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한 시민, 연장을 들다
잠에서 깨어난 이른 아침, 시위에 나간 친구로부터 폭력시위의 참맛을 보았다는 괴상한 문자가 와 있었다. 무슨 소리인고 해서 자세히 들어보니 어제 새벽녘 드디어 '쇠파이프'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쇠파이프와 각목같은 '시위용' 무기부터 케찹, 계란, 음식물 쓰레기같은 '주방용(?)' 무기까지.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새벽녘 시위의 양상은 '폭력경찰'이라는 구호가 정말 무력하게 설득력없이 울려 퍼진 시위였다고 한다. 비록 '연장'을 든 시민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비폭력'을 외치며 제지하려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지만, 말리던 분들은 '청와대에 오늘 꼭 가야 된다는' 분들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딱히 전경들의 도발이 있었던 상황이라 보기도 힘들다고 한다. 과잉진압에 대한 부정적 여론으로 인해 몸을 사리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쇠파이프의 귀환'에 대해서 반가워할 사람들의 얼굴이 벌써 아른거린다. 조중동이며, 사태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이들은 '거봐, 내 말 맞지'하며 마치 시위 초기부터 분별과 균형감을 갖추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양 행세할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핑계거리를 찾아다닐 뿐이다. 마침 좋은 껀덕지가 생겼으니 잔치만 벌이면 된다.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떡밥이 드디어 등장했다. 전경 부상자 소식도 이제 슬슬 인터넷 기사에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시위의 폭력적인 양상을 마냥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국가가 행사하면 질서 유지고, 시민이 행사하면 난동이라는 데에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떤 분은 "백 만 명이 모여도 청와대를 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냐" 하시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한다. 정말 청와대로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며 간다 한들 거기에 따르는 시민들과 전경들의 고통을 보상해 줄만한 확답을 MB가 제시해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 갑갑한 마음만큼은 심히 공감이 간다.
십 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MB는 반대파와의 대화에 나서긴커녕 종교인들로부터 위안을 구하고 있다. 미 대통령과의 사적인 전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목은 마치 이제는 '인맥과시'처럼 느껴진다. 격한 시민들의 갑갑한 마음, 십분 공감된다. 하지만 거듭 말하건데 폭력을 마냥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폭력을 무작정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폭력 그 자체만큼이나 무용한 불평이나 위선이라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진지하게 사태의 진일보를 고민한다면 폭력이 나올 수밖에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 메커니즘을 강구해야 한다.
출구를 잃은 채 쌓여만가는 불만과 대규목 폭력 사태의 위험
미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했던 시위가 점차 교육 문제, 공공부문 민영화 문제로 번져나가면서 대통령 퇴진까지 요구되고 있다. 시민들의 요구는 점점 노골적으로 확산되어 나오고 이에 대한 충동은 점점 강렬해지고 있다. 헌데 이를 '목소리'로 담아내 정치권과 현실에 반영할 매개 기구는 부재하다. 정당 시스템이 망한 지는 옛날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언하고 이에 대해 책임을 지는 '당파적' 정치인은 거의 사라지고 권력의 냄새를 쫓는 대머리독수리들만이 국회의사당을 맴돌고 있다. 그래서 시민들은 직접 거리에 나왔지만 현실이 좀 움직이는 '낌새'라도 보여주지 않는 한 이렇게 충동을 풀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대화와 비폭력으로 문제를 풀어야 된다 하지만 일체의 희생없이 온건한 방식으로 정권의 양보를 얻어낸 역사적 경험을 가지지 못한 한국의 시민들에게는 고리타분한 탁상공론처럼 들릴 뿐이다. 이명박 정부도 기본적인 입장은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렇게 꽉꽉 막힌 상황에서 불만과 충동만 강렬해지고 있다. 쌓이고 쌓인 것들이 터졌을 때,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정말 크나큰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거기에서 누가 무엇을 성취하건 간에 그 과정에서 시민들과 징집된 전경들이 당하게 될 고통은 과연 보상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배후가 필요하다
대규모 폭력 사태를 막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은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의식과 이성보다는 욕망과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여기에 대고 '분별있게 행동하라'거나 '시민의식을 지켜라' 같은 경고는 씨알도 안 먹힌다. 시위대 앞에서 경찰들의 무력한 경고는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사람들은 말이 떨어지면 그에 맞춰 움직이는 당구공이 아니다.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최선책은 시민들의 요구를 국정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키는 정부의 양보다.
하지만 차선책도 있다. 사람들의 끓어오르는 충동을 받아낼 '배후'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배후란 특정 집단이나 개인같은 구체적 실체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추상적으로 '이길 준비(허지웅)'를 가리킨다. 배후는 하나일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활동가가 주도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운동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시민이 주도할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람들의 강렬한 광기를 소모성 폭력이 아닌 건설적인 방향으로 배치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과감한 행동이 필요한 때에는 망설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불필요한 폭력은 최소화하면서 시민을 위해 정부로부터 받아낼 몫은 다 받아낼 '배후'가 필요하다. 운동의 방향을 전환시킬 특정 행동이어도 좋다. 특정 이념과 사상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시민들로 하여금 논쟁을 계속하게끔 하고 거기서 나온 목소리들을 온전하게 담아내 경직된 사회의 틈바구니에 차곡차곡 끼워넣어 결국 상상도 못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그런 '배후'가 필요하다. 이렇게 어려운 배후, 누가 해낼 수 있을까?
정권은 배후가 없는 걸 모르는 걸까? 없다고 믿고 싶은 걸까?
대규모 폭력 사태는 섣불리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정부가 조만간 양보할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배후'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그 누가 '배후'를 자임'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는 스스로 '배후를 만들어야 한다.' 분열을 두려워하지 말고 광장에서의 끊임없는 논쟁을 통해서 문제의식을 가다듬고 우리가 무얼 원하는지 차분히 되돌아보아야 한다. 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청와대 침입이 아니라, 지금의 운동이 감정의 폭발에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날카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예리하게 그들 앞에 맞서는 것이다.
배후가 없다는 걸 '모르는 척'하면서 배후가 마치 있어야만 한다는 듯이 강박증세를 보이는 정권의 태도는 이제는 멍청하다기보다는 마치 '배후같은 건 정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파 빨갱이 공작원'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MB정권은 정말 시대착오적이어서 모르는 것일까? 만약 이런 추측이 맞다면 그들은 막상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배후가 나타난다면 심하게 당황할 것이다. 그럴싸한 배후가 탄생하는 순간, 그 때 사태는 더 이상 역전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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