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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신을 어떻게 계승·확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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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신을 어떻게 계승·확대할 것인가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육임제의 의미와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남

이 글은 김지하 시인이 지난 7월 12일의 천도교 강연(나를 향한 제사와 내 마음이 곤 네 마음)에 뒤이어 7월 19일 천도교에서 행한 강연 전문으로, 천도교 정신과 조직원리를 바탕으로 촛불정신의 계승 및 확산을 모색한 글입니다. <편집자>

육임제(六任制)의 의미와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남(三隱三顯)

촛불은 이제 꺼지려 합니다. 시청 앞의 집단적 촛불은 이제 꺼지려 하고 있습니다. 계속 켜자는 강경 주장과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는 온건 주장이 맞서고 그 절충으로서 일주일 만에 한 번씩 켜고 그와 함께 불매 운동 등 전반적인 대안 운동으로 확대하자는 '투-트랙' 주장이 일어나 아마도 형식상으로는 세 번째 주장 쪽으로 진행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 논의 과정에서는 대체로 채식(菜食)과 한우(韓牛) 육식을 집단적 제약ㆍ감시를 전제 조건으로, 그 근본(質)과 가격, 생산-소비자 간 연대 등을 해결하는 대안적 생활 운동의 실천 속에서 배합하자는 합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환 과정으로 보입니다.

물론 촛불은 애당초부터 전체적으로 철저한 비폭력 평화운동이지만 그 안에서의 비교적 동세적(動世的) 정치 활동에서 비교적 정세적(靖世的) 정치 활동으로, 앞으로의 안팎의 변화에 따라서는 또 다시 동세적 활동으로, 그리고 다시 정세적 활동으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며 아시아의 다른 나라나 서방 세계로까지 확산되거나 또는 사상 문화와 생활 생태 방면으로 양면화, 다양화하면서 폭넓게 진화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됩니다.

단순한 정치시위가 아닌 역시 하나의 거대한 새 문명사 창조운동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동학의 포접제(包接制)나 육임제(六任制) 등 조직활동의 기본 철학적 원리나 삼은삼현(三隱三顯)과 같은 동학사의 격동적인 역사 법칙에 대한 검토와 참고는 매우 중요해지리라 생각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포접제와 육임제는 수운과 해월 동학의 드러난 시대(顯道時代)와 숨은 시대(隱道時代) 등 초기 활동기를 일관하여, 그리고 갑오년 대혁명 시대에 우뚝 일어선 구체적이고 생활적인 정치, 경제, 사회 변혁의 주체였던 집강소(執綱所, 육임제의 정치 기능)의 중심기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세포 조직적 특징이나 구조물로서의 조직 배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적 필요에 응한 그 살아 생동하는 영적, 생활적 생명 원리 자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현대라는 시대와 대중의 문화적 요구 자체가 그렇거니와 현실적으로 촛불의 소통 구조나 활동 특징은 '조직 없는 조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엠네스티의 무이꼬 조사관은 촛불집회를 한마디로 '주도자 없이,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다양한 목소리를 낸 신개념의 집회'라고 전제한 뒤, '특정한 주도자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자발적 의지로 참석한 것이 명확히 느껴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새로운 개념의 집회였다'고 부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촛불이 후천개벽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발적 의지에 따라 참석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신개념의 집회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집단 지성에 의한 포털의 논의 과정과 개체적 결의에 의한 광장의 촛불 시위에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간에 논의와 실천 양면에서 역시 '조직 없는 다양한 자발적 활동'이 그 원칙이고 또 앞으로도 그것은 요청적 형태로서 일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은 현실에 알맞은 참으로 탁월한 점으로서 계속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생활 대안 운동의 현실적 확대 과정은 조직이 아니라 하더라도 조직성의 효과와 같은 것을 요구하리라는 전망 아래 다음과 같은 <조직 없는 조직>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포접제와 육임제의 경우 물론 수운, 해월 시대에 그 당시의 역사적 한계나 필요에 따라 어떤 경우 약간의 실체적 조직구조가 시도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 원칙적인 생명원리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촛불다운 요구에 알맞게 그 원리를 그 다양하고 자발적인 생명성을 중심으로 충분히 새롭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젊은 디지털 촛불들은 '우리의 자유로운 소통 방식이나 현재와 같은 쌍방향의 자유토론, 자유행동만으로도 충분하다. 뭣 때문에 동양 전통의 구닥다리 옛 사상을 다시 가져다 너덜너덜하게 만들려 하느냐'고 반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지금의 싸이버 문화, 디지털 문명은 다분히 '시장 오리엔테이션'이며 너무 자유주의적이면서도 너무 집합적이기 때문에 악성적 신자유주의 시장 질서에 의해 이용되거나 새로운 파시즘의 위험, 그래서 첫째, 영성적 생명론에 의해 재해석, 보완되어야 하고 다분히 '쏘시얼 다위니즘'과의 연속성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우주적 통제 가능의 시도, 즉 '에코 파시즘'에 이용될 여지가 느껴지므로 그 특징이 '화엄적 개벽'론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 마음에 안 들면 잊어버리시고.

지난 12일 강의 '나를 향한 제사(向我設位)와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則汝心)'에서 거듭 밝혀 말했듯이 촛불 대중의 디지털 소통구조는 수운 동학에서 '내 마음이 네 마음'의 현대적 의미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생활 실천적인 소통이자 인간과 우주, 또는 신 사이의 우주적 영적 생명의 소통이었던 것이니 곧 네티즌 개체개체 사이의 집단 지성의 영역에 가까우며 이것은 곧 불교의 화엄적 집단지성과도 연속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실천적으로는 '모심(侍)'의 해설에서 '한 세상 사람들이 우주로부터 서로 따로 따로 옮겨 살 수 없음(不移) 즉, 융합의 전체성을 각각 개체 개체가 자기 나름으로 깨달아 역시 각각이 자기 나름으로 실천, 실현한다.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고 했으니 우주적 집단 지성을 각자 개체개체가 자기 나름대로 인식하고 그 인식 내용을 자기 나름대로 실천, 실현하는 우주적, 영적 네트워크 시대의 새 원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다름 아닌 화엄경의 '인드라망' 즉 '그물 우주와 구물코 개인 영성의 세계요' '먼지 한 톨 안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바로 그 이치입니다. 또한 '하나의 커다란 달이 천 개의 강물에 각각 따로 따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비치는 것'(月印千江)과도 같습니다.

현대 진화론, 즉 '개체-융합(identity-fusion)'에 의한 '자기 조직화(self-organisation)'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포접제의 포접은 수운 선생께서 신라 때의 저 유명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풍류도(風流道, 동학의 역사적 원형이면서 한국 현대 생명 운동이 원형이기도 한 고대 한국의 전통적 생명 사상)에 대한 해설에서 요약한 바 있는 '유불도 삼교를 다함께 제 안에 담고 있고(包含三敎)' '온갖 물질 , 온갖 생명까지도 다 사랑하고 가까이 하여 진화시킨다(接化群生)'의 바로 그 '포(包)요 접(接)',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포함(包含)'과 '접화(接化)'라는 말 그 자체로부터 가져다 붙인 이름입니다.

단알한 인용이나 멋 부리는 이름만이 아니올시다. 그 활동의 특징이 그 이름 안에 이미 뚜렷이 들어있고 사실상 수운 시대에 여러 활동 속에서 그 활동적 특징들이 화안히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촛불의 희망인 쇠고기 문제, 물 문제, 운하와 교육 문제 등은 이제부터의 다양한 생활개혁 운동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바로 그 생명 가치들, 생태 가치들인데 이것을 현실 활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해결할, 개인적으로 또는 소집단에서, 지역 자치에서, 그리고 사회 각 방면에서 해결하려면 결국 정당한 수준 높은 직접 민주주의와 기존 정당의 공천 관여 등으로부터 해방된 살아있는 지자체 선거와 기타 유기농단체거나 개인 및 한우 축산업자와 소비자 등 사이의 영적이고 경제적인 생명 순환 관계가 도덕적, 원시적, 관행적인 단계에서부터 훌쩍 상승하여 법제와 정치 차원에서 정확하게 법제화, 제도화, 현실화, 구체화되어 단단히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위한 실제 활동은 바로 이 같은 생명 철학적 원리들에 의해 촛불의 가장 큰 장점인 집단지성과 개인의 자유로운 소통ㆍ합의 및 조직 없는 실천의 툭 트인 다양한 자발성과 창의적, 개성적 생명력을 도리어 확고히 지지하는 열린 기초적 생활 조직 즉, '조직 없는 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바로 그 모델을 포접제나 육임제에서 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포접'은 애당초 지역 자치와 직접민주주의, 주민의 생명존엄과 생활 가치를 제도적으로 세우고자 하는 활동으로서, 마을, 고을 등 생활 단위에 걸어 반드시 군, 현 등 행정 조직은 아니고 연비(聯臂, 친지나 사돈 등 삶에서 가까운 사람끼리의 연락)의 자연스런 흐름에 얹힌 생생한 새 삶의 기능이었습니다. 그래서 '접(接)'은 '사귐'을 뜻하는 말로서 '접화(接(化)'란 말의 뜻과 같이 서로 가까이 사귀게 함께 서로의 삶을 향상시키는 '품앗이(한 농가의 농사를 온 동네가 들어서 한꺼번에 마쳐주는 계(契, 호혜의 일종)와 같은 일 방식)'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접'입니다. 물론 농투산이 동학당들의 기초조직입니다만 무슨 좌파 이론가들이 망상하듯 음침하고, 비밀스런 세포조직 따위가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포(包)'란 무엇일가요?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 일본이나 서구처럼 봉건제 전통이 그 중심이 아니라 중앙집중적인 군현제(郡縣制) 국가 전통이 중심이었습니다. 지방관료들도 모두 다 중앙에서 임금이 임명했습니다.

동학 혁명을 연구자에 따라서는 '지방의 반란'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앙집중적인 관료제, 군현제의 경직된 하향적(下向的) 지배 질서에 대한 개인과 마을, 고을, 그리고 이곳 저곳 사이의 통혼권(通婚圈)에 얽힌 '연비(聯臂)' 등 생활과 생명 흐름에 맞는 활활발발한 새로운 우리나라, 동아시아 나름의 지방자치 직접민주주의의 요구를 앞세운 산 운동이기도 하다는 말이올시다.

따라서 그것은 거대한 후천개벽(後天開闢, 우주 변화와 지구 생태계 혼돈 및 문명사의 대전환에 대응하는 생명운동)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삶과 모든 생명들의 갈망에 입각한 지역 자치와 직접민주주의,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의 처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일종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혁명이었습니다.

거기에 민족 민중 개혁을 위한 대전변 활동이 토대를 두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동학 나름으로 젊은이, 여성, 농민, 빈민, 유민(流民)만의 접 즉, 품앗이만으로는 그 효력이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구조적 한계를 뚫기 위한 방향이 바로 포(包)의 건설이었습니다. '포'는 '포함(包含)'이라고 했습니다. '고운' 선생의 풍류 설명에서는 '포함삼교'이니 '유불도 세 방면으로 공부하는 지역의 명망가들을 그야말로 아무 조직적 전제나 규제 없이 그 논의, 합의 절차에 끌어들여 함께 담는 열린 구조인 것입니다.

조건은 유, 불, 도가 서로 다름에도 인민과 나라와 생명을 생각함에는 사심 없는 지방 인사들이란 점입니다.

포는 그래서 그 다른 이름이 '소쿠리'였습니다. '소쿠리'는 구멍이 숭숭 나 환히 들여다보이는 열린 망태기로서 그 안엔 꼭 같은 종류의 연장만이 아닌 여러 다른 종류의 좋은 연장(지혜의 도구)들을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용어로 한다면 접이 전위당(前衛黨)일 경우 포는 통일전선입니다만, 이 경우 그 기능과 역할이 전혀 다릅니다.

옛 어른들 말씀에 '소쿠리 메고 품앗이 간다'란 소리가 있는데 그 뜻을 깊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촛불과 연결해서 앞으로 다가오는 새 시대에 촛불을 계기로 오랜 침체를 딛고 일어나 참으로 개벽을 실천하려는 동학당들은 이 말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젊은 촛불과 비정규직 등 수많은 쓸쓸한 대중들과 그럴 또 수많은 저소득층 노동자와 농민들과 축산농민들은 여전히 포가 아날로그 꼰대들만의 집일 수도 있고 접이 젊은 디지털만의 광장이요, 일터요, 스크린 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쿠리'와 '품앗이'는 촛불의 새로운 과정들, 화엄 불교나 선불교와 집단지성의 관계 또는 이번 6월 30일 이후 촛불 광장에 개입하여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첫 촛불의 그 아름다운 비폭력과 평화행동을 다시 회복시킨 천주교, 일부 기독교와 불교 및 원불교 등 종교계의 양심적인 성직자들과 진정으로 생명과 영성의 신문명도래를 희망하는 참 지식인들의 사심 없는 지지와 지혜들을 담은 도구가 될 수 있으며, '품앗이는 이제부터 촛불과 대중들이 시작해야 할 다양하고 자발적인 생활과 생명의 개혁, 개벽 운동을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실천해 나가는 '개체-융합'의 생산적 삶이자 '계(契)'와 같은 민중기금 등의 호혜(互惠)와 교환(交換)과 미래의 재분배(再分配)를 개성적으로 결합시키는 이 일종의 새시대적인 '신시(神市)' 원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국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나 본인과 관련, 한국 생협이 참가하는 아시아 민중 교역 단체들 전부, 일본의 그린ㆍ코프, 생활 클럽, 생협, 팔 시스템 연합, 민중교역단체 APLA, 일본 소비자 연맹과 환경운동 단체들, 필리핀, 인도네시아, 팔레스타인, 동티모르, 파키스탄의 관련 단체들, 또 일본의 거의 모든 생활협동운동 조직들이 모여 11월에 후쿠오카에서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주기금'의 대대적 출범식이 열립니다.

이 물결의 슬로건은 '호혜를 전면에, 교역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입니다. 이것은 사실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 운동사 전체의 대 개벽 사태입니다. 그리고 이 물결은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 미국의 시민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과 긴밀히 생활 개혁 과정 속에서 연대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사상적 자부심을 위해 도움이 될까 하여 한 말씀 드린다면, 이 제안과 이 슬로건은 바로 불초 제 자신의 메시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본 그린코프 사무장 유끼오까 선생의 취지문에서)

촛불과 함께 우리는 바로 이 같은 호혜와 교환과 재분배, 즉 고대시장의 삼 요소를 다시금 유기적으로 회복하려는 경제생활의 개벽에서 해월 선생의 후천개벽관을 바로 읽어내야 합니다.

익산 사자암에서 남계천이 묻습니다.

'후천, 후천하는데 그놈의 후천개벽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선생이 대답합니다.

"모든 산 푸르러지고 모든 길에 비단이 깔릴 때, 만국과 교역이 시작되고 이 땅에 들어 왔던 만국의 병마가 마지막으로 다 떠날 때'

길은 장터이기도 합니다. 길바닥과 장바닥에 비단이 깔릴 때는 모든 사람이 한울님으로 높이 모셔지고 곧 옛 신시와 같은 사랑의 생명이 넘치는 새 시장이 서는 때입니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 아메리카와 유럽으로부터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동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동아시아의 경제는 단순한 교환, 즉 신자유주의 뿐의 정글 시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우정과 생태계 및 생명을 모시는 호혜('계' 또는 '품앗이'와 같은 '개체-융합' 즉 수운 선생의 이른바 '각지불이ㆍ各知不移'의 원리요, 서로서로를 모심입니다)와 보다 유기적인 생명성에 입각한 교환과 단순한 평균적 분배가 결코 아닌 새 시대의 새로운 삶과 세계 조건에 알맞게 기우뚱한 균형을 포함한 중도적이고 원숙한 형태의 재분배를 목표로 합니다.

이 변화에 대해서 촛불과 개벽꾼과 화엄혁명가들은 능숙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 인류가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는 구체적인 후천개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기 포접이 이 모든 문제에 만족할 만한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럼 거기에 이어 무엇을 또 기억해내야 할까요?

육임제(六任制)올시다.

먼저 지적할 것은 육임제는 포접 안팎과 포접 사이사이의 일정한 갈등과 비능률, 반(反) 개벽적, 비(非)모심적인 오류가 발생하면서 이에 대한 해월 선생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었습니다.

종교적 명망가들과 청소년, 여성, 농투산이 대중 동학꾼들 사이에, 접주와 접주, 포주인과 포주인 등의 방향성과 그 집행과 그 후비조치, 비유한다면 새 경제인 '신시운동'의 경우 과연 호혜와 교환과 재분배의 기능들 사이에 균열과 반대와 역작용이 일어난다면 어찌할까요?

실제로 그런 현상은 일어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교세는 커지고 이후 교조신원(敎祖伸寃, 수운 선생 복권 요구)을 중심으로 한 합법적 대중 운동인 보은취회(報恩聚會), 삼례집회(參禮集會), 대한문 복합상소(大漢門 伏閤上疏) 등이 발의되고 대규모 군중 동원과 관권과의 마찰이 발생하는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을 때, 예컨대 해월 선생 지도부 안에서도 이미 그때부터, 사실 그 이후 교조신원기 당시에 비로소 그 구체적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만 여러 소두목들의 상호이반(相互離反)이나 해월 선생 자신의 지도노선과는 반대되는 선천지향(先天志向ㆍ낡은 옛 사상으로 회귀하려는)적 오류들이 축적되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남접(南接, 전라도, 충청도, 경상남도 일대의 조직) 일부와 서장옥(徐章玉) 그룹의 폭력혁명론, 즉 동세개벽(動世開闢) 주장과 북접(北接, 경상북도, 충청북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일대의 조직) 대다수의 평화행동론, 즉 정세개벽(靖世開闢) 주장이 이미 그 무렵의 논의과정에서 싹이 텄다고 하며, 1894년 봄 갑오동학혁명 전쟁의 제1차 기포에서 남ㆍ북접 사이의 시국관이 갈등했을 경우, 남접 내부에서 손화중(孫華仲) 포의 수양과 행동의 균형과 규율을 중시하는 온건론, 김개남(金開男) 포의 수양이나 규율이나 평화적 개혁보다 숙청과 투쟁과 전투적 변혁에 중심을 둔 급진론, 그리고 그 사이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며 오히려 근왕개혁(勤王改革, 이씨 왕조를 그대로 두고 개혁하는 것)을 주장하는 전봉준(全琫準) 지도부 사이의 갈등과 물론 그 형태와 내용은 다르지만, 북접 내부에 있어서도 손천민(孫天民), 김연국(金演局)류의 일체 수양 위주의 정적주의적 경향, 서장옥류의 전면적 동세개벽, 손병희(孫秉熙)류의 중도개벽, 그리고 서병학(徐丙鶴) 등의 전통 유학에서와 같은 쿠데타에 의한 정권 반정(反正) 주장 등이 마구 엇갈려 사분오열(四分五裂)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미 그 싹이 그보다 훨씬 이전 해월지하시대, 즉 숨은 시절(隱道時代)에 드러났다 하는데 그 단적인 예가 곧 다음과 같은 '춘풍샌님 일화'입니다.

서장옥, 손천민 등 여러 제자들이 대중에 대한 동학의 종교적 카리스마를 강화하기 위해서 유불도의 여러 교리나 서학(西學)의 번거로운 의식(儀式) 절차를 끌어다가 동학의 예절을 복잡하게 하고 위엄있게 꾸미려 했을 때 해월 선생이 늘 웃으며 말씀했다고 합니다. 누가 이러자 하면 "그래, 그렇게 해봐!" 또 누가 저러자 하면 "그래, 그렇게 해봐!" 그리해서 주변에서는 선생의 별명을 '춘풍샌님'이라고까지 불렀다는 이야기올시다.

그러나 선생의 행장에 따르면 그러던 선생이 어느 날 이 문제에 못을 딱 박아 말씀하셨으니, "지금은 내가 너희를 따른다만 뒷날엔 너희가 다시금 나를 따를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종의 개벽운동의 성장통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크게 보아 도그마나 번거로운 의식절차, 철통같은 조직구조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유로운 자발적 영적 지향인 '모심'과 살아 생동하는 천의무봉한 생활개혁에 의한 '살림', 즉 생명 운동을 그 기능과 역할에서 보장하는 산 조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끝끝내 잊지 말아야(永世不忘) 했는데 바로 그것이 참다운 도통, 즉 '깨침'이었던 것입니다.

해월 선생은 바로 이 해결책을 찾으며 몹시 고민하던 중 하루는 꿈에 수운 선생이 붉고 푸른 두 가지 빛깔을 가진 세 갈래의 두루막을 입고 춤추는 광경을 보고나서 잠을 깼다고 합니다.

도무지 그 뜻을 알기 어려운 이 꿈을 두고 선생은 몇날 며칠을 궁리했다고 하며 장고(長考)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육임제의 도식입니다.

교장(校長)-교수(敎授)
도집(都執)-집강(執綱)
대정(大正)-중정(中正)

교장은 동학의 진리와 개벽의 실천을 가르치는 교육의 대표자·책임자·총괄자요, 교수는 그 구체적 내용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며, 도집은 생활가치, 생명가치를 실천하는 현실적인 개벽정치의 지휘자요, 집강은 그 정치 실천의 실무자, 구체적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며, 대정은 그 가르침과 그 정치적 실천에 오류가 있거나 또는 그 방향과 방법을 수정할 때 비판 교정과 그 개혁의 방향·방법을 제시하는 책임자·기획자요, 중정은 그 교정이나 비판, 수정이나 개혁의 실무를 담당하는 집행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기능들은 세 가지 종류의 방향, 가르침, 실천, 그것의 비판 기능으로 그 셋 사이에는 분명한 역할분담이 있습니다.

우선 그 셋 사이에는 매우 진취적인 역동성과 서로 분명 다르면서도 생동적인 상호 보완성이 보장됩니다. 이른바 '3축'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교장과 교수, 도집과 집강, 대정과 중정의 각기 똑같은 계열 방향 내에서의 두 역할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상호비판과 견제와 경계가 요구되었다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도리어 상호 반대성까지도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양립적인 참된 균형과 안정이 보장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2축'의 원리입니다.

역(易)으로 본다면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겠는데, 실은 그 원리가 나의 생각으로는 먼젓번 '3축'이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의 3수분화(三數分化) 원리라면 뒤에 문제되는 '2축'은 음(陰)과 양(陽)의 법칙이겠습니다.

천지인은 유목 이동문명에 근거를 가진 역동성, 이동성, 실천성, 생산력과 혼돈성이라면, 음양은 농경 정착문명에 토대를 둔 안정성, 정착성, 이념성, 분배적 균형과 질서를 뜻하는 것이고 이 양자의 결합과 상호 생성을 통해서 <한>이라는 이름의 한울님사상, 즉 개벽이 이룩되는 이치인 듯합니다.

육임제의 중요성은 생활정치, 생명정치, 지역자치와 직접민주주의 등의 실천적 정치문제에 직결돼 있습니다. 육임제의 중심은 집강기능으로서 뒷날 갑오혁명 직후 남도 일대에서 정치, 사회, 경제, 풍속 등의 구체적 개혁주체로 활동한 <집강소>라는 일종의 '화백'기능(사실은 당시 남도 지역에서 오일장의 변형, 또는 원형으로서의 '호혜시장(神市)'이 나타났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 연구·조사된 적은 없다)에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직접적 생활정치, 지역분권적 직접민주주의 실천기능인 <집강소>를 앞뒤에서 보완하는 기능으로서의 육임제의 가치는 갑오년 이후에야 그 탁월성을 실감시켰다고 합니다.

문득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의 '이축·삼축론'이 생각납니다. 이 논의는 초현대적인 혼돈적 문화 또는 혼돈적 질서의 문화, 즉 카오스모스(chaosmos) 문화를 보장하는 카오스 민중, 두뇌 민중, 다중적 민중의 새로운 문화의 결정적 구조입니다.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검증과 예술적 관조의 결합'이라는 '3축'이 그것인데 여기에 대해 '철학에 대한 비철학, 과학에 대한 비과학, 예술에 대한 비예술'이라는 '2축'의 상호 부정을 통해서 균형있게 생성한다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이른바 '혼돈에 빠져들어 가면서도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 그 자체의 질서로서의 카오스모스 문화가 카오스 민중의 사상문화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공식은 현대·초현대적 혼돈 속에서 혼돈 그 나름의 질서를 찾고자하는 유럽 나름의 몸부림으로 디지털세대가 촛불을 통해, 또는 동학과 불교 등의 이치를 인터넷 문화와 결합함으로써 아날로그와 창조적으로 연대하는 길에서 반드시 예의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화 창조의 원칙이 될 것입니다.

갑오년 <집강소>의 세가 하늘을 찌를 때 그 초기에 나타난 '삼불입원칙(三不入原則)', 즉 양반은 못 들어온다(班不入), 부자는 못 들어온다(富不入), 선비는 못 들어온다(士不入)는 원칙이 후기에 와서 <집강소>의 정치 변혁이 극도로 생활화, 세속화, 섬세화하면서 그 구체적 기능을 가진 아전, 중인, 상인, 공인, 일부 지식인까지도 입도(入道)하게 된 것은 바로 집강 기능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서 초기의 <닫힘(閉)>과 후기의 <열림(開)> 사이의 정치기능의 역동성을 보여줌으로써 촛불과 동학개벽군의 미래운동에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개벽은 혼돈적 질서 즉 지극한 기운(至氣),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渾元之一氣)이 활동하는 그야말로 '혼돈적 질서'입니다.

동학당 여러분은 물론이지만 문명사의 대개벽, 전 인류 문명사의 대전환을 생활적, 생명적 가치를 지렛대로 하여 직접민주주의와 집단 지성의 상호 토론, 상호 동의를 통해 성취하고자 꿈꾸는 촛불이 이제 광장으로부터 촛불을 이동시키면서 생활과 생명 실천의 대안 운동을 구체화하려 할 때 부딪치게 되는 개체 상호 간의 활동적 기능과 그 역할 등을 합의하고 연대할 경우 포접의 원리와 함께 육임제를 제 나름으로 이 시대의 요구와 현실에 맞게끔 재평가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리 무가치한 일은 아닐 듯합니다. 동학의 생활적 생명 조직 특성에서 촛불의 앞으로의 '조직 없는 생활조직'의 역사적 경험을 한번 구해보십시오.

아무리 실제적이고 생활적인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집단 지성과의 살아 생동하는 유기적 관계에 있고 적어도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삶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개혁하려 한다면 이 문제는 그리 회피해 버릴 수 있는 귀찮은 일에 속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학당의 경우 개벽을 위한 자기개혁을 위해 이 문제를 아마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듯합니다.

여러분의 지금과 같은 침체는 개벽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천도교 창립 이후의 3.1운동 과정, 개화운동, 농민사의 소작쟁의, 민족민중문화 부활운동. 그러나 그 무엇보다 촛불 세대가 유심히 극복하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동학 역사의 키포인트는 손병희 선생의 부인이자 옛 명월관 기생이었던 주옥경 여사가 한국 최초로 창도한 부인회의 여성주부 운동과 손병희 선생의 사위인 방정환 선생이 창도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청소년 운동입니다. 촛불의 실질적 주체인 청소년과 여성, 주부들은 이 운동이 왜 키포인트가 되는 것인지, 이것이 앞으로 무엇을 의미하게 될 것인지를 한번 깊이 생각하고 토론해 보십시오. 그밖에 청년 남녀들의 민중 권익을 위한 생활정치 기구인 청우당 조직과 그 장구하고 치열한 생명정치 활동의 역사, 청우당 신·구파 분열의 사상사적 원인, 신간회 좌우 합작운동의 실질적 추진 과정의 활동 원리, 개벽지의 신문화운동의 생명사상과 신인간사상, 지도부 친일 경향과 김기전의 오심당(吾心黨) 지하유격전 준비운동, 해방 후 김기전, 이돈화, 조기간의 월북에 의한 북한 단정 반대운동 실패, 남한에서의 6.25 인민전선 참가 뒤의 대압박, 해방정국에서의 청우당의 이른바 제3노선 천명 등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철학적 원리 등도 근원적으로는 이상과 같은 포접과 육임제의 기본 생명사상 등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 연구 토의는 다음 기회에로, 혹은 다른 분들에게로 넘깁니다.

또한 개벽이 단순히 동학만이 아니라 마치 옛 포접시절처럼 이른바 실천 종교라고 하는 불교(화엄불교, 선불교)는 물론이고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까지도 일종의 종교 원탁평화회의로 열린 연대를 실천하며, 13개 개벽민족종교협의회와 실천적으로 연대하며 촛불로 다수 대중들과 생명운동 평화운동 속에서 연대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의 여러 실천운동 경험, 기독교의 경험, 원불교의 저축조합, 방언공사, 간척과 과수, 교육운동 등의 경험과 함께 십인일단(十人一團) 등의 조직 주체 형성원리 등을 여러모로 참고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잊지 말 것은 촛불의 기본 개벽원리를 제기한 김일부(金一夫) 정역(正易)의 십일일언(十一一言)과 십오일언(十五一言) 등의 '기위친정(꼬래비가 정치주체가 되는 대개벽ㆍ己位親政)'론과 함께 비폭력, 평화 개벽을 제시하고 생명운동을 통해 목숨을 구했던 강증산(姜甑山)의 전세계 모든 종교의 통일신단(統一神團) 위에 세계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세우는 개벽론, 남성이 여성에게 우주권력을 넘기는 '천지굿' 사상 등을 예의 검토해야 합니다. 뼈저리게 생각하고 계시다시피 동학 천도교의 역사는 1860년 이후 오늘날까지 백수십여 년 동안 참으로 끔찍한 고통과 탄압, 어둠과 그 어둠으로부터 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포복해나아가는 격동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한민족 근대의 거대한 한(恨)의 역사요, 서세동점(西勢東漸)과 함께 시작된 동아시아 문명의 붕괴과정, 그리고 극한 냉전의 식민지 체험과 분단, 민족상잔의 혹독한 전쟁, 독재와 산업화, 민주화와 민중저항의 역사, 시행착오와 좌·우익 실험의 길고 긴 실패의 역사로, 또한 생태계 파괴와 대오염, 온난화의 대 기후혼돈, 지구 지리의 대변동과 전염병 창궐(惡疾滿世 )과 원시반본(原始返本)의 후천개벽기를 뚫고 가는 새로운 문예부흥, 대규모 세계 문화대혁명의 위대한 '신명'의 역사입니다.

동학의 개벽운동은 이 역사를 관통하며 그 역사의 말과 뜻, 그 역사의 어두운 후퇴와 전진, 그 역사의 숨음과 드러남의 대굴곡을 자기 자신의 운명으로 일치시켜 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민족의 운명이라기보다 전 인류와 전 세계, 전 생명계와 전 지구사, 우주사였습니다.

오늘 촛불로 시작된 새 시대 새 민중의 생활 생명과 비폭력 평화의 새 민주주의 창조운동 역시 바로 이러한 대개벽운동의 밝고 어두운 희비교차의 역사와 일치될 운명을 예감시키고 있습니다.

해월 선생은 "우리 동학의 역사는 삼은삼현(三隱三顯)의 운명이다"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1860년 4월 5일 수운 선생의 득도 이후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나는 굴곡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굴곡은 바로 한민족 근대사의 굴곡에 그대로 일치하는 음양의 교차 과정인 점에서 오늘 촛불을 계기로 눈을 크게 부릅뜨고 촛불의 힘을 모아 주목해야 할 후천개벽사 생성의 법칙을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공부인 듯합니다.

1860년 수운 득도 이후의 <숨음(隱)>과 <드러남(顯)>의 이중 운동과 갑오년 당시 집강기능 중심의 닫힘(閉)>과 후기의 <열림(開>의 역동성을 오히려 법칙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실 수운 선생의 꿈을 통한 계시와 해월 선생이 해석한 육임제의 항구적 생명정치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좌파쪽 동학사 연구자들이 <삼불입(三不入)>을 계급혁명 원리로, 아전·중인 등의 입도를 혁명의 타락으로 해석하고 애써 그리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외래적 사관(예컨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론' 따위)에 의한 자의적 해석일 뿐인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그 보다 수십 년 전 해월의 예상 안에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앞으로의 젊은 주체들의 해석 방식에서는 해월의 육임제 설정의 법칙적, 원리적 의도 안에 들어있는 '혼돈적 질서(천지인과 음양 배합에 의한 <한>의 개벽을 위한 정치원리, 들뢰즈의 3축과 2축에 의한 혼돈에 빠져들어 가면서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 그 나름의 질서로서의 카오스모스 문화-그로부터 시작된 카오스 민중의 직접적 삶의 정치문화)'를 처음부터 자각적으로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동학의 남은 실현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864년 4월 5일에 동학은 수운에게 내린 계시 중 '태극궁궁(太極弓弓)의 영부(靈符)-혼돈적 질서'로부터 드러납니다만 1864년 수운 처형과 함께 지하로 숨어듭니다. 이것이 첫 번째 숨음입니다. 수운의 지시에 의해 멀리 도피하여 40년 지하활동을 통해 전국에 걸친 막강한 동학의 포접 세력이 보은취회 등을 통해 교조신원(수운 복권)을 위한 합법적 대중운동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첫 번째 드러남입니다.

그 뒤 갑오년 동학혁명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50만이 살육된 뒤 두 번째 숨음이 시작되고 해월은 잠적을 계속하다 체포 처형됩니다.

도통을 전수한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은 일본 망명, 지하에서 갑신개혁을 지휘하며 이와 연관, 노·일 전쟁 이후 귀국하여 합법적으로 천도교 창건을 선포함으로써 두 번째 드러남을 실현하며 이후 3.1운동과 주체적 개화, 개벽지 운동과 문화운동, 사회개혁 등 활발한 민족운동, 개벽운동을 진행하다 태평양전쟁 이후 해방과 함께 북한에서의 단정(單政) 반대운동 실패와 남한에서의 6.25전쟁 때 북조선의 통일 프로그램인 인민전선 참가로 인한 9.28 수복 후의 대탄압으로 거의 완전 궤멸 상태로 세 번째 숨음.

이제 55년여가 지나 동학은 세 번째 드러남, 완벽한 영원의 드러남 앞에 서 있습니다.

천도교의 노력에 따라 촛불은 세 번째 드러남, 즉 개벽의 때를 맞게 될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삼은삼현에서 나타난 역사법칙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 동학 철학의 기본 논리이고 수운 선생의 동아시아적, 창조적 진화론의 기본법칙이요 논리)'와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의 상호 교차 생성원리입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사상에서는 역(易)철학의 음양론이나 상생상극 일치론, 즉 생극론(生克論, 상생은 상극이고 상극은 상생이다. 닐스 보어의 이른바 '모든 반대되는 것은 상호보완적이다' 또는 루이스 멈포드의 '역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이 바로 태극이다'), 그리고 불법(佛法)의 색공론(色空論,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이나 중도론(가장자리도 아니고 가운데도 아니다)에 연속되고 있으며 최근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원수사랑' 또는 '죽음과 부활'에 의한 '사이와 초월(Between and Beyond)'론에 베르그송과 떼이야르, 샤르뎅의 '아니다. 그렇다'의 생명철학,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正反反의 논리)', 그리고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드러난 질서와 숨은 질서 사이의 교차생성, 드러난 질서에서의 아니다. 그렇다의 모순이 숨은 질서로부터 추동, 비판, 수정되다가 그 활력이 한계에 이르면 숨은 질서 자체가 드러난 질서로 현현(顯現)함으로써 기왕의 드러난 질서와 새로이 태어난 드러난 질서 사이의 관계 또한 아니다 그렇다의 관계로 발전하고 그 드러난 질서 밑에는 새로이 숨은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이중성의 생물학 원리, 데이비드 보올의 '내면 차원과 외면 차원, 내면 차원의 끊임 없는 유출, 물질화, 가시화 과정으로서의 물질적 외면 차원 사이의 유통'에 관한 새 물리학이론, 들뢰즈의 더블이론과 미셸 세르, 그리고는 드디어 컴퓨터의 '예스-노, 노-예스의 이진법, 온-오프, 오프-온의 안팎, 상하의 교차생성론'에 연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정반합의 변증법'을 넘어섭니다.

이 점이야말로 촛불과 개벽꾼들이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가장 중요한 새 철학이고 이 철학은 바로 새 시대를 이끌어 갈 생명철학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수운 선생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는 바로 이 진리를 압축한 새로운 진화론입니다. 1864년 체포, 처형되기 직전에 쓰신 것으로서 이후 떼이야르로부터 에리히 얀치에 이르는 서양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이 진화론의 철학을 실증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의 전 단계 또한 우리 사상사에 뚜렷이 실재함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전통 경락사상의 '복승(드러난 相生ㆍ相克 사이의 숨은 밑의 차원으로부터 솟아오는 復勝, 相生ㆍ相克의 전혀 새로운 관계)론'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원리를 따라 남은 삼현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보면 그로부터 첫 번째 숨음에 중앙의 왕정(王政) 권력 및 지방의 양반, 토호 권력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아니다 그렇다의 시비와 투쟁, 그리고는 숨음, 포접의 드러남과 동학혁명 폭발.

두 번째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국내 수구양반 문화나 선천문화 또는 매판 및 착취지주 세력과의 소작쟁의 등 아니다 그렇다 시비, 그리고는 동학 천도교 내부적으로는 신파 구파의 갈등과 연속된 좌우합작 신간회 이후 좌우 사회ㆍ자본 양 측의 끝없는 갈등인 아니다 그렇다. 해방 뒤에까지 계속되었고,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천도교 지도부 내에서까지도 친일영향과 오심당(吾心黨) 등 지하 항일 유격전쟁준비 당조직의 아니다 그렇다. 해방 이후는 소련 배경의 김일성 좌파와 미국 배경의 이승만 우파 사이, 그리고 민족통일을 위한 중도 통합지향과 좌우폭력지향의 악순환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

이후 남북 양쪽에서 세 번째의 거대한 숨음의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즉 드러난 차원과 숨은 차원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 그 숨은 차원과 과거의 드러난 차원 사이의 관계 역시 아니다 그렇다로 변화하는 이 끝없는 불연기연(不然其然)과 숨고 드러나는 은현(隱顯) 시대의 생성적 교차와 상생ㆍ상극의 복승(復勝)적인 역동은 결코 변증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곧 컴퓨터 논리와 똑같다는 바로 이 너무나 명백하여 숨길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사실에서부터 이제부터의 새 역사는 비로소 시작할 것입니다. 나는 오래 전 이 자리에서 천도교의 부흥은 교회 밖으로부터의 청년들의 개벽문화 운동의 자극을 받아 시작될 것이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나는 지난(7월) 12일과 오늘 19일에 이어 이제 강의를 모두 마치면서 새삼스럽게 확신합니다.

촛불은 형식과 차원을 달리하면서 동학의 개벽 역사와 더불어 영속할 것이라는 것을!

촛불은 또한 세계 도처로 퍼져 나가며 세계 문명사 전환기의 한 생활 원형, 루돌프 슈타이너가 예언한 이른바 '성배(聖杯)'를 제시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굳게굳게 확신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이제 반드시 화엄적 선불교와 새 시대의 새로운 창조적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필칭'화엄개벽'입니다. 실천 또한 그렇습니다.

이젠 내 가슴 속에도 한 작은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이 촛불은 참다운 '모심'이라는 것을 또한 확신합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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