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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과학의 절대화는 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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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과학의 절대화는 피해야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39> 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⑦

중국과학과 <니덤 퍼즐>

19세기 이후 서양인들은 중국과학을 매우 무시해 왔다. 이는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굴복시킨 서양인들이 중국문화에 대해 보인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이런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람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화학교수였던 조셉 니덤(1900-1995)이다. 그는 1930년대 말부터 중국어를 직접 배워 중국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생애의 과제로 삼았다.
▲ 조셉 니덤 ((Joseph needham, 1900-1995)

1954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방대한 저술이 그 업적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그가 직접 썼으나 나중에는 제자들이 참여하여 중국과학의 모든 부면을 조명했고 2004년에 결론 부분인 제 16권이 출간되었다.

니덤은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과학을 서양에 상세하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근대 이전에 있어서 다른 지역에 대한 중국과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과학이 기원전 2세기에서 16세기까지는 유럽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럽의 과학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자기학과 연금술, 관찰 천문학, 무한한 우주를 가정하는 우주론, 정확한 시간 측정을 위한 시간 측정장치(물시계)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유럽의 과학이 중국을 앞서기 시작하는 시점은 1450년이며 이는 유럽의 르네상스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류가 있었으므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선 1644년에 수학, 물리학, 천문학 수준에서 두 지역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고도 주장한다.
▲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1954)

이미 17세기 초부터 중국에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등이 기독교 선교의 방편으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유럽의 최신 과학지식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가운데에는 천문대인 관상감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도 있다.

그러면 중국은 그 후 왜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하여 결과적으로 유럽에게 뒤떨어졌을까? 이 문제를 그는 평생의 화두로 삼아 끊임없이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니덤 퍼즐>이라고 부른다.

그는 우선 두 지역 과학의 성격 차이를 제기한다. 중국 수학이 산술학과 대수학의 전통은 강해도 기하학의 전통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슬람 수학으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는 처지에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상의 차이 때문이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 전에도 부분적으로는 번역되었지만 1857년에야 완역된 사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과학은 기하학적 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연역적 추론 면에서 많이 뒤떨어지고, 또 유럽에서 천문학과, 나아가 근대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하학적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근대과학에 실패한 보다 중요한 이유를 그는 사회, 경제적인 요인에서 찾는다. 그가 원래 맑시스트였으므로 그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이 분리될 수 없는 전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봉건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주된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이런 요소들의 결여 때문이다.

이리하여 과학의 문제는 보다 넓은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의 논의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의 약점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그가 유럽에서의 도시의 발전이나 부르주아지의 흥기를 자본주의의 발전의 전제로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이런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사적 봉건제와는 다른 관료제적 봉건제 때문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그것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도시와 자본주의의 흥기에 대한 베버의 주장이나 '아시아적 전제론'을 주장한 칼 비트포겔 같은 사람의 주장과 근접하게 된다. 그가 한 동안 비트포겔의 이론에 관심을 가졌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전통적인 유럽중심주의자들의 것으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중국과학의 성취를 강조하면서도 한 편에서는 매우 강한 유럽중심주의를 표출하는 그의 진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니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니덤 퍼즐>은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실증적인 연구의 진전과 함께 관점의 문제도 점차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서광계(徐光啓, 1562~1633)

결어 : 근대 유럽과학의 절대화는 피해야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 과학혁명을 하나의 역사적 전기로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서양 근대에 대한, 그리고 세계과학사에 대한 잘못된 상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런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과학적, 합리적인 유럽과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비유럽세계의 잘못된 이분법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학지식은 어느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 계속 자극을 받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1605년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이 유럽 근대 질서의 기초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사람은 그것들이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그리스 과학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과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다시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존되고 발전되었다. 유럽은 12세기 이후에야 그것을 아랍문헌의 번역을 통해 뒤늦게 받아 들여 17세기 이후 새롭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서양 근대과학은 오리엔트과학 - 그리스과학 - 아랍 · 이슬람과학 - 17세기 이후의 유럽과학이 융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적으로 유럽인들의 창의성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서양과학과 비서양과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서양의 우월을 이야기하는 데는 그럴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이 서양인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17세기 이후 유럽과학의 발전을 유럽인의 창의성 탓으로 돌린다면 중세 천년 동안의 불모 시기는 유럽인들의 비창의성에 돌릴 수밖에 없다.

또 18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은 사회 발전에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부 사람들의 취미활동에 가까웠다. 산업혁명만 해도 기술이 이끈 것이지 과학이 이끈 것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이 결합한 것은 1830년대 이후이다. 그러니까 과학혁명 때문에 서양이 우월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 근대과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며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주었고 그리하여 현대 과학문명의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시아인들은 17세기 이후 유럽과학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유럽 근대과학이 인류의 소중한 유산의 하나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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