東胡)의 우문(宇文)의 별종"이라고 합니다.

선비족은 2세기경 영걸 텡스퀘이(檀石槐)에 의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가 단부(段部), 우문부(宇文部), 모용부(慕容部), 탁발부(拓拔部) 등의 4개 부족으로 재편되었는데 이 가운데 모용부와 우문부가 주도권 쟁탈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거란은 이 선비족 가운데 우문부의 후예들입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후 남은 사람들이 후에 거란으로 불렸습니다. 즉 『위서(魏書)』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는 동류로 고막해의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되어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송막지간은 시라무렌 이남과 조양(朝陽) 이북의 사이로 현재의 내몽골 지역입니다.

3세기 중반(245)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모용부가 동원되어 고구려와 일전을 하게 되었고, 이후 3세기 후반(293년경)에는 모용부가 독자적으로 군대를 몰아 고구려를 침입합니다.8) 이에 따라 고구려는 우문부와 단부 등 나머지 선비족들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견제합니다. 4세기 초 서진(西晉) 말기에 쥬신 천하(이른바 5호16국 시대)가 개막되어 만주 지역의 쥬신들이 대거 남하함으로써 고구려는 이를 이용하여 요동 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습니다.

341년 모용부의 모용황은 동진으로부터 연왕(燕王)으로 책봉받게 되어 이 나라를 전연(前燕)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연은 342년 고구려를 침입하였고 이 전쟁에서 고국원왕이 대패하였고, 전연은 고국원왕의 어머님을 사로잡아 돌아갑니다. 성공적으로 고구려를 정벌하여 후환을 없앤 후, 전연은 여세를 몰아 중원으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352년 전연의 모용준(慕容儁)은 스스로 황제에 올라 업(鄴 : 현재의 베이징 서남)을 수도로 하여 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3세기 후반 모용부(전연)의 성장은 부여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부여는 천년의 숙적 고구려의 압박과 모용부의 공격으로 국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됩니다. 초기에 위나라 - 공손연의 갈등이 부여계의 2차 남하를 촉진했다면 고구려 - 모용부의 압박은 부여계의 3차 남하를 초래한 것입니다. 즉 285년 모용부는 부여를 침략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 뒤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근거지를 서쪽으로 옮겼지만, 346년 전연의 모용황의 군대가 침입하여 왕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 사실상 궤멸되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494년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됩니다.

지금까지 본대로 3세기말에서 4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은 부여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고구려도 모용부의 세력에 밀리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부여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여계의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남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이 부여계의 3차 남하의 주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가진 의문은 왜 근초고왕 계열이 남으로 쫓겨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한반도 중남부는 물론 고구려까지 정벌할 정도의 세력을 가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동호계의 선비의 움직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4세기에는 동호계의 선비가 강성해지면서 만주에서 고구려, 부여 모두 큰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근초고왕 계열이 남하한 것이죠. 만주에서 쫓겨 온 근초고왕계가 신속하게 정벌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구려의 약화가 큰 원인입니다. 고구려는 요동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선비족의 전연(前燕)과의 충돌이 불가피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320년 선비(鮮卑)의 단부(段部), 우문부(宇文部) 등과 연합하여 전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화북의 후조(後趙)와 화친하여 전연을 견제하다가 모용황(慕容皝)의 공격(342)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의 어머니와 수만의 남녀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에 고국원왕은 평양성으로 피신(343)하여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체체 정비를 도모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는 필연적으로 만주에서 피신한 한강 유역의 부여계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습니다. 고국원왕은 군사 2만으로 남부여계(백제)를 정벌(369)하다가 오히려 황해도 치양(雉壤)에서 패퇴하여 평양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이 같이 근초고왕 당시의 고구려는 극심한 외환에 시달려 국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근초고왕 - 근구수왕 계는 그 틈새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만주에서 이동한 부여계와 한강유역의 부여계의 연합세력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 때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근초고왕 전후로 급격한 변화들이 감지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한반도 중부에서 느닷없이 출현하였고 근초고왕 이후 고이왕 계열(부여계의 2차 남하 세력)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夫餘氏)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백제의 왕성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부여씨로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분은 바로 근초고왕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진서(晉書)』에 따르면, 근초고왕의 휘(임금의 이름)는 부여영(夫餘暎)입니다.

반도부여는 근초고왕대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뒤, 동진에 사신을 파견(372)하여 진동장군(鎭東將軍) 령낙랑태수(領樂浪太守)를 책봉받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박사 고흥(高興)에게 국사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이 책은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책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이후 나타나는 왜왕들의 행태와 대단히 유사합니다. 마치 할아버지의 모범들을 후손들이 그대로 따르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 주

(7) 『新五代史』卷74 「契丹」; 『北史』卷94 「奚」.
(8) 『삼국사기』봉상왕 2년,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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