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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공공성을 넘어 우주적 공공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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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공공성을 넘어 우주적 공공성으로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4> '이명박 퇴진론'에 대해

나는 며칠 전 원불교 은덕문화원에서 공부 모임인 소태산 아카데미에 원장으로 참여해 첫 번째 공부 과정의 수료식 자리에서 9월 9일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공부 과제를 제안하는 자리에 있었다.

방향 문제에 대한 내 인사말에 대해 한 뉴미디어 경영자의 논평이 있었다.

"재미도 없고 너무 논리적이다."

예절을 잃은 말투였다.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지 않은가! 예전 같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악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즉석에서 마음 속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예전과는 크게 달라진 내 자신의 여유로움과 새로움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촛불의 영향이다. 분명 그 사람은 컴퓨터 전문가일 터이다. 재미와 논리 문제는 내 아들들로부터, 그리고 지난 번 기고문 '줄탁'의 반응으로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내 아들들은 내게 대놓고 말한다.

"아버지, 좀 쉽고 재미있게 쓰세요."

내겐 이제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에서부터 졸업 후 내내 열심히 읽고 쓰고 말하고 생각해온 방식들, 논리들, 실천 윤리들, 이른바 '아날로그'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어령 선생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하는 새 문화 출현의 가능성이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문화의 글로벌화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이어령 선생이 그것을 '디지로그'라는 언어로 개념화해주셨다. 디지로그 창조를 위해서 나는 먼저 반드시 디지털 문화를 배워야하는 것이다.

이제 환원주의적이거나 형식논리적이거나 변증론적인 낡은 논술과정과 내 코드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설득과정으로서의 코드를 극복해야 한다.

키워드와 키포인트, 촌철살인적인 메타포를 쉽고 속도감 있고 가능한 한 재미있게, 더 바란다면 쿨하게 쓰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쉽게 이뤄지겠는가? 분명 약속하는 것은 잘 되든 안 되든, 바로 이 글에서부터라도 그것을 애써 몸과 마음에 익숙해지게끔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또 한 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이어령 선생의 디지로그처럼 촛불과 디지털 세대, 그리고 나의 두 아들 역시 나와 같은 아날로그 세대에게서 도리어 거꾸로 배울 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희망사항일 뿐일는지 모르겠으나 새로운 문화와 문명의 대전환, 이른바 후천개벽(後天開闢)은 후천이 선천(先天), 즉 아날로그를 다 때려부수고 나서 홀로 우뚝 에펠탑처럼 높이 서는 것이 아니다.

역시 후천의 디지털을 중심으로 하긴 하되 그것을 기준으로 선천의 아날로그를 새로운 의미망 속에서 해체, 재구성해 선·후천을 결합시키는, 그야말로 디지로그가 참다운 후천개벽이자 전 인류문명사의 탁월한 대전환인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개벽을 내용으로 하는 문화요 새 세대에게 애정으로 다가가는 전환성 문화일 경우 너무나 당연한 얘기인 것이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촛불문화에는 좌우, 관민의 차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분명 있지만 세대 사이의 운명적 갈등과 반목, 상호 적대를 정당화하거나 민족과 민족, 문명과 문명의 충돌, 이른바 문명전쟁을 합법화하려는 어둠 지향의 사상흐름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다행이다.

우선 새로운 문화현상으로서의 촛불을 생각하고 살핌에 있어 확실한 결론은 없어도 큰 조짐만은 가득찼으니 그것은 곧 무엇일까?

이미 말했다. 양현아 교수의 발표 내용과 그에 관련한 불교 문건의 참고나 나의 논평, 보충설명 등을 통해 이미 지적했다.
▲ 연일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시청 앞 광장에서 본 청와대. ⓒ연합뉴스

평화 집회 직후 종교계의 수습안, 화해 제의를 정부는 매우 관료적이고 저급한 태도로 철저히 무시했다. 가장 말썽 많았던 강만수 장관을 유임시킴으로써 정부는 여야, 보수와 진보 등 일체 세력 전부를 상대로 고대 제왕과 같은 자세로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도리어 종교계의 스님과 신부, 목사들까지 좌익 반체제 인사로 몰아 처벌하겠다는 등 정치적 무뇌아(無腦兒) 수준의 공갈협박을 하고 있다.

대통령은 그 사이에도 부지런히 일본 도야코(洞爺湖)로 달려가 기후협약에 대해서는 내용도, 준비도, 정책입안 가능성도 없는 헛소리를 일관하면서 오로지 부시와 함께 체모를 잃은 멍텅구리 코믹 선전을 남발하고 있다. 그것이 도리어 도야코 방문 목적이었던 것 아니냐고들 비꼬는 판이다. 부시와 사진 찍으면 곧 국내 문제, 한미문제는 모두 다 끝난다는 것인가?

한심하다. 한미 간의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 창조의 파트너십 건설을 주장하는 나의 눈에까지도 이 모양이니 진짜 한심하다. 심지어 조그마한 초등학생까지 나서서 '어디 누가누가 이기나 밀고 당기고 한참 해볼까?'하는 상황이다. 만화 수준이다.

지난 주초에 대화아카데미는 여야, 언론, 종교, 재야인사와 광우병대책회의, 그리고 정치학 교수들 사이의 촛불 논의를 열었다. 정부가 위태롭다는 것이다.

한미, 한일, 남북, 한중 모두 다 악화되고 촛불만 아니라 국민 전부가 불복종과 협조거부, 무기력 상태로 가라앉고 있으며 이렇게 되면 필연코 이승만 말기의 최인규나 박정희 말기의 차지철과 같은 괴물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러니 종교계나 대책회의와 정부가 빨리 타협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인데 종교계나 대책회의 측은 정부가 일체 불응하고 있으며 오만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정치기능 정지상태 같다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전면적인 정치력 실종상태다. 그러나 긴 토의 과정에서 내가 뼈아프게 느낀 것은 촛불은 지나간 시절 민주화운동과정에서의 정치경제적 구조문제로 서구 사회과학적 도식으로만 이해하고 분석해오던 그 자연과 도덕의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을 전혀 못 넘어섰으니 프리드리히 실러가 <인간의 미적 교양에 관한 서한>에서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유희와 예술, 제의와 명상의 우주적 공공성의 차원으로부터 시작하는 촛불의 생활 정치적이고 문화적, 문명사적인 새로운 소통 구조와 직접민주주의 등 새로운 정치철학, 새로운 생명경제와 새로운 주체 세대, 새로운 전술과 연결돼 있다는 단 일말의 의혹이나 호기심도 전무하다는 그 한계였다.

그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나와 한 스님이 그런 여러 가지 이해 안 된 측면에 대해 누누이 강조 설명했음에도 아직은 절벽이었다. 이미 지식인, 정치인 사회 전체가 애당초부터 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없었다는 짐작이 갔다. 결론이 나왔다.

이명박 정권 퇴진 요구는 반대라는 것이다. 퇴진 요구나 퇴진 과정은 더 악성적인 극우 권위주의적 전횡 집단 등장에 빌미를 주며 또 그것은 극좌의 폭력적 탈권 움직임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거기엔 찬성이었다.
▲ 폭우 속 행진을 이어가는 시민들. ⓒ뉴시스

이 정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고 법과 정부와 사회를 서서히 고치고 바꾸어야 하는데 그 주체는 양쪽의 '까쇠'들이 아니라 오히려 촛불이어야 하는 바, 이들을 대승적 차원에서 협상대상으로 인정해야 할 정부가 이들의 수습안을 옹졸하게도 철저히 묵살해버리니 대책회의 내에서 강경-온건 논쟁이 진행 중이지만 별 희망도 없다는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해도 국민 저항은 장기화되고 경제든 뭐든 별 대책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종교계 쪽은 누구나 현 정부를 철저히 불신했다.

오늘(10일) 날짜 신문은 전한다. "경제 전문가들 강만수 호 진단- 강만수 경제팀 위기 대처 능력 없다. 68%- 여기에 대한 이 대통령의 답은 '강만수 장관 안 바꾼다'로 나왔다. 누군가 속삭인다. '그 사람은 앞에서 공격하면 절대 안 듣는다. 살며시 부드럽게 타이르면 받아들인다.' 그래 그게 맞는 말인가 보다. 대통령 오늘 메뉴가 미국산 쇠고기라고 신문이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뒤 촛불은 어찌되었나? 일주일 간격의 유동적 촛불집회를 연다는 결정으로 후퇴했으며 일종의 게릴라전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그것을 '촛불 좀비'라고 호칭했다. 어떤 영화에서처럼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손을 들고 일어서고 또 일어서 통통 병신처럼 두 손을 앞에 내놓고 통통통 뛰어 다니는 처치 곤란한 송장들 말이다. 아마도 그들의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비타협 게릴라전의 특징을 상징하여 '좀비'라 부르는가 보다.

나는 긴 한숨과 함께 그들의 대응전술을 슬픈 웃음 속에서 이해했다.

고집불통의 무능정권에 대한 저항은 '좀비'뿐일는지도 모른다. '좀비'의 어두운 그늘은 또 다시 정감록 류의 으시시한 괴담을 낳고 있다.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완전 불능화하는 흉흉하고 불길한 상황이 9월 중에 나타나리라는 이야기가 서서히 터지고 있다고 한다. 여주와 광주 사이에 피가 백리를 흐르고 수당간에 밤에 괴이한 배가 천 척이 정박하고 북방에 밤마다 원한에 가득한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찢고 어디에서 어디까지의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완전히 끊어진다는 그 음산한 정감록 류의 바로 그런 밤의 상태인가? 젊은 사람들, 특히 예민한 여성들과 쓸쓸하고 외로운 '좀비'의 이러한 이미지가 퍼지는 것은 상징이 아닐까? 문학적 표현이 아닐까?

'좀비'는 현실적으로는 생명소비자운동이나 불매운동 등의 '수동적 적극성' 즉 이른바 수동성 속에서 도리어 적극적 효과를 산출해 내는 '쏠라 패시브(solar passive) 운동' 즉 햇빛이 비추는 방향으로 움직이되 그것이 햇빛인 점에서 도리어 역설적으로 힘을 얻는 전술, 나의 미학적 메타포로는 '흰 그늘'이니 어두운 중력의 발효과정에서 오히려 초월의 흰 빛이 배어 나오는 음양상생의 전술. 19세기 김일부의 정역(正易)에서는 '여율(呂律)'이라고 부르는 개념인데 '여(呂)'는 어둠, 혼돈, 여성성이요 수동성이며 지는 척 하는 것이고 '율(律)'은 밝음, 질서, 남성성이요, 적극성이며 반전해 나가는 것이니 일종의 '카오스모스(chaosmos)' 즉, '혼돈적 질서'의 일종이라 하겠다. 이것이 '촛불좀비'인가? 내 입가에, 가슴에 또 다시 슬픈 웃음이 일어난다.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

55. 만원 버스 속에서 바로 옆의 이웃을 편안하게 해 주려는 마음을 낼 때 비로소 인간다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56. 세상의 모든 법은 인권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을 잊을 때, 법은 국가 폭력의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57. 국가의 존립 근거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58. 물과 바람과 햇빛과 같이 진정 소중한 것을 그저 얻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잊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가 탐욕의 포로가 된 허물을 참회하며 쉰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59. 부처님께서 '나'를 부정하라고 하신 가르침은 나 아닌 다른 중생의 고통을 더욱 크게 받아들이라고 한 것이었음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쉰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60.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것, 이것이야말로 방생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 번째 절을 올립니다.

61. 도가 무너지는 것보다 돈이 줄어드는 것을 더 걱정한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62. 세상의 폭력과 무질서가 우리들 내면의 반영이라는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두번째 절을 올립니다.

63.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기에는 법률과 제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64. '자비로움'이 열반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65. 중생의 행복을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보살의 책무임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6. 진정한 승리는 승리와 패배마저도 초월하는 데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7. 패자의 증오를 낳지 않는 승리,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비폭력의 힘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68. 평화적 저항이라는 것은 압제자로 하여금 폭력을 사용하게 할 생각마저 내지 않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69. 만일 사람 사이에 높낮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재산이나 신분이 아니라 사람의 품성에서 비롯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예순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70. 큰 바다의 물이 똑 같이 짠 것처럼 부처님의 법은 무욕으로 그 맛을 삼는다는 가르침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71. 하루하루의 삶에 힘겨워하는 서민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땀이야말로 이 시대가 만들어 낸 '가난한 여인의 등불'임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72. '무소유'를 말하면서도 아직도 이 땅에 결식아동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일흔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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