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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부와 '통제의 추억'

[칼럼] 시계바늘 되돌리며 '선진화'를 말하는가

'좌파정부는 무능하다'는 가설

잃어버린 10년(정확히 말하면 10년 동안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한국의 소위 보수 우파는 지난 10년간의 정부를 좌파로 규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는 담론을 성공적으로 유포했다. 지난 10년간의 정부가 좌파정부라는 규정은 정확하지 않지만(☞필자의 관련 기고 - "노무현 정부는 실용정부였다" ; "노무현 정부에서 배워야 할 것") 여하튼 이러한 담론을 유포하는 데에는 성공해 정권교체를 이뤘다. 이러한 정권교체의 뒤에는 보수우파는 좌파와 달리 유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한국에서 좌파가 무능한지를 검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아직 한 번도 좌파가 정권을 잡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정권을 잡은 세력은 좌파라기보다는 민주화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김영삼 정권과 달리 영남에 권력의 기반을 두지 않은 비주류 민주화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무능한지는 지난 10년에 한해서 어느 정도 검증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과학적으로 볼 때 유능과 무능의 검증을 단지 10년 동안의 두 개의 사례만을 놓고 결론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무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지표상, 지난 10년이 그렇게 엉망진창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나타나고 있다. 경제지표만 놓고 보더라도 지난 10년간 경제성장률 평균이 OECD 30개국 중 3위를 기록하고 있고, 주식시장도 최고치를 계속 경신했다. 물론 양극화가 심화된 측면이 가장 문제시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책임도 지난 10년 정부의 책임과 소위 IMF 사태를 가져온 그전 보수우파 정권의 책임을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외교안보문제도 실패했다고 보기 어렵다. 경제와 달리 객관적으로 수치화하기는 어렵지만 북핵문제도 6자회담을 통해 상당히 진전되고 있으며, 한미동맹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나름대로 필요한 재조정을 하고 있다. 권위주의의 청산은 특히 괄목할 부분인데, 국가에 의한 자국민에 대한 억압과 인권침해는 현저히 감소했고, 절차적 민주주의도 매우 진전되었다.

요컨대, 좌파가 정권을 잡은 적이 없었고, 좌파가 무능하다는 것이 증명된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좌파가 무능해 우파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선동적이다.

지난 10년은 영남에 기반을 두지 않은 비주류 민주화 정권이 집권했고 그 정권은 좌파도 아닌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우파정권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의 경제성적표는 실패와 성공이 섞여있다. 다만 과거 주류 보수정권과 비교할 때 민주적인 절차와 복지 부문이 강화된 부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의 다른 우파정부(예를 들어 프랑스, 독일, 심지어는 스웨덴의 우파정부)와 비교할 때 민주적인 절차와 복지의 비중은 아직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하다는 것 또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은 '무능한 좌파, 유능한 우파'라는 근거 없는 가설에 의해 가능했다. ⓒ연합뉴스

'보수우파 정부는 유능하다'는 가설

보수우파 정부는 유능하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이명박 정부가 탄생했였는데, 그렇다면 그런 믿음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선 한국의 보수우파 정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회과학적으로는 정확한 규정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영남에 권력의 기반을 둔, 과거 경제발전을 이끌어온 세력과 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권이다. 즉 분당되고 쪼개지고 했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력이다.

그런데 이들의 유능함은, 설사 유능했던 적이 있었다하더라도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성립되었던 것이고, 반면 민주화·세계화·정보화가 이루어진 새로운 조건에서는 너무나 무능했음이 증명되고 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라 하면 '통제의 가능함'이고, 새로운 역사적 조건은 '통제의 어려움'인데, 후자에서 엄청난 무능함이 증명된 것이 바로 1997년 IMF 경제위기이다.

물론 보수우파의 유능함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보수우파 정부의 시기 세계에서 유래없는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탄탄한 중산층이 민주화의 힘이 되었다는 것 역시 이론적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냉전의 상황에서 유지 발전시킨 것도 보수우파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능함'은 '통제'라는 환경이 필요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국가·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통제가 가능했었다. 폭력이라는 공포를 무기로 한 통제가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비상사태, 특별조치, 계엄령, 위수령, 쿠데타, 중앙정보부, 안기부, 남산, 고문, 짭새 등의 단어로 상징되었던 폭력과 공포의 체험은 사회과학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자료와 데이터를 갖다 대지 않아도 상식에 속하는 사항이다.

언론 통제는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의 하나였다. 모든 신문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게 통제되었고, 필자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신문의 행간을 읽는 비법'을 터득해야만 했었다. 어떤 신문은 폐간되고, 어떤 방송국은 없어지고, 많은 기자들이 잡혀가고 했던 시기가 소위 보수 우파가 능력을 발휘했던 시기였다. 언론 통제는 당연히 대학가의 대자보와 소위 '유언비어'라는 구전통신(요즘에는 '괴담'이라고 부른다)에 의해 더욱 정확한 정보가 돌아다니도록 만들었고, 이러한 비제도권 언론의 신뢰도가 올라가면서 권위주의 우파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는 노동도 통제되었고, 무역과 국제자본의 이동도 통제되었다. 지금의 보수우파라 하면 규제완화 및 철폐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그리고 유능했었다고 주장하는 과거 우파 세력은 상당한 보호무역을 했었고, 또한 당시는 세계화가 이루어진 지금과 달리 국제자본의 이동도 엄격히 통제됐다. 시장도 역시 통제되었었는데, 지금은 거의 고어(古語)가 되어 버린 '산업정책'을 통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시장을 계획적으로 통제·발전시킨 시기였다. 당시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계획이 있었고, 말 안 듣는 기업과 단체는 공포에 의해서 '통제'되었다.

한편 한미관계 및 남북관계도 엄격히 통제되었는데, 설사 미국이 불공정한 요구를 했어도 반미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북한에 관한 소식은 국민윤리 교과서 이외에는 거의 접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물론 이러한 통제를 통해 한국의 안보를 지켰다는 것이 보수 우파의 주장인데 이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는 민주주의를 희생으로 한 결과물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통제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 것이 노태우 정부부터이다. 소위 88년 체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통제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고, 사회 곳곳에 권위주의적인 부분이 때로는 관성적으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절이 좋아졌던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88년 올림픽 기간 중 한국의 관중이 미국과 소련의 경기에서 자발적으로 소련을 응원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통제가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하면서 보수우파 정부의 실력은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지금도 기억하겠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물태우'라고 불렸으며, 그 시절이 좋았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더욱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스스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언론은 여전히 정부의 눈치를 많이 보았지만 이전에 비하여 상당히 자유스러워졌다. 권력의 힘이 빠진 것을 느끼면 언제든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변화된 조건은 바로 '통제의 어려움'이다. 과거와 같이 공포의 수단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민주화 정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와 같이 무역과 국제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기도 어려워졌다. 세계화 정부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통제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행간을 읽는 비법'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고, 자유로운 정보의 흐름이 가능했다. 이러한 변화된 조건에서 보수우파의 능력은 결국 과거의 경제운용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통제의 패러다임'에 의거한 '정실자본주의' '환율통제' 등에 의존한 나머지 97년 IMF위기를 가져오고, 정권을 비주류 민주화 정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 IMF위기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 강한 여진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통제'라는 특정 역사적 조건에서 형성된 보수우파의 능력은 그 역사적 조건이 사라지면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보지 못하고 '낙제'를 했다. 요컨대, 우파의 능력은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서 딱 한번 검증되었고, 그 결과는 '무능'이었다.
▲ 시민단체가 서울 서대문 경찰청본청 앞에서 개최한 기자 회견 대열 일부를 경찰이 가로막고 집회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프레시안

보수우파와 '통제의 추억'

보수우파의 전가의 보도였던 통제가 거의 완전히 풀린 시기는 노무현 정부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만 하더라도 민주화가 많이 진전되었지만 언론에 대한 통제 노력은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국정원과 검찰, 국세청 역시 권력기관으로서 그 존재감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언론에 대한 통제는 거의 다 풀려서 어느 누구나 대놓고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욕할 수 있었으며, 대통령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도 그대로 다 보도되었다. 특히 정보화가 급속도로 발전해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홍수로 이어졌다.

언론의 공격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통제하기보다는 같이 논쟁했고, 국정홍보로 대응하였다. 검찰과 국정원, 국세청도 정권을 위한 통제에 사용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본연의 기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문은 IMF사태 이후로 거의 다 열렸고 한국을 보호주의를 이유로 무역보복을 하겠다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노무현 정부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 즉 민주화·세계화·정보화를 최대한 허용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검증받았다. 그러나 사실 바뀐 역사적 조건을 가장 잘 이용한 세력은 보수 우파 세력이었는데, 이들은 정권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권을 공격하고 교체하는 능력이 아니라 수권세력으로서 국정운영을 잘 할 수 있는 실력을 새로운 조건에서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느냐이다. 불행하게도 현재로서는 그렇게 앞날이 밝지 않다.

보수우파 세력은 통제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1전 1패의 기록밖에 가진 게 없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새로운 환경에서 수권세력으로서 실력을 키워오지 못했다. 시스템적인 사고와 창조적 사고의 결핍, 세계환경의 변화와 트렌드에 대한 정확한 분석 결여,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환경에서 생겨나는 정책의 부작용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새로운 보수의 비전과 철학 및 가치의 부재로 인해 열린사회에서의 국정운영의 준비를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인수위 시절부터 이어진 코미디 같은 실수들, 의도적으로 비도덕성과 코드를 강조한 것으로까지 보이는 장관과 수석 인사, 오락가락하는 대운하 프로젝트, 건진 것 없이 폼만 잡은 한미·한일정상회담,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생겨난 졸속 한미 쇠고기 협상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인데, 굵직굵직한 것만 뽑아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아직도 20% 대에 머물러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여기서 이명박 정부가 해야 할 첫 쇄신은 역사적 조건이 바뀐 것을 피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고, 민주화·세계화·정보화라는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정부 기능과 구조 및 인사를 갖추고, 새로운 환경에 맞는 시스템적인 사고와 창조적 사고에 기반한 경제정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흥적으로 대응하고, 종합적 검토 없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후 '오해'라고 강변한다면 이는 언론이 왜 통제되고 있지 않는지를 항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새로운 정권담당 세력인 소위 보수 우파는 위기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사고와 시도를 과감하게 해보려기 하기보다 과거 전가의 보도였던 '통제'의 칼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헌법에서 보장된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로 시작된다. 과거에는 통제의 대상이었던 일부 언론도 이제는 스스로 통제의 세력으로 변절했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와 비판적 보도로 성장하는 산업일 터인데, 스스로의 정체성이 언론이 아니라 보수우파 정치세력임을 밝히는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후퇴요, 정보화의 후퇴요, 세계화에 대한 후퇴이다.

민주주의를 학습해야 할 어린 학생들을 5공 시절과 같은 위협과 막연한 '공포'를 동원해 통제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모임이 이루어지는 광장을 통제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토론의 장을 제공하지는 못하면서 '괴담' '반미' '좌파'라는 이름으로 비판세력을 싸잡아서 통제한다.

필자는 기억한다. 막연한 공포와 위협이 활보하던 그때 그 분위기를. 나는 그들을 보지 못하지만 그들은 나를 보고 있는(프랑스의 철학자 푸코가 말한) 원형감옥의 경험을 기억한다. 이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며, 좌파와 우파와의 문제도 아니다. 바로 민주와 비민주 혹은 반민주의 문제이다. 우리의 자식들이 통제와 공포, 폭력과 위협 속에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지금은 21세기다. 보수우파는 20세기 통제의 시대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실력밖에 없다면 선진화는커녕 후진화로 나라를 끌고 갈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대통령이 20세기로 앞만 보고 달리신다면 정말 한국의 미래가 절망스럽다.

'반미' '좌파' '유언비어' '괴담'이라는 어휘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사고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창조적' 실용주의를 할 것인가? 시대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한물간 시대를 추억하며 그 시대정신을 외치고 있는 세력이 보수우파라면 그들은 이 나라를 담당할 실력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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