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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접수론'인가, '민심론'인가?

[기자의 눈] '김정일 상황'과 한반도 미래에 관한 두 구상

1주일가량 온 나라를 들쑤셔 놓았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얼추 정리되는 분위기다. 내달 10일 조선노동당 창건기념일에 김 위원장이 또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시 불붙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부나 언론 모두 일단 관망세를 보이고 있다.

<조선일보>는 18일자 사설에서 "김정일의 신변 이상 문제를 놓고 사실 여부가 입증되지 않은 보도들이 쏟아지는 것은 남북관계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없지 않다"며 슬그머니 발을 빼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조선>은 "고위직 정부 관계자들이 직접 김정일의 건강에 대해 마치 곁에서 지켜본 듯한 얘기들을 발설해 놓고서 이제 와서 '확인되지 않은 사안'이라고 발뺌하는 것은 언론 보도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라며 책임을 정부로 돌렸다.

하지만 김정일 건강이상설을 주요 언론 중 처음으로 지면에 올렸던 건 <조선일보>였다. 그랬던 신문이 남북관계를 걱정하며 뒤로 빠지는 모습은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격이 아닐 수 없다.
▲ 김정일 건강이상설을 다루는 이명박 정부의 방식이 비판을 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성호 국정원장 ⓒ연합뉴스

아마추어리즘만 드러낸 MB 정부

그러나 <조선> 말마따나 이번 국면에서 문제는 언론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였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정황 증거나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비교적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언론들이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을 기정사실화 한 것은 지난 10일 국정원장과 청와대 대변인이 그것을 직접 확인해 준 뒤부터였다.

북한 정보를 다루는 최고위급에서 '김 위원장이 뇌혈관 질환에 인한 스트로크를 일으켰으나 회복 중이고, 부축하면 일어설 수 있고, 양치질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 마당에 안 쓰고 배길 언론은 없었다.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은 북한 붕괴론, 급변사태론, 후계구도 예측 등으로 확산됐는데, 그 역시 국정원과 청와대가 씨를 뿌린 것이다.

16일부터 통일부가 나서서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에 관한 관련 첩보를 들은 바가 있지만 객관적인 팩트(사실)는 없다"며 상황을 수습하고 있지만 면피용일 뿐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최고위 당국자들의 경솔한 행동은 여러 가지로 그 배경을 분석할 수 있다. 국정원의 정보력을 과시해 존재감을 높이고, 이참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이나 국정원 직무범위 확대 등을 밀어붙이자는 계산이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그런 '고차원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그냥 단지 김성호 국정원장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북한 정보를 다루는 기본을 무시해서 그랬을 뿐이라는 게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그런 정보는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해야 한다는 걸 몰랐거나 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또 한 번 드러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의 초선 의원 한 명은 여전히 설익은 행태를 버리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이철우 의원은 18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정원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 한 것은 아니다"라며 정부가 너무 앞서간 건 아니라고 강변했다. 국정원 국장 출신인 이 의원이 앞으로 보여줄 '정형근식' 정보 정치도 지켜볼 일이다.

'그 이외의 통일'은 무엇인가?

고위 당국자들이 입을 가벼이 했다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통해 통일 문제를 보는 이명박 정부의 기본 시각이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12일 "정부는 북한 급변사태 발생시 바로 통일 국면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작성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신문에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통일의 가능성을 합의에 의한 통일만 상정했으나 그 이외의 통일에 이를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대비 계획도 짜놓고 있다"고 말했다.

"합의에 의한 통일"이 아닌 "그 이외의 통일"이란 무엇인가? 북한을 군사적으로 접수해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것 말고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로 북한 내 급변상황이 벌어지면 미군과 손 잡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군사적으로 장악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급변사태 발생시'라는 단서를 달아 준비만 되면 치고 올라가자는 이승만식 북진통일론과는 달랐지만, 군사력을 이용한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것만은 분명하다.

북한 급변사태시 한미연합군을 이북으로 침투시켜 핵무기 등을 통제한다는 '5029 계획'은 그 수단이다. <조선> <중앙> 등 보수언론들은 개념계획에 머물러 있는 5029를 보다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보수진영 일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는 11일 사설에서 "한반도의 통일이 중국의 안보와 외교·내정에 결코 해가 되지 않고 득이 된다는 사실을 (중국에)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 두라는 주문을 곁들이기도 했다. 5029 계획과 한국-미국 주도의 통일이 중국을 자극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작전계획 5029에 따라 한미연합사를 북한에 침투시키고도 '설득'만으로 중국을 안심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이 스스로 지적했듯 "중국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압록강에서 국경을 맞대게 되는 사태를 피하려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모습을 뚜렷이 드러낸 '상황관리론'

이명박 정부와 보수진영이 이같은 속내를 드러내자 이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전혀 다른 그림을 내보였다. 전자가 정치·군사적 '접수론'이라면 후자는 '민심론' 혹은 '관리론'으로 부를 수 있다.

'관리론'은 북한에 격변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관리하는 게 우선이고, 설령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군사적 '접수'를 성급하게 시도하기보다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데 주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북한 주민들이 남한과의 국가연합 혹은 통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 구상은 설령 북한 지도부가 무너져 공동화하더라도 남한이 자동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하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13일 <평화방송>에서"북한에 문제가 생기면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 것이고 미국과 러시아도 개입하려 할 것"이라며 "미국과 중국의 조정과 타협에 의해 상황이 풀려나갈 가능성이 있어서 우리 관할권이 북한에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구상은 북한이 체제 전환을 하는 데 있어서 핵심 변수는 북한 주민들의 선택이라고 본다. 외부에서 특정한 체제를 강요하는 건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와 혼란만 키운다는 것이다. 정 전 장관은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거나 미국이 평화유지군(PKO)를 만들어 들어가도 결국은 북한 민심을 장악하는 쪽이 우월적 지배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관리론 쪽에서는 '한국 정부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급변사태를 염두에 둔 대책 마련은 불가피하지만,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란 말을 먼저 한다. 남북간의 끊임없는 대화와 교류, 대북 식량지원 등이 그 구체적인 답이다. 북한 주민들의 민심을 사고, 급격한 변화를 막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리자는 것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18일 <경향신문> 칼럼에 "김 위원장의 건강이나 북한의 권력 승계 문제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이를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지켜보면서 대책을 세우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로이터=뉴시스

독일 통일에서 배운다

노무현 정부에서 고위급 안보 담당자를 지낸 한 인사는 독일 통일의 사례를 얘기하며 이같은 논리의 타당성을 역설했다.

"1989년 동독의 호네커 정권이 붕괴하고 90년 초 총선이 있었다. 독일은 분단됐을 때에도 동독의 정당 지부가 서독에 있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미디어에 수십년간 노출되어 있었다. 90년 동독 총선 때에도 서독의 기민당, 사민당에 해당하는 정당들이 동독에 있었다.

당시 서독 기민당은 빠른 통일을 원했고 사민당은 점진적인 통일을 원했는데, 동독 주민들은 기민당에 해당하는 동독 정당의 손을 들어 줬다. 흡수통일이었다고 하지만 그건 동독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그 바탕에는 서독과의 오랜 교류·협력의 역사가 있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했던 1994년 당시만 해도 관리론적 구상을 머릿속에 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운동 진영의 논리와 일부 겹쳐 그림이 뚜렷하지도 않았고, 대세를 장악했던 북한 붕괴론에 밀리기도 했다.

그러나 탈냉전 시대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북한과 공존하고 통일하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면서 이같은 구상은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독일 통일 후 동독 출신들이 '2등국민'이 되어 갈등하는 것을 보면서 '법·제도·군사적인 통일' 보다 사회통합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도움이 됐다.

김정일 건강이상설이 불거진 뒤 나온 논란들은 이처럼 한반도의 미래에 관해 뚜렷이 다른 두 갈래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소수 의견으로 영구분단론이 있지만 지지를 받기 힘들고, 평화정착 우선론도 있지만 각론이나 시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냉전적 접수론도 진화…이명박 정부는 어디에?

<조선일보>는 지난 16일자 사설에서 "한반도 급변사태 때 서독 정부가 했던 것처럼 미국이 우리를 돕겠다고 선뜻 나서게 하고, 일본이 그 뒤를 따르게 하고, 한반도의 통일이 중국의 안보적·경제적 이해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지 않으리라고 중국을 설득하고, 러시아와 대화할 바탕이 마련돼 있는가"라며 "남북 교류와 대화 통로가 완전히 막혀버리다시피한 상황에서 북한 급변 때 정확한 정보 파악과 함께 북한 측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정부에 물었다.

앞서 지적한 바대로 중국을 설득하는 것만으로 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급변사태가 나면 한미연합사가 군사적으로 장악한다'는 단선적인 접수론에서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관리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면서도 <조선>이 5029를 개념계획으로 격상시키자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친 미국 중심 외교로 중국과 러시아의 의심을 사고 있고 "그 이외의 통일"이나 운운하는 이명박 정부가 <조선일보>식의 진화라도 보일 수 있을지 기대 난망이다. 이 정부에서 새로 지었다는 '상생과 공영'의 통일정책은 아직 구두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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