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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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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55>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⑥

인도의 탈산업화

유럽의 산업화는 비유럽의 탈산업화를 동반했다. 그 가장 현저한 예가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지였던 인도이다. 서양학자들은 그 동안 식민지화 이전의 인도 경제를 매우 경시해왔으나 최근에 연구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인도는 18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경제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무굴제국이 붕괴했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는 한 동안 계속 발전했다. 그래서 인도는 1750년에 세계 산업 생산의 근 24.5%를 차지하던 나라이다. 중국의 32.8%에 이어 세계 2위였다( P.Bairoch의 1982년 추계).

또 인도는 국제적으로도 면직물, 견직물의 주된 수출국으로서 큰 무역흑자를 보았다. 반면에 수입품은 커피, 차, 설탕, 술, 향료 같은 기호품과 보석 같은 것에 제한되었다. 금속제품은 가끔 대포를 수입한 것 외에는 거의 수입하지 않았다.

또 18세기까지 인도인들은 비교적 잘 살았다. 요사이의 실증적인 비교연구에 의하면 인도 남부 지역 농업노동자나 직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잉글랜드 농업 노동자나 직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오히려 상회한다.
예를 들어 동인도회사가 1795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드라스 근교의 쌀 생산지역에서 인도 사회의 최하층인 불가촉천민 농업노동자의 임금은 쌀로 쳐서 주당 30파운드에 해당했다. 이는 현물급여나 부조 등 다른 많은 수입을 뺀 금액이다.

이에 비해 아서 영이라는 학자가 1760년대에 조사한 것을 보면 잉글랜드 북부나 동부의 임금은 위의 잡수입을 포함해 주당 곡물로 쳐서 30-35파운드에 해당했다. 인도의 임금은 최저선으로 박하게 계산한 것이므로 실제 차이는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인도인들이 옛날부터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는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Parthasarathi의 1998년 연구)

이렇던 나라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며 급격한 경제쇠퇴 과정을 밟게 된다. 그리하여 인도는 19세기 초반에 공산품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1860년의 산업생산은 세계 전체의 8.6%로, 1900년이면 1.7%로 떨어지며 거의 산업기반이 붕괴하다시피 된다. 그 결과 인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빈국에 속해왔다.
▲ 항구로 실려 나가는 인도산 원면

이는 물론 인도를 최대한 착취하려 한 영국 식민주의 정책의 결과이다. 인도산 공산품이 영국에 들어오려면 매우 높은 관세를 물어야 했다. 1812년에 캘리코는 72%, 다른 상품은 100-600% 정도의 고율 관세를 지불해야 했다. 반면 영국산은 인도에서 관세 면제이거나 최대 2.5%를 물면 되었다. 그러니 인도 산업이 온전하게 남아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영국 산업혁명의 성공은 상당부분 이에 의존한 것이다.

인도 면직산업의 붕괴

서양학자들은 인도 면직산업의 붕괴가 공장에서 생산한 품질이 좋고 싼 영국 면직물의 경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장제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초기의 공장들은 수공업에 비해 그렇게 능률적인 작업장은 아니었다. 아크라이트가 1771년에 처음으로 수직기 공장을 건설했으나 편사는 쉬워도 직조는 기계화가 곤란하여 1800년 이후에야 상업적 이용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기계를 이용한 직조보다 손으로 하는 직조 비용이 더 쌌으므로 1830년대까지도 수공업자의 고용이 증가했다. 기계화된 방직의 승리가 분명해진 것은 1830년대 말이다.

증기기관의 채용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 증기기관이 공장에 채용된 것은 1786년이나 초기의 증기기관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볼튼과 와트의 증기기관 공장에서 만든 496개 증기엔진 가운데 몇 개만이 15-16 마력 정도를 낼 수 있었다. 당시의 금속 기술로는 고압력에 견디는 부품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35년이 되어서야 면직산업 기계의 3/4가 증기에 의해 가동되었다. 또 노동자 2교대제로 하루 종일 기계를 돌림으로써 엄청난 생산 효율성을 가져왔다. 그러니 이는 훨씬 뒤의 일인 셈이다.

그럼에도 제국의 우월한 힘에 의존한 영국의 면직산업은 18세기 후반부터 해외에서 점차 인도 면직물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방비 상태의 인도로 영국 면직물들이 밀려들어오며 이미 1820년대부터 인도 면직물 산업의 쇠퇴가 시작된다.

특히 가장 먼저 식민화된 벵골 지방의 면직물산업은 1830년까지는 거의 완전히 붕괴했다. 그러나 이런 쇠퇴가 경제논리 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인도회사는 면직물에 대한 독점 구매자로서 터무니없는 가격과 조건에 그것을 사들여서 폭리를 취했다. 또 수공업자들을 별 다른 이유 없이 채찍질하고 투옥했으며 심지어 직조기를 부수거나 직조공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만행까지도 저질렀다. 인도 면직물 산업을 짓밟기 위해서였다.
▲ 직조공의 손가락을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는 식민지 관리

영국 면직물의 인도 침투가 본격화하는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이다. 그전에는 인도 내부의 교통이 아직 불편했을 뿐 아니라 영국산이 인도인의 기호에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의 전국적 개통과 인도 시장에 침투하려는 영국인의 적극적인 노력이 그 장애를 없앴다.

인도에서 철도는 1853년에 처음 개설되었으나 1870년까지 7,200킬로가 부설되었고 1936년의 전체 철도망은 6만9천 킬로미터로 세계 4위일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 철도망을 타고 영국 상품들이 지방까지도 침투해 들어갈 수 있었다.

또 영국 인도부는 인도 시장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1866년에 인도 면직물을 세세히 조사한 18권짜리의 견본책을 만들어 업계에 배포했다. 여기에는 총 700종의 인도 면직물 견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영국 면직업자들은 영국산의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쏟아져 들어온 영국 면직물은 인도산을 모방했으나 색깔이 인도산 보다 더 밝았고 조성도 더 치밀했으며 가격은 30%가 더 쌌다. 따라서 인도인의 인기를 끌어 곧 시장의 큰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 수입직물이 인도 소비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니 인도 면직산업이 몰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마하트마 간디가 스스로 물레를 돌려 실을 만드는 모습. 영국산 면직물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는 면직산업 만에 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한때 번영하던 인도경제는 원자재를 빼앗기고 반대로 기계로 생산한 완제품을 사서 쓰는 한심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의 제3세계 국가들이 과거 식민지 시대에 대부분 똑 같이 경험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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