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중 장관은 지난 6개월 간 잠수함 같았다. 잠깐 부상했다 길게 잠수했다.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던 3월 18일 개성공단 발언('북핵 해결 없이 개성공단 확대 없다') 후 긴 침묵에 돌입했던 게 그 시작이었다.
북한이 개성공단 남측 요원들을 추방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역도'라고 부르며 수년간 쌓아 온 남북관계가 사방에서 무너져도 사태를 수습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았다. 북한과 미국이 급속히 가까워져 통미봉남 얘기가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다시 기지개를 켰던 건 6월 초. 김 장관은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한 공개 기자회견을 열어 대북 식량 지원 얘기를 꺼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이 주관하는 6.15공동선언 8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연설도 했다. 하지만 북한이 지원 제안을 사실상 거부하고 6.15 행사 참석에 대해 청와대가 불만을 표했다는 소문이 도는 상황에서 다시 잠행했다.
그런 그가 더 깊숙이 침잠하게 됐던 결정적인 계기는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그야말로 '주무' 부처의 수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사건이라는, 자욱한 포연 속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이 벌어지자 낮은 포복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남북 화해협력 정책을 이끌어 왔던 인사들은 그런 김하중 장관에 대해 불만이 대단했다. 김 장관이 김-노 정부 시절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과 중국 대사로 일하며 화해협력 정책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배신감'은 더욱 컸다. 그를 중용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하루를 해도 장관은 장관이니 소신껏 하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부작위의 정치도 쓸모 있을 때가 있다
김정일 건강이상설이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은 지금도 김하중 장관은 예의 '부작위의 정치'를 하고 있다. 북한 관련 주무 장관으로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던 국회 상임위원회에 출석한 것 외에는 공개적인 활동을 또 다시 끊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김하중 장관에 대한 평가가 전과 다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은 입과 행동을 무겁게 해야 할 때인데, 김 장관이 그걸 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10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에서 김정일 건강이상설에 대해 "아직까지 어제 9.9절 행사에 불참했다는 것을 빼놓고는 정확하게 확인한 내용이 없다"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신문들은 이미 김정일의 중병을 기정사실화하는 기사들로 도배됐는데도 "이 단계에서 말씀드릴 것이 없다.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이야기 할 수 없고, 이 이상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거듭 말했다.
김 장관의 그같은 답변 태도는 정보를 다루는 기본이라는 평가다. 정보 사항에 대해 극도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보 파악 능력을 상대방에게 절대 노출시키지 않는 것. 늘 북한이라는 상대를 염두에 둬야 하는 통일부 장관으로서는 당연히 취해야 하는 방식이다.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의 대변인들이 "확인해 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언급할 입장이 아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 언론들이 익명의 정보 당국자들을 인용해 김정일이 뇌졸중이네, 내부 권력투쟁이 벌어졌네 하며 수많은 얘기를 쏟아 놓아도 입을 닫고 있다.
김하중 장관 같은 태도는 이후 돌아가는 상황에 맞춰 정부가 운신의 폭을 넓게 가져가는데 도움을 준다. 굳이 말을 바꿀 필요도 없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 높아진다. 북한도 남측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터인데, 통일부 장관이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명박 정부를 달리 볼 수도 있다. 30년 넘는 외교관 생활을 통해 외교안보 당국자의 '금도'를 아는 김하중 장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검사 출신 국정원장의 부적절한 방식
그와 정반대의 행태를 보이는 인물은 김성호 국가정보원장이다. 그는 1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나와서 김정일의 진료 차트를 읽어주듯 생생한 정보를 가감 없이 발설했다.(☞관련 기사 : MB정부, 김정일 병원 차트라도 봤나?)
국회 정보위는 비공개지만, 국정원장이 그 자리에서 하는 말은 통상적으로 참석 국회의원들에 의해 언론에 알려진다. 그건 일종의 관행이고, 따라서 국정원장이 국회에서 하는 말은 공개하라고 하는 것이다.
김성호 원장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도 10일 "김정일이 최근 '뇌혈관 질환에 인한 스트로크(발작)'를 일으켰으나 회복 중"이라고 말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도 다음날 국회에서 김 원장의 보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 다음날엔 익명의 고위 당국자가 김정일 위원장이 양치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는 생생한 정보를 흘렸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최고 수준의 정보가 모이는 곳이 국정원이란 점으로 미뤄 볼 때 다른 당국자들이 유출한 정보 역시 국정원에서 나온 것이고, 김성호 원장이 정보를 허술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김 원장의 거침없는 정보 공개는 김정일 건강이상설을 기정사실화하는 것만이 문제가 이니다. 북한의 급변사태나 붕괴 가능성, 내부 권력투쟁설, 후계구도 예측 등으로 논란이 사정없이 확산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명박 정부는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각종 계획과 군사 작전을 손질하겠다고 나섰다. 한국의 최고 정보기관 수장이 건강이상설을 확인해 준 마당에 외신들도 그에 따라 무분별한 기사를 쏟아 내고 있다.
"중요한 정보원을 잃게 됐다"
국정원장이 이처럼 정보 관리의 기본조차 무시하게 되어 나타날 문제점은 김하중 장관이 정보를 조심스럽게 다룸으로써 얻게 되는 이점을 뒤집어 생각하면 된다.
과거 청와대에서 최고위급 정보를 다뤘던 한 인사는 거기에 이런 문제점을 덧붙였다.
"국정원장이 밝힌 내용이 틀린 것으로 판명돼도 큰 일이지만, 다 맞아도 문제다. 그간 핵심적인 정보를 줬던 내부자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정말 병상에 있었다면 극소수의 사람들만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북한이 발설자를 색출하는 일도 쉽다. 국정원장이 중요한 북한 정보원을 버린 셈이다."
그는 이어 "김정일의 건강에 정말로 문제가 있다면 이 때야 말로 남북의 신뢰가 중요하다"라며 "하지만 국정원이 이렇게 움직여 북한 급변사태 같은 자극적인 논의의 씨를 뿌린다면 북한으로서는 '남쪽과는 더 이상 상종 못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 원장은 검사 출신이지만 국정원장은 그 어느 부처 못잖게 중요한 남북관계 관련 부처라는 걸 알아야 한다"라며 "정보력을 과시하며 국정원의 존재감을 높이고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건 결국 제 발등을 찍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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