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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들은 진짜 개벽을 이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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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들은 진짜 개벽을 이룰 것 같다"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2>

촛불, 생명과 평화의 길

촛불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무엇일가? 우선 엉터리로라도 대충 때려잡아 본다. 한 가지 공부 방식이다. 내용과 형식으로 나눠본다면 그 내용은 쇠고기, 대운하, 의료 등 '생명'이고 그 형식은 비폭력, 불복종, 비타협, 무저항, 유머와 여유, 춤과 노래, 미소의 부드러움 등 '평화'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껏 10년 가까이 애써 걸어왔던 '생명과 평화의 길'과 같은 것 아닌가!

그야말로 '아전인수'다. 젊은이들과 여성들의 비웃는 손가락질이 보이는 듯해 문득 얼굴을 붉히고 고개 숙인 채 오늘(10일) 아침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성난 농심 4만 명 '우리도 촛불'" 기사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그 기사에 '불교계 매주 시국법회'란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마지막 구절이다.

"30일에는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불거진 생명담론과 촛불문화의 평화담론을 주제로 스님과 신도들이 모여 토론하는 '제1회 대중공사'를 열기로 했다"

후유~ 파렴치한 아전인수만은 모면했구나! 겨우 안심한 뒤 생각을 계속한다. 나는 그 동안 디지털 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자 기웃기웃 컴퓨터 노트북을 어깨 너머 귀동냥하거나 내 두 아들은 물론 그 방면 마니아들과 어울려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해 왔다.

그에 도움되는 책도 구입했다. 예전에 읽은 네그로폰테의 '디지털 되기' 이후 결정적인 책이라는 클레이 시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와 제임스 서로위키의 '대중의 지혜' 등이다. 시키의 책 맨 앞장에 있는 말이다.

"사회를 장악하던 권력의 힘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 힘은 이동하고 흩어지는 반면 대중은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다"

2002년 6월 한 달 내내 월드컵 축구응원단 붉은 악마들은 연 동원인원 700만을 마크하면서도 단 한 건의 폭력, 단 한 마디의 인종적 편견, 단 한 번의 서구 선진국에 대한 저자세, 한국팀 패배의 경우 단 한 건의 훌리건 따위 깡통이나 빈 술병을 던지는 등 부작용 없이 한국에 대한 터키의 승리를 도리어 화려한 카드 섹션으로 '아시아의 자존심'이라고 추켜세우고 저녁엔 모두 나서서 길거리의 휴지와 쓰레기를 청소하였다. 촛불문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이 딱히 우리나라만의 사태는 아니다. 1999년 씨애틀의 WTO(세계무역기구) 반대 시위 양상이 이것과 매우 닮은 점이 있었다. 두 사태의 특징은 주도자도 조직도 동원체제도 없는 그야말로 자발적인 '개체-융합(identity-fusion)'에 의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였다.

2002년 겨울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 때의 촛불 역시 그 형성과정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때 반미폭력 시위자들이 중간에 끼어들어 부시 허수아비 화형식에다 미 대사관 습격 시도 등이 일어났고 촛불의 한 참가자였던 김기보는 인터뷰에서 "촛불은 반미가 아니다. 촛불은 영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폭력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촛불을 끈 수많은 소년소녀들과 청년들, 주부들은 광장을 떠나버렸다. 남아서 계속 소란을 부린 것은 이른바 '꾼'들. 내 용어로는 '까쇠(폭력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 까부수고 까불고 까발리는 쇠(마당쇠 할 때의 그 쇠))들' 뿐이었다.

이번 촛불에서도 거의 똑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은 크게 다르다. 비폭력, 평화를 앞세운 종교계, 천주교사제단과 NCC의 평화애호 기독교 목사들, 불교승가회 스님들, 원불교의 여자교무들이 대규모 참가했다. 사태는 역전되었고 촛불은 당당하게 그 정당성과 합법성과 그 역사적인 대문명전환운동의 명분과 격조를 인정받았다.

자발적인 개체-융합에 의한 자기조직화

그 시작인 2002년 6월의 붉은 악마의 경우 수많은 지식인들이 제 멋대로 떠들어댔었다.

"나치스 냄새가 난다"
"파시즘의 시작이다"
"집단 히스테리다"
"일회적이다. 한 번 저러다 말 것이다"

이리 떠들다 그 판단이 여지없는 잘못임이 드러나자 입을 꽉 다물고 나서 그 엄청난 사건의 사회과학적, 문화문명사적, 철학적, 정치적 의의를 구명하는 일을 일체 직무유기했다. 지식인의 현실회피다. 5, 6년 안에 단 한 편의 논문이 나왔을 뿐이고 전북대학 한 교수의 소책자 한 권이 전부다. 그마저도 단견과 오류로 가득하다.

원인이 무엇일까? 촛불을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촛불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간혹 변증법을 포함한 낡은 환원주의적 논거나 방법으로 그 인식과 해명을 시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과학문화연구소의 이인식 박사 왈(曰),

"그 따위 낡아빠진 논리로는 어림없다. 단 한 치도 접근 못한다"
"자발적, 우발적인 개체-융합에 의한 자기조직화의 새로운 진화론을 모르면 이해 못한다"

라고 못을 밖았다.

자연선택과 집체주의적 진화론인 다위니즘을 깨고 나온 새 시대의 '자유의 진화론' '자기선택의 진화론'으로밖엔 설명 안 된다는 것이다.
▲ 2002년 월드컵 붉은악마들 ⓒ연합뉴스

'지금 여기'를 풍족히 하는 현실적 개벽

또 이런 일도 있다. 어떤 이들은 붉은 악마의 도깨비 로고의 주인공 '치우(蚩尤)' 신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머지 저마다 걸쳐 입은 붉은 셔츠의 빛깔과 셔츠 가슴팍에 새겨진 글씨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만을 두고 6.25 전쟁 이래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적색콤플렉스'의 청산이라고 넘겨짚는가 하면, 반대로 마치 지금의 이명박 정권이나 보수 언론들처럼 빨갱이 집단 따위로 몰아 때려잡거나 모략중상의 대상쯤으로 낮춰 보려고 했다. 이것이 한국 지식인, 문화인들의 무지와 무식의 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4000여 년 전 고조선 이전의 배달국 14대 천왕이었던 치우는 당시 중국 화하족의 황제(黃帝)가 중앙아시아나 북방, 그리고 3000년 전부터 이미 시작된 대인류이동인 '몽골리안 루트'라는 문명사적 연속선을 끊고 남방계의 농업정착문명 일변도로 유일체제화하려는 시도에 맞서 유목-농경의 복합문명(이것은 현대사회의 복합적 문명전망과 연결된다)을 세우려는 주변 아시아 여기저기의 부족연맹체 추장으로서 74회의 피비린 문명전쟁을 수행하는 전쟁의 신으로 젊은이들이 그의 로고를 앞세운 것은 서양 세계의 군신(군신) '마르스'의 이미지와 흡사한 점에도 그 까닭이 있으나 그에 연결된 세계의 문명 즉 유목-농경적인 이동과 정착 양면 복합의 이중문명에 대한 집단적 예언 기능의 수행이었던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집단적 예언 기능에 대한 나의 견해(여러 해 전에 이미 출간된 나의 책, '화두' - 붉은 악마와 촛불-)가 올해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계속 지식인들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는 '집단지성'과 연관시켜 인식할 때에만 납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집단지성'은 곧 화엄적 선(禪)불교 사상을 통해 '집단적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에 연결되어야 비로소 화안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기에 대한 이해는 2002년에는 물론 캄캄했고 지금에서나 정부 여당과 진보주의자들의 야당,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서도 여전히 캄캄하다. 그렇기 때문에 붉은 악마와 촛불에 대한 지식인들의 긍정적인 평가들도 대개가 촛불이 주장하는 직접민주주의나 정치 아젠다 중심의 정치적인 이해가 대부분이거나 문화에 대해서도 그저 서구 68혁명을 모델로 하여 이해되고 긍정되는 문화혁명 수준에 불과하다. 그들은 도리어 나처럼 이해하는 태도를 바로 망상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정도다.

촛불에 프랑스 68 문화혁명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촛불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더 넓고 더 거대한 문명사 전체의 대전환과 직결돼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것은 '지금, 여기' 현실에서 실제로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 쇠고기나 물, 의료보험이나 매일 매일의 교육 문제에 구체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집단지성과 구체적 생활주체인 개체들의 정당한 관계다.

집단지성은 미래지향의 선형적(線形的) 목적론적 역사주의가 아니라 한다. 순환도 아니지만 목표는 비록 낮은 차원, 제한된 범위 안에서라도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서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확충적 현실지향이니 오늘의 밥 한 끼, 오늘의 고기 한 점, 오늘의 생태적 쾌적함과 오늘의 건강이 중요하므로 오늘의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고 '지금 여기'를 풍족히 하는 현실적 개벽이라 한다. 듣던 중 가장 마음에 들고 좋은 이야기다. 아마도 이들은 진짜 개벽을 이룰 것 같다.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

19. 바른 행동이 바른 생각의 그릇임을 투철히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열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20.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모든 생명과 세상에 대한 공경임을 망각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무 번째 절을 올립니다.

21.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정진이라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22. 한 순간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 진리의 길이라는 걸 무겁게 받아 지니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23.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삶에서 마음의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진정한 닦음임을 사무치게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24. 산다는 것은 다른 생명에 기대고 빚지는 일임을 잊어버리고 산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25. 합법적인 방법이어도 남의 몫을 남겨 두지 않는 탐욕이야말로 도둑질임을 자각하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26. 소중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딴 생각을 품는 것이야말로 음행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27. 바른 말을 해야 할 때 바른 말을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큰 거짓말임을 깨닫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28. 몸의 즐거움에 탐착하여 술에 빠지고 감내해야 할 의무를 피하여 술잔 속에 숨어버린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29. 몸을 꾸미는 것으로 사특한 마음을 가리려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30.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를 내버려 둔 채 향락에 빠진 것을 풍류라고 착각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 번째 절을 올립니다.

31. 꾸민 행동과 그럴듯한 말로 타인으로부터 존경받으려 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32.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고 먹을 때 먹고 자야 할 때 자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33. 지나친 소비로 미래의 아들딸에게 고통을 짊어지게 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34. 이웃의 아픔에 눈 감은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35. 거친 말로 이웃에 상처를 준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36. 이웃에 베푸는 것이 진정 나를 돕는 일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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