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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6> '동학당 시인' 김지하의 결론

쟈코뱅은 프랑스 혁명 때 제 3신분 대표들이 자주 모였던 한 수도원 이름이었다고 한다. 당시 예수회의 한 수도승이던 아베 바루얼은 프랑스 혁명은 쟈코뱅의 핵심인사들의 범죄적 음모의 산물이라고 고발, 강변했다고 한다.

최근 촛불 또한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보수 신문이나 여당, 정부에 의해 파다하게 과장되어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다름아닌 '까쇠'다. '까쇠'와의 싸움은 투쟁이 아닌 '참선'이라고 이미 말했다. 참선은 혐오와 육욕, 어둠과 빛, 이승과 저승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악순환을 계속 노려보고 거리를 둠으로써 그것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새 차원으로 나가는 수련이기 때문이다. 촛불의 과정은 곧 참선이었다.
▲참선은 혐오와 육욕, 어둠과 빛, 이승과 저승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악순환을 계속 노려보고 거리를 둠으로써 그것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새 차원으로 나가는 수련이기 때문이다. 촛불의 과정은 곧 참선이었다. ⓒ뉴시스

경향신문 등은 최근 지식인들이 모여 '촛불과 레닌'이라는 주제로 '촛불을 레닌의 프롤레타리아적 직접민주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의와 주장을 나눴다는 소식을 전한다. 내용이나 의도가 어떻든 이 역시 '까쇠'에 불과하다. 아마도 이명박 정부와 보수신문은 '옳타구나!' 할 것이다.

그 직접민주주의 논의에서 조금은 선의와 호의가 끼어있다 할지라도 역시 갈 데 없는 탄압 원인 제공자요 악순환 유도기능이다. 극이 극을 부른다. 도대체 왜 이 마당에 레닌의 이론을 소리 높이 외치는가? 촛불이 공산주의 혁명론이라는 말인가?

직접민주주의는 레닌 따위 엉터리 혁명가(농민 착취와 '미르' 말살의 대가로 유럽 흉내의 산업노동자 양성의 신경제정책이 참다운 공산주의였던가? 반성해야 한다. 신경제정책은 그 아름다운 시인 에쎄닌을 자살로 몰아넣었다. 기억하라!)의 인용 없이도 얼마든지 건설할 수 있다. 화백의 기억만 가지고도 몇 날 몇 밤을 함께 논의하면 최고의 현대적 사이버 화백을 창조할 수 있다. 이미 촛불과 아고라의 경험과정에서 새로운 화백은 그 스스로의 독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도리어 '까쇠'의 악순환을 '중도적 참선'의 방식으로 끊어나가는 집단적 단(斷)에 의해 창조되는 아젠다 집중의 치열함과 유희의 자유와 상호 대화의 역동성을 기조로 새 시대의 영적 집단지성에 합당한 전혀 새로운 직접민주주의, 대의제와 결합하되 직접 쪽에 중심을 더 주는 '기우뚱한 균형' 실현으로 오히려 전원 일치합의를 더 강하게 이끌어가는 '선(禪)적 화백'의 전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충분하다.
▲ ⓒ프레시안

대중의 영적 귀향과 상황과 시대의 변전을 모르고 지식인들이 제 철밥통 값만 높이려 드는 건 레닌 아니라 레닌 할아버지라도 역시 파괴자, 난동자, 일종의 '까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 최고 원리인 창조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모여서 공부를 해야 한다. 촛불에는 레닌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례적 공부모임 예고가 있어 소개한다.

원불교 원서동(비원 옆) 은덕문화원 소태산 아카데미 2기 공부모임 9월 9일. 인터넷 촛불 젊은이, 여성, 지식인, 종교인들의 열린 모임. "촛불과 실천적 개벽운동" 등 일주일 간격으로 계속됨.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젊은 시인 이야기로 촛불을 생각하는 이 공부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한 시인은 함민복 시인인데 촛불집회에 참석, 6월 29일이던가 폭력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에 시위대에 포위된 전경 한 사람을 시위대를 설득하고 설득해서 풀어준 뒤 몇 걸음 못 가서 이번엔 전경들에게 포위된 채 몽둥이, 방패, 쇠파이프로 깨지고 찍히고 얻어맞아서 머리, 어깨와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입원 중이라 한다. 함 시인은 강화의 시골에서 가난한 흙집에 사는데 투명하고 아름다우며 따뜻한 사람의 시를 내내 써온 아름다운 시인이다. 주변의 젊은 문인들은 분노보다도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슬프다.

그러나 유쾌한 일도 있다. 역시 젊은 시인 김형수 씨 이야기다.

김형수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오랫동안 일해 온 자타가 공인하는 초과격파, 초강경파, 행동파 민족문학자다. 이제껏 절망으로부터 시작해 극한적 대결로 온몸을 바쳐 싸우는 것만을 올바른 운동으로 알았던 자기가 촛불 그 길바닥과 광장에서 웃음과 노래의 부드러움으로 일관하는 이 젊은 사람들의 비폭력적 행동에서 전엔 몰랐던 무한한 감동과 무궁한 지혜를 배운다고 했다.

나는 그가 이제까지와는 크게 다른 시를 쓰리란 예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 이전의 그 어떤 시나 행동이나 판단보다 훨씬 더 인간에게, 분단된 조국에, 그리고 세계에 커다란 기쁨과 평화를 주게 되리라는 강렬한 예감을 느낀다. 바로 이 예감, 이것이 촛불을 내내 생각해온 동학당 시인 김지하의 결론에 해당한다.

나는 연전에 디지털 문학 아카데미의 '아트 앤 스터디' 사무실에서 불가피한 나머지 대리 채팅을 한 적이 있다. 대리발신인데도 내 머리의 생각과 내 몸의 리듬이 말할 수 없이 신속하게 움직이며 번뜩 번뜩 빛나는 영감으로 가득 차는 것을 날카롭게 느꼈다.

젊은 네티즌들이 목 디스크나 신경장애로 고생하면서도 컴퓨터에 내내 달라붙어 장시간의 희열에 들떠있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또 내가 언젠가 약간의 조건 변화만 있다면 컴퓨터 앞에 앉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영감인데 이 영감이 다름 아닌 아까의 두 시인의 슬프고 즐거운 예감과 똑같은 것이다. 뒤를 이어 우스운 이야기 하나 또한 퍼뜩 지나간다.

북한의 저 유명한 김정일 위원장이 어느 날 가라사대 '컴맹은 모두 반동분자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으허허허허. 아마도 나는 오적을 위시해 젊은 시절에 쓰다가 버린 우스꽝스런 풍자시를 다시 쓰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또 퍼뜩 지난다. 이 역시 결론이다. 아! 수확이 참 많다. 나는 부자다.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

91. 유모차를 탄 아이에게 물대포를 쏘는 정부를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92. 민주 국가에서 다시 피 흘리며 국민 주권을 외쳐야 하는 나라로 퇴행시킨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93. 수구 보수 세력을 자비로 끌어안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94.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지 않는 대통령이 탄생하도록 제대로 주인 노릇을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95.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경찰의 몽둥이와 방패로 국민이 맞는 폭력적 공권력이 되도록 국민 주권을 방치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96. 모두 부자 만들어 준다는 말에 속아서 온갖 탈법을 저지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97. '식탁의 안전'이 위협 받는 지경에서야 공동체의 안녕을 묻게 된 세상을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98. '촛불'이 곧 보살이요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무자비한 공권력을 투입하게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99. 생명의 존엄을 위해 켜든 촛불을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아홉번째 절을 올립니다.

100. 이제는 우리들 일상의 삶이 촛불이 되어서 다시는 국민과 국민, 국민과 국가가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원하면서 백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1. 참으로 불제자로 사는 것은 밝음과 어둠, 참과 거짓을 다 뛰어넘는 것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2. 인간은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서 자율적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존엄성이 인정된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3. 인간중심주의가 지구 생명 공동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세번째 절을 올립니다.

104. 진정한 자유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5. 진정한 해탈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던져진 삶의 조건과 모순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계합시키는 것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6. 온 생명이 여래의 씨앗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7. 진정한 행복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한 세상 평화롭게 사는 데 있음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8. 물러섬이 없는 믿음으로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의 길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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