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신달자 시인입니다. 신달자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64년 <여상>에서 여류신인문학상 수상과 함께 등단한 후,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서 재등단했습니다. <봉헌문자>, <아가>, <아버지의 빛>, <오래 말하는 사이> 등의 시집이 있으며 <시인의 사랑>,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 등 다수의 에세이집이 있습니다.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현대불교문학상을 비롯해 올해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박인규 : 요즘 아주 축하드릴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책도 한 권 내셨고 이 달 말에 영랑시문학상 본상을 수상하셨는데, 상을 아직 받으신 건 아니죠
신달자 : 25일에 받습니다.
박인규 : 가시면 수상소감 말씀하실 텐데 이 자리에서 미리 한 번 말씀해 주시죠.
신달자 : 수상소감이라는 건 너무 판에 박힌 거라서, 이것은 채찍질로 안다, 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뭐 상은 언제나 좋은 겁니다.
박인규 : 올해 또 정년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신달자 : 네. 좋아졌습니다.
박인규 : 최근에 책 때문에 여기저기 인터뷰 요청이 많아서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신달자 : 네. 정말 고단하네요
박인규 : 게다가 또 한글학회 홍보대사도 맡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신달자 : 그거 어디서 들으셨어요?
박인규 : 언론에서 본 것 같은데요
신달자 : 네, 홍보대사
박인규 :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우선 저희가 모신 가장 큰 이유는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라는 자전적인 에세이를 쓰셨는데, 어떻게 보면 결혼생활의 고통과 어려움. 제가 좀 읽어보니까 상당히 솔직한 마음을 쓰셨어요. 24년 동안 뇌졸중을 앓았던 남편, 그 와중에 9년 동안 앓다 가신 시어머니, 본인의 암 투병. 웬만한 사람은 한 가지도 견디기 힘든데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내셨어요. 책 내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내시기로...
신달자 :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쓸 수 있었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래서 요즘은 흔히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 전화를 많이 받습니다. 만나보고 싶다라든가. 대개는 주부들이에요. 그러나 사실 이 책을 내기는 쉽지는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너무 개인사적인 이야기고 또 너무 구질구질한 이야기고. 그래서 사실 드러내 놓기가 마음이 쓰이는 그런 책이었어요. 그러나 저는 생각했습니다. 왜냐 하면 제가 살아온 고단한 삶, 그리고 정말 고통의 삶이 이대로 사장되기보다는, 나는 글 쓰는 사람인데 글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조금 도움이 나 이런 것이 된다면 내가 말해야 되지 않겠나,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환자보다는 보호자들을 향해서 썼다고 보는 게 좋을 거예요.
박인규 : 그 전화를 해오시는 주부님들도 어떤 도움을 받고 싶어요
신달자 : 인생의 시련이 있겠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다고 전 생각합니다. 저는 글이라도 썼으니까 복된 사람이고요
박인규 : 표현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신달자 : 어려운 현실에 있으면서도 혼자 삭여야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박인규 : 책 보니까 희수야, 라면서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쓰셨는데 희수라는 분이 실재하시는 인물입니까?
신달자 : 제자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쓰는, 그리고 저처럼 늦게 마흔에 대학원을 들어간 제자가 하나 있습니다.
박인규 : 남편 되시는 분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24년 만에 깨어났는데 계속 앓으시면서 4년 동안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책의 첫 부분이 사람이 일생에 꼭 한 번 주인공이 될 때가 있다. 죽을 때다.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고. 그때 남편 돌아가실 때의 느낌 어떠셨습니까?
신달자 : 사실 저는 그 사람이 죽는 연습이 너무 많이 돼 있던 사람이에요. 왜냐면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내일일까 모레일까. 그 사람이 죽는 연습을 많이 했더랬고, 그때 내가 표정을 어떻게 해야 될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죽으니까 그건 정말 연습이나 연기가 필요 없이 실제적으로 정말 막막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음으로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제가 얼마나 많이했겠어요. 그런데 정말 죽을 때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죽일까 말까 했을 때 죽이지 말라는 것에 동의하고 싶었습니다.
박인규 : 책을 보니까 남편 되시는 분이 신달자 선생님보다 15년 연상이시고 재혼남이신데, 그 당시엔 상당히 어려운 결혼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제가 좀 인상깊게 본 부분은 말이죠. 신혼여행을 부산으로 간다고 하시다가 인천을 가시면서. 게다가 신혼여행가방을 나는 들 수 없다. 빨간 가방이므로. 그 부분하고
신달자 : 그때는 그런 남자들이 가끔 있었어요. 요즘 같으면 그런 남자들 다 쫓겨나죠.
박인규 : 맞아 죽죠
신달자 : 우리 시대엔 그런 남자들이 있었고, 제 남편은 또 성격이 아주 특이한 남자였습니다. 자기가 하기 싫은 건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박인규 : 저는 참 아내를 위하지 않는 분이구나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보니까 돌아가시기 직전에, 나 죽으면 결혼하지 마라.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해요.
신달자 : 하하하. 그래요. 그렇게 고생시켜서. 거기도 썼지만 결혼하라고 했으면 내가 차라리 안 할 건데. 근데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겠는가, 그건 아닐 거예요. 물론 저는 지금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박인규 : 저는 이 분이 그래도 속으론 굉장히 사랑하셨구나
신달자 : 그런 이야기는 늘 했어요. 손자들 이름 부르면서 쟤들을 두고 어떻게 죽나. 그리고 마지막엔 늘 그런 말을 했습니다. 너를 두고 내가 어떻게 죽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마음으론 있었겠죠.
박인규 : 속정은 있으신데 표현은 못하신. 옛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하는데, 10년도 아니고 24년 동안, 몸이 성치 않은 남편을 수발하시려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겠죠
신달자 : 그런데 몸이 성치 않은 건 용서도 되고 견딜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몸이 아픈 사람들이 나중에 결국 정신을 다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서서히 인간이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정말 그건 견딜 수 없는 겁니다. 몸으로 힘든 것보다는 마음이... 그래서 우울증을 앓게 되고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그리고 자기가 약하다는 걸 아니까 그 책에도 있습니다만 늘 했던 식으로, 여보 나 그것 좀 줘. 이러면 내가 네 종이냐? 이런 식으로, 인간이 망가지는 거죠
박인규 : 폭행도 많이 당하시고...
신달자 : 그렇죠.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고. 정말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어요.
박인규 :
9년 동안 정상이신 남편분과 사시고 아프신 24년 동안 사셨는데. 많은 분들이, 결혼을 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하지 마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 그러는데 신달자 선생님은 결혼이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인에게.
신달자 : 결혼은 그래도 저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인간생활에서. 가족이란 말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말이 있는데 가족이란 말을 쓰면 거기에 따뜻한 물이 고이는 것 같아요. 근데 요즘 저는 제자들이나 다른 주부들에게도, 또 남성들에게 강의할 때도 가족의 새로운 의미에 대한 말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살아가는 건 굉장히 쉬워 보이지만 그게 더 어려운 겁니다. 인간은 결핍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부부나 가족으로 살면서 이 사람이 나한테 안 든다고 말할 때, 그게 다 되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거죠. 그래서 제대로 안 맞는 걸 스스로 용인하고 섞어가면서 사는 게 삶이라고 생각해요.
박인규 : 서로 맞춰가면서
신달자 : 네. 그런데 그걸 사람들이 귀찮게 생각하죠.
박인규 : 사실 젊은이들이 결혼, 하면 약간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데 여기 글에 보면 결혼은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화해하는 것. 결혼은 그냥 옆에 있는 것. 우리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 어떻게 보면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신달자 : 쉽지 않죠. 그런데 결혼을 너무 크게 의미를 둘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박인규 : 뇌졸중으로 남편이 쓰러지시고 중간에 시어머니도 쓰러지시고. 더 중요한 건 남편 되시는 분이 2001년에 돌아가신 다음에 본인께서도 암을 앓으셨어요. 24년 동안 보호자로 환자를 돌보시다가 스스로 환자가 되니 또 다른 경험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던데요
신달자 : 참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면요. 사실 저는 환자를 간호하는 데는 거의 9단에 가깝죠. 그런데 제가 딱 환자로 누우니까 제가 간호했던 몇십 년의 세월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박인규 : 더 힘들다
신달자 : 아, 이런 것이었구나. 그리고 너무나 절박한 것이었어요. 처음에 알았을 때 병원에 가서 시실은 눕고 수술하고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처음에 딱 진단을 받았을 때는 정말... 아, 남편도 이랬었구나. 또 우리 어머니도 이랬었구나. 죽는 건 이런 것, 병은 이런 것이구나 이런 걸 체험했어요. 그래서 전 그때 이렇게 생각했어요. 정말 하나님이란 사람도 이상하다. 간접적으로 정말 나를 그렇게 보게 했으면 내가 경험하는 건 좀 면제해줘야지 이게 뭐야. 이렇게 대들기도 했죠.
박인규 : 흔히 하는 말로 당해 봐야 안다고. 그런 상황들을 겪으시면 어떻게 보면 생을 포기할 수도 있고. 실제로 요즘은 사실 어려워지니까, 못할 얘기지만 동반자살하시는 분도 많은데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힘은 어떤 거였습니까?
신달자 : 정말 아이들과 죽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아이들 데리고 도망가고 싶기도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마다 오늘을 생각한 게 아니라 10년 혹은 20년 후를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때 어렸고 아이들 데리고 어디 간다 해도 편치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남편은 약자, 환자였고. 견디는 것만이 내가 성공하는 일이다. 나는 나에게 계속 말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때 어머니였습니다.
박인규 :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렇군요.
제가 보니까 남편이 쓰러지신 게 선생님이 35살 때였는데 계속 20년 동안 아프시면 병수발도 정신이 없을 텐데 그 와중에 대학원을 가셔서 공부하셨어요. 그래서 이거 참 보통분이 아니시구나 했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신 거예요?
신달자 : 정말 보통사람인데요, 누구나 당하면 어쩔 수 없는 건데... 환자가 있는 집은 어느 시간이 되면 경제위기에 몰립니다. 돈이 없어지게 되는 건데 돈이 없어지니까 그 돈을 보충해줄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팔 것을 우선 팔고, 정말 말하기 마음 아프지만 아이들 돌 때 들어온 금반지도 팔고, 그런 식으로 팔다가 안 되죠. 그럼 결국 내가 해봐야 되겠죠. 그래서 제가 장사도 조금 해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양복점에 양복천을 가지고 팔러 갔는데, 우리 친척이었는데 제가 돈도 많이 준 사람이었어요 옛날에. 그런데 천을 햇볕에 막 보면서 천의 색깔이 어떠니 마니 이러는걸 보고, 저는 인생에 그때 굉장히 실망했어요. 야, 이건 내가 좀 잘 돼야겠다.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냐. 그래서 그 양복천을 우리 욕탕에 가지고 가서 수도꼭지를 확 틀고 버렸어요. 그때부터 제가 이를 악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 세 가지. 이를 테면 공부해라. 돈 벌어라. 행복한 여자가 돼라. 그걸 다시 떠올리게 되면서, 그때 사실 등록금도 없었지만 동대문시장에 가서 그때는 한 권 새 책을 살 수 있는 돈으로 열 권 헌책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책 헌책을 열 권 사와서 이 방 저 방 마루, 부엌, 전부 다 영어책을 깔아놓고 공부를 하는데 공부가 되겠어요? 그때는 요를 깔고 자지도 않고 아무 데서나 환자 돌보다 잠들고 이랬는데. 그래서 영어시험은 몇 번 떨어졌습니다. 대학원에 가려고 했다가. 그래서 몇 번 떨어지고 대학원 시험이 돼서, 대학원을 2년 마치고 나니까 제가 마흔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죠.
박인규 : 이 책 제목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그때부터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살았다는 말씀인가요?
신달자 : 네. 그때 인생에서는 정말 신생아였어요. 세상을 아무 것도 몰랐거든요. 남편에 의지했고 제가 자랄 때는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그래서 돈이 뭔지, 가난이 뭔지 이런 거 정말 몰랐었어요. 그런데 새롭게 세상을 배워가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저는 걸음마의 걸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아픈 가슴으로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박인규 : 책 말미에, 지금은 평온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보면서 지금은 후련하실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어떠십니까?
신달자 : 후련하기보다 개운한 심정이라고 할까요? 왜냐면 그 남자는 24년을 앓다가, 시어머니는 9년을 누웠다가 다 내 앞에서 내 손을 잡고 다 눈감았던 사람들이고. 만약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중도에 포기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선가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을 겁니다. 나한테 주어진 걸 다 했기 때문에
박인규 : 얼핏 들으면 그동안의 과정이 굉장히 힘드신 것밖에 없으신 것 같은데, 혹시 남편 병수발하시거나 본인이 암 투병을 하시면서도 나는 그래도 행복하다는 걸 느끼신 적이 있었습니까?
신달자 : 그럼요. 왜냐면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자라 줬고. 그때 집안이 늘 어수선하고 수라장이고 이러면 아이들이 사춘기 때 빗나갈 수도 있었는데 아이들이 그냥 보통으로 자라줬고. 그것이 우선 감사하고. 그리고 제가 일할 때 그래도 뭔가 잘 풀렸잖아요. 대학원도 고생은 했지만 갈 수 있었고. 처음에 등록금을 빌려서 냈습니다. 그랬지만 그걸 다 갚을 수 있는 계기도 생겼고 책이 팔렸고. 그래서 저는 감사할 일이 참 많아요.
박인규 : 책에 보면, 사람들은 아직 벗어날 방도가 있는데도 너무 일찍 절망하는지 모른다. 인간은 희망에 속는 일보다 절망에 속는 일이 더 많다. 너무 일찍 절망하지 말아라. 그런 말씀이신데, 아까 전화 하시는 주부들도 많다고 하셨는데요, 아마 신달자 선생님 같이 고통 속에 사시는 분도 많을 것 같아서 혹시 이 자리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다면?
신달자 : 본인 스스로가 그럴 때, 그런 순간이 있을 땐 정말 희망이라는 건 너무나 멀리 있는 거죠. 누가 힘내라, 이런 것도 건성으로 들리고. 그런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면 뭔가 새로운 걸 만날 것이다. 고통이 지나가고 지나가고... 그래서 우리 목숨도 언젠가는 흘러갈지 모르지만 저는 늘 너무 힘들면, 그래 지금도 시간이 가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박인규 : 하긴 군대 가 있는 군인들이 지금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런 낙관이 필요하겠군요.
여기서 잠깐 신달자 시인의 시 한 편을 직접 낭송하시는 걸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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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비가 와요>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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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 네. 신달자 시인의 '여보 비가 와요'를 낭독으로 직접 들어봤는데요. 저도 결혼했습니다만 행복이란 건 사소한 것에 있다고 하더라구요.
신달자 : 그렇죠. 우리가 너무 거대담론에 휩싸이는데요. 아주 작은 거, 몸이 아플 때 어때? 하고 이마에 손을 한 번 얹어주는 것만으로도 언제든지 마음을 표현할 수 있고. 제가 남편이 살았을 때 남편한테 늘 그랬어요. 도대체 당신 나한테 해주는 게 뭐야? 돈을 줘? 나를 행복하게를 해 줘? 뭐야? 많이 대들었거든요. 남편이 딱 죽고 나니까 정말 중요한 걸 저한테 했더라구요.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여보 비 오네. 밥 먹을 거야? 빵 먹어? 어쩌고 했던 말. 그리고 가끔 돈을 안 줘서 화가 나면, 뭐야 당신은? 이렇게 대들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남편은 참 중요한 위치에 있었어요.
박인규 : 돌아가신 지 한 8년 되셨는데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신달자 : 그리움인지 아니면 시원함인지,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지만 늘 그 사람이 저는 안타까워요. 참 괜찮은 남자였는데 병이 안 났으면 얼마나 자신의 꿈들을 성취했을까. 그것이 늘 너무 억울하고 아깝죠.
박인규 : 화제를 좀 바꿔서, 올해가 현대시 100주년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행사가 많다던데, 시낭송회에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신달자 : 네. 24일에 강남구청에서 하는 행사인데요. 강남역 어디 부근에서 시낭송을 시인들이 하고 팬들도 만나고 그런 행사가 정해져 있습니다.
박인규 : 요즘 시에 대해서 위기란 말도 나오고. 시를 쓰는 사람만 보고 편집자만 본다고 하는데, 요즘 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달자 : 영상에 많이 잠식은 돼 있죠. 왜냐면 눈으로 TV나 DVD 보는 게 더 쉽지 책읽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어하죠. 문자와 활자가 외면당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예를 들면 천연색 TV가 나왔을 때 라디오는 죽었구나 했지만 지금의 라디오는 훨씬 더 그때보다 좋아졌고 기능성도 좋아졌습니다. 그런 거 보면 활자는 인류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달나라도 가고 지구여행도 이러지만 결국 그런 기계문명 속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문자와 시와 어떤 감성적인 요소일 겁니다.
박인규 : 선생님은 평생 시인으로 사셨는데 일반에게 많이 알려진 건 백치애인, 물 위를 걷는 여자. 이런 소설로 유명해졌어요.
신달자 : 시도 열심히 썼어요.
박인규 : 그랬는데, 문단의 이상한 선입견이라고 할까. 베스트셀러작가는 문학성이 높은 작가가 아니다. 예를 들면 공지영씨 같은 분도 약간 고생을 했다던데 어떠셨습니까?
신달자 : 저도 그런 쪽에 좀 있죠. 왜냐면 책이 이상하게 팔려 버리면 대중적이 돼 버리대요. 묻히면 아무 말이 없는데.
박인규 : 많이 팔리는 게 좋은 거 아닌가요?
신달자 : 저는 많이 팔리면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문단은 약간 순결성을 요구합니다. 시인이 소설을 쓴다든가 소설가가 시를 쓴다든가 이러면 그걸 좀 달갑지 않게 생각해요.
박인규 : 고고하고 좀 그런가보죠?
신달자 : 네. 외국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막 TV에 나가고 라디오에 음성이 자주 들리면 대중화돼 버린. 이를테면 시가 갖고 있는 고고성을 상실하는 것처럼. 꼭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박인규 : 또 그런 베스트셀러소설을 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신달자 : 아직은 소설 쓸 생각은 없습니다.
박인규 : 일단 이번 책이 많이 나가길 바라고요. 다음 작품도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계신지 혹시 제가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청취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마무리 말씀으로
신달자 : 다음에 쓰고 싶은 건 소설도 에세이도 아니고요, 종이 있죠. 우리가 쓰는 종이라는 주제를 연작시집으로 하나 묶을 생각입니다. 그 종이가 뭐냐.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 즉 우리들의 진심, 우리들의 근성, 또 우리가 잃어버렸던 어떤 순수. 그런 것들을 되살리고자 하는, 그것을 하나의 상징, 물건으로 종이를 선택한 겁니다.
박인규 : 백지에 그림을 그리고 꿈을 그리듯이
신달자 : 네. 종이라는 개념은 인쇄와는 좀 다르잖아요. 육필 같은 거죠. 그런 걸 조금 상징성으로 두고 우리가 다시 한 번 새로운 순수를 찾아야 되자 않나. 인간의 본성이죠. 그걸 좀 찾고 싶은 그런 글을 좀 쓰고 싶습니다.
박인규 :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책을 보고 많은 분들이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쓰셔서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생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신달자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근 자전적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를 펴낸 신달자 시인과 함께 아픔과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망의 메시지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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