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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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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도종환이 보내는 '시인의 엽서'] <61>


차를 타고 가거나 낯선 지방을 여행하다 오솔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물줄기를 따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내려오는 길이나 낮은 고개를 넘어가는 들꽃 피어 있는 길, 또는 동네 어귀를 향해 낫날 모양으로 감돌아 가는 길, 아래배미 논과 윗배미 논 사이로 나 있는 논길을 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냥 차에서 내려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은 충동에 싸이곤 합니다.

아는 사람도 없는 느티나무 아랫길을 따라 걷다 보면 편안한 사람 하나쯤은 꼭 만날 것 같은 길입니다. 한 번도 걸음을 디뎌 보지 않은 길인데 아주 낯익은 길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다니는 길은 직선으로 뻗어 있는 길입니다. 도시와 도시 사이를 빠른 속도로 이어 주는 길이고 그 길 앞에 서면 십 분이라도 먼저 이 길을 달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기만을 바라는 길입니다. 길을 떠나 낯선 어느 곳을 향해 간다는 '출발의 시정' 같은 것도 사라진 지 오래고, 차를 타고 가며 바깥 경치에 마음을 주는 일도 자꾸만 적어집니다. 습관으로 이어지는 길, 속도감을 먼저 의식하는 길, 지루한 여행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는 길입니다.

옛날과 다르게 이제 사람들은 차를 타면 잠을 먼저 청합니다. 잠드는 사이에 거리감과 속도감을 잊고 목적하는 도시에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차창 가에 서서 눈물로 이별하는 장면은 드라마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차가 정들었던 그 고장을 떠나기 위해 막 움직이기 시작할 때 아련히 젖어 오던 마음도 많이들 마모되어 버렸습니다. 바쁜 도시생활, 시간에 쫓기고 사고의 위험에 시달리는 동안 그저 무사히 여행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여행길에 비하면 오솔길, 시골에서 만나는 길은 얼마나 여유를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걸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느긋해지며 길가의 크고 작은 풀꽃들과 풀벌레, 저녁 까치에게도 눈을 주며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발을 꽉 조이는 구두 같은 것도 편안한 신발로 갈아 신고 걷고 싶은 길입니다. 어릴 적 동무들과 잠자리채를 들고 퉁퉁골 방죽으로 왕잠자리를 잡으러 가던 길, 고무신에다 피라미며 붕어를 잡아들고 맨발로 걸어오던 길, 노을이 너무 좋아 길이 끝나는 데까지 끝없이 걸어가던 길, 그래서 언제 보아도 낯설지 않은 그런 길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으로 뻗어 있는 고향길인 것입니다.

산 한가운데를 살 베어 내듯 뚝 잘라 만든 고속의 길이 아닙니다. 푸줏간에 걸려 있는 짐승의 살처럼 벌겋게 드러나 있는 삭막한 길이 아닙니다. 모두들 입을 닫고 앉아 말없이 앞만 보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져 세상의 이곳저곳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길입니다. 마음의 옷고름을 살짝 풀어 놓고 벗과 함께 격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편안해지기 위해 불안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현대인들의 잘 닦여진 길에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편안해지기 위해 불안한 삶을 사는 우리들, 빨리빨리 가기 위해 있는 것을 다 못 보고 가는 우리들, 한 가지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들, 언제쯤 우리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안으며 넉넉한 마음으로 물소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언제쯤 평화로운 저녁 안개와 꽃의 향기를 다시 제대로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자기의 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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