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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인가, 독재정치인가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44>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⑤

혁명기의 정치와 자유

프랑스 혁명은 보통 근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처음 확립한 혁명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처음으로 헌법이 만들어지고 대중적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 인권선언'을 통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등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자연권이 선언되었다.

그래서 혁명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근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이 당시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또 선거가 당시의 정치과정에서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혁명의 절정기를 공포정치시기로 보고 본다. 폭력적이기는 하나 완고한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정상적인 과정에서 이탈한 시기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럼에도 혁명 전체에는 우호적이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혁명이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자유주의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초기의 온건한 시기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는 미국학자 케이트 베이커에 의해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그는 퓌레의 견해를 받아들여 루소의 일반의지론이 혁명적인 자코뱅주의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를 면밀하게 추적했다.

루소는 1762년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일반의지란 국민의 전체적인 복지를 가장 잘 아는 의지이다. 그런데 만약 소수파의 사람이 국민 전체의 의지에 반대되는 생각을 할 때는 어떻게 할까.

루소는 이 경우 소수파가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다수 시민들의 의견에 굴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원리는 민주주의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소수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일반의지론을 국민의회의 토론에 끌어들이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엠마누엘-조셉 씨이에스이다. 그는 1788년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프렛을 통해 혁명 이데올로기의 틀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 아베 시에스 (Emmanuel Joseph Sieyes, 1748 –1836)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한 사람이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진지한 토론 끝에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프랑스인권선언 가운데 에는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가 들어가 있다. 특히 제 6조의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들은 개인적이건 그 대표들을 통해서건 그 형성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은 혁명에서의 일반의지론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초기의 국민의회 내부에서도 의견의 분열이나 차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인 반대 목소리를 원천 봉쇄하려 했고 그런 사람들을 반혁명분자로 모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다수결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실제로는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베이커는 공포정치는 혁명기의 이런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 것이지 단순한 정세 변화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유는 처음부터 차단당할 운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의 정치이념에 내재해 있던 독재적 성향이 공포정치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등의 원리와 재산의 신성성

혁명은 시민의 평등을 선언했다. 인권선언은 제 1조에서 '인간은 권리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회적 구분은 공동의 유용성의 기반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평등을 말한 것은 선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월11일에 공포된 법 11조에서는 '모든 시민은 출생의 구분 없이 모든 관직에 취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선언 제 6조도 시민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다른 구분이 아니라 그들의 덕이나 재능에 의해 관직에 취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가들에게 이런 표현이 모든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8월의 여러 법령에 이미 재산의 불가침성이 천명되고 있고 인권선언 제 17조도 사유재산은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이며 공공의 필요를 위해서만 박탈될 수 있고 이때는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강조된 재산의 신성성은 평등에 대한 어떤 선언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는 제한을 가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는 사유재산이 1789년 이전에 특권이 했던 일을 대치했다고 할 수 있다. 출생의 특권은 사라졌으나 대신 능력과 재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권은 모양만 바꾸었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혁명에 의해 새로운 사회의 기준이 된 것은 무엇일까.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재산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사회적 특권이 사라진 데 대해서는 불만을 느꼈으나 크게 잃을 것이 없었다. 소수의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귀족들이 망명을 했을 뿐 대부분의 귀족이 뒤에 남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박해를 받지 않은 귀족도 많았다.

1789년 8월 11일 법에 의해 관직매매는 금지되었으나 그 후의 의회선거나 공직 선출에서 가장 필요한 요건은 재산이었다. 일정한 재산 소유와 교육이 공직자로서의 필요요건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교구를 포괄하는 지역구를 단위로 하는 기초의회 선거에는 3일 임금 분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능동적 시민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국민의회 의원이나 중요한 공직자를 선출할 수 있는 2차의회 의원이 되려면 10일분의 세금을 내야했다. 공화국 시기에 잠깐 이런 재산 자격 제한이 없어졌으나 뒤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형성된 것이 명사(名士)층으로 불리는 명망가 집단이다. 이것은 귀족 출신과, 귀족 출신은 아니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집단으로 나폴레옹 시기에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들은 정치와 공직을 통해 19세기 내내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이런 점에서 평등의 원리는 결코 재산소유자 계급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혁명이 신분제를 해체하여 전통적인 특권을 없애기는 했으나 프랑스의 사회적 평등 확대에 큰 기여를 하지 는 못했다는 것이다.
▲ 혁명의 여신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들고 있는 그림

혁명기 선거와 독재

선거에 의한 의회의 구성은 민주정치의 기본 요건의 하나이다. 혁명기 동안 20회의 전국 규모 선거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므로 이는 혁명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선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연구된 것은 90년대에 들어와서이고 그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다.

혁명기의 선거들이 획기적인 것은 사실이다. 유권자 수가 매우 많다. 1791년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 2,750만 명 가운데 15%가 투표권을 가졌던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공정하게만 치러졌다면 상당한 정도의 민주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혁명가들이 선거를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선거마다 투표자들에게 충성서약이 요구되었고 명백히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투표가 금지되었다. 또 국민방위군에 참여했던 사람에게만 투표가 허용되는 등 정치적 제한을 가했다.

또 선거와 관련해 정치토론이 금지되었고 후보자간의 대중적 경쟁을 막기 위해 후보자의 이름을 등록하는 절차가 없었다. 따라서 표가 대단히 많이 분산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167명의 유권자를 갖고 있는 선거구에서 한 표 이상의 투표를 받은 사람이 103명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지방의 유력한 인물이나 자코뱅파 같은 유력한 정치집단이 적은 표를 갖고도 자기 사람을 의원으로 뽑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니 민의가 제대로 반영이 될 리가 없었다. 각 선거구에서의 혁명에 대한 지지도는 지역 자코뱅파의 활동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그들의 선전, 선동활동이 지역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크지 않았다. 1790년의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48%라는 높은 투표율을 보여준다. 이것은 농촌문제와 관련해 국민의회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농민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가 깨진 후 투표율은 크게 하락하여 1791년에는 23%, 1792년에는 15%로 떨어지고 그 상태로 90년대 말까지 유지된다. 자코뱅파가 투표율을 올리려고 갖가지 방책을 써도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혁명기의 선거라는 것이 대중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민주적인 기구로서 제대로 작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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