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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본 KBS 문제와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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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안에서 본 KBS 문제와 촛불집회

[창비주간논평]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지켜준다면

촛불이 시청에서 여의도로 막 옮겨붙은 직후, KBS 기자가 쓴 한편의 글이 아고라에 실렸다. "요 며칠, KBS에 들어온 뒤 가장 부끄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이 글은, 진솔한 어조로 KBS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KBS를 위한 촛불을 조금만 더 켜달라"는 읍소로 끝을 맺는다. 글은 순식간에 온라인 공간으로 퍼져나갔고, 이 글을 통해서 국민들은 KBS가 구성원들간의 갈등으로 격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음을 개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하게 보면 KBS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권력 교체기에 어느 집단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적어도 4년여에 걸쳐서 이어져온 문제인 만큼 사뭇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이명박정권이 온갖 불법,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커졌고 그 결과로 수면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세력들까지 죄다 모습을 드러내면서, 각축하는 각 주체들의 주장과 움직임이 더욱 또렷해졌다는 점이다.
  
  2003년 4월 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KBS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팀제로의 조직개편이다. 팀제가 도입되면서 1,800여개에 달하던 간부의 직위 중 무려 1,100여개가 사라졌다. 연공서열식 위계질서가 해체되면서 조직은 훨씬 수평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었지만 부작용도 심각했다. 가장 큰 문제는 졸지에 보직을 잃고 현업으로 돌아간 전직 간부들의 불만이었다. 여기에다 다음해인 2004년에 600억원의 적자가 발생했고, 12월의 제10대 노동조합 선거에서는 '정 사장 반대'를 기치로 내건 후보가 당선된다.
  
  '反정연주'만을 외치는 KBS 노조 집행부
  
  정사장에 반대하는 노동조합의 탄생은 사내 불만세력(전직 간부 중심)들에게는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고, 이들 중 일부는 회사와 법정공방까지 벌인 끝에 마침내 '공정방송노조'라는 제2의 노동조합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공정방송노조의 조합원 수는 미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핵심 간부가 한나라당과 끈끈하게 유착되어 있는데다가 주된 활동방식이 '조중동'과 연계해서 정 사장을 공격한다는 점 때문에 늘 KBS 전체를 흔드는 요인이 되어왔다.
  
  국민들이 '어용노조', '뉴라이트노조'라고 부르는 현 11대 박승규 집행부는 2007년 1월에 출범했다. 현 집행부는 반(反)정연주라는 점에서 이전 집행부의 연장으로 볼 수 있지만 목소리와 태도는 훨씬 강경하고 분명하다. 여기에는 한나라당의 집권이라는 외적 요인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하고 있다. 물론 현 집행부는 자신들을 한나라당과 연계하는 시각이 불쾌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수많은 정황적 증거들이 드러나 있는 만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KBS 내부에서 현 집행부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판단의 기준이 전혀 가치지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부언하자면 언론사 노조로서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나 도덕적 기준보다는 특정한 당파성이 집행부를 관통하고 있다. 즉 정연주라는 구체적인 대상에 집착하면서 오직 '친정/반정'의 프레임 안에서만 선악을 판단하다 보니까 정작 더 중요한 가치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예를 든다면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대해서는 언론중재위에 조정신청을 하는 등 법적으로 대응하면서도 그보다 더한 조·중·동의 악의적인 보도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아주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 또 KBS 이사회의 '보도본부장 인책' 시도 같은 언론자유와 밀접한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정 사장과 관련해서는 아주 작은 잘못조차 모두 비판의 도마에 올린다는 점 등이다.
  
  심지어 KBS 앞에서 벌어지는 촛불집회와 보수단체들의 농성을 두고도, 가스통을 매달고 KBS로의 돌진을 시도한 보수단체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반대로 촛불집회 국민들과는 별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 전국언론노조에 당연히 납부해야 하는 조합비도 '납부하라'는 내·외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1년 가까이 납부하지 않고 버티다가, 최근에는 언론노조와 정상화에 합의했음에도 6월 24일 현재까지 납부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명박정권의 언론장악 기도에 대응하기 위한 외부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에도 사실상 결합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가 최근 사내에서는 정체가 불확실한(마치 급조된 듯한) ㅇㅇ모임, ㅇㅇ 일동의 이름을 가진 주체들이 갑자기 나타나 집행부와 사실상 한목소리를 내면서, 집행부와 다른 입장을 가진 PD협회와 기자협회를 집중 타격하고 있는데, 주로 동원되는 단어가 "정연주 추종 세력", "정치적으로 편향된" 등의 말들이다. 특히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광고를 낸 PD협회에 대한 공격은 더 집요해, 사실상 분열까지 시도하고 있다.
  
  다수 조합원은 '공영방송 지키기'를 요구한다
  
  명분에서든 실천가능성에서든 이들의 주장이 공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지난 6월 17일, KBS 내 기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미디어리서치 의뢰) 결과가 입증한다. 이 조사에서 집행부의 노선에 동의하는 주장(정사장 퇴진)이 37.8%, 반대 주장(공영방송 지키기)이 53.9%의 지지를 얻었다. 집행부는 내외적으로 KBS 전체 구성원의 80%가 정사장 퇴진에 동의한다고 줄곧 선전해왔지만, 지금 이런 주장을 믿는 내부 구성원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법적 기구인 노동조합이 중심에서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고, 그 힘이 여타 기회주의 세력들이 활동하는 데 보호막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은, 지금 상황에서는 정사장을 지키는 것이 권력의 방송장악 음모에 맞서는 것이라고 믿는 많은 구성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아고라에 글을 올린 기자가 "부끄러움", "무력감"을 드러내면서 "더 많은 촛불"을 호소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KBS 문제를 이해하는 데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요인으로는 정사장 후임으로 KBS 출신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30여년을 근무하면서 내부에 적지 않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사장이 올 경우, 그가 낙하산이든 아니든 구성원들의 갈등은 지금보다 더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사장을 밀어내려는 내부의 움직임이 중단되기 어렵다는 것이다다. 특히 현 집행부가 있는 한은 더 그럴 것이다.
  
  지금 방송통신위원회에서부터 국세청, 감사원, 검찰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모든 손들이 KBS를 깊숙이 더듬고 있다. 정권이 언제 교체됐는데 아직 KBS만은 접수하지 못했다고 보는 탓이다. 그들의 눈에 공영방송 사장 자리는 챙겨야 할 전리품에 불과하고, 따라서 법으로 보장된 임기(2009년 11월)조차 하찮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KBS를 도구화해서 세상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개조하는 것이지만, 이는 상식에 대한 무모한 도발일 뿐이다.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남아 KBS를 지켜준다면
  
  분노한 국민들은 여의도에서 매일 밤 촛불을 밝히고 있다. 국민들은 우리에게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키고, 공영방송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안에서 잘 싸우라"며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것이다. 촛불의 응원은 나름 성과를 내고 있다. 조합이 정사장 퇴진 투쟁을 잠시 접고 '차기 사장 선임을 위한 제도 만들기'에 나서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차기 사장 선임절차를 논의하는 것도 결국 정사장의 임기내 퇴진을 전제한 것이므로 큰 의미는 없다. 오히려 현 집행부가 줄곧 견지해온 행태를 놓고 볼 때, 지금의 후퇴는 정사장을 목표로 현재 진행되는 감사원 감사와 국세청, 검찰의 조사를 '일단 지켜보자'는 시간 벌기의 의미가 더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KBS 앞에서는 촛불집회와 보수단체들이 충돌하는 살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6월 23일에는 아고라를 대표해 1인시위를 하던 한 여성이 보수단체들의 폭행으로 크게 부상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KBS는 이런 국민들의 응원과 희생에 부응할 만큼 충분하게 내부역량을 결집해내지 못하고 있고, 단기간에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나 역시 부끄럽고 무력감을 느낀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개인적으로 그나마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정사장에 대한 직원들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정사장이 최소한 올해말까지는 버텨주고, 그 상태에서 오는 12월에 제12대 노동조합 정·부위원장 선거를 치르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언론독립과 공영방송 사수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내는 후보를 선택할 수 있고, 새로운 노조를 중심으로 내부단결이 가능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까지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남아서 KBS를 지켜준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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