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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세기의 유럽 과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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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세기의 유럽 과학의 모습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35> 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③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근대 과학이 처음 시작되어 가장 뚜렷한 성과를 보인 분야는 천문학이며 천문학의 발전은 수학과 역학의 발전을 동반했다. 이 학문들이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흙, 물, 공기, 불의 4원소설을 주장했다. 지상의 모든 물체는 이 원소들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또 이 원소들은 물체가 분해되면 각자의 원래 자리를 찾아 가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무거운 흙은 밑으로 갈아 앉고 가벼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지상은 가변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지구는 공 모양으로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행성들과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는 투명한 천구(天球)들에 붙어 있고 그 너머에는 항성들이 자리 잡고 있는 천구가 또 따로 있다. 달을 넘어선 우주는 천상의 영역으로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 않는 순수한 원소인 에테르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천상의 영역은 어떤 변화도 없는 불변의 영역이 된다.

중세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천문학 체계는 2세기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90-168)의 지구중심설이다. 고대부터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은 계속 대립해 왔으나 그가 새로운 이론적 장치를 통해 종래의 지구중심설이 갖고 있던 약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우주. 가운데에 지구가 있고 그 밖으로 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천구가 차례대로 있고, 가장 밖에 있는 것이 항성들의 천구이다.

고대 천문학자들이 설명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은 것은 행성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지구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행성들이 일정한 거리에서 원운동을 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지구를 향해 전진하다가도 일정 시기가 되면 다시 뒤로 후퇴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화성의 후퇴운동을 보여주는 그림. 가운데 있는 별자리가 궁수자리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편심 이론을 통해 행성 원운동의 중심을 지구가 아니라 지구와 좀 떨어진 편심(eccentric)에 두었고, 대원(deferent: 이는 편심을 중심으로 하는 행성의 원 궤도를 말한다), 소원(epiccycle: 행성은 대원을 중심점의 축으로 하여 다시 작은 원을 그리며 돈다. 즉 늘어진 스프링 모양을 하며 돈다. 그 작은 원을 말한다), 등각속도점(equant point: 그곳에서 관찰하면 행성들이 일정한 원운동을 하는 듯이 보이게 된다는 공간 속의 가상적인 점)등 기하학적 모형을 이용하여 행성의 복잡한 움직임을 설명하려 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잘 어울렸다. 또 실제의 관측 결과와도 상대적으로 더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고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교리와도 잘 맞았다. 그래서 중세사회의 공식적인 이론이 될 수 있었다.
▲ E가 지구이고, C는 편심, 편심을 중심으로 하는 원이 대원이다.

▲ 대원을 원 운동의 중심으로 삼아 도는 원이 소원이다.

▲ 행성은 대원을 중심점으로 소원을 그리며 시계반대방향으로 전진하므로 전체적으로는 풀어진 용수철 모습으로 궤도가 나타난다.

▲ 등각속도점을 나타내는 그림. E=지구, C=편심,Q=등각속도점(C에서 E와 같은 거리만큼 반대편에 있는 지점). 프톨레미는 등각속도점에서 측정하면 행성이 대원을 같은 시간에 같은 각도만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같은 90 ˚ 인 A→F로 움직이는 속도는 F→B로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된다. 이는 행성의 불규칙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에서 갈릴레이까지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체계도 행성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후대의 천문학자들이 계속 손을 보아 중세 말에 오면 매우 복잡해졌다. 이탈리아에 유학한 폴란드인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이에 불만을 느끼고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체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가 1543년에 출판한 책이 바로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이다.

그러나 새 이론은 지구와 태양의 자리를 바꾸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아직 불명확하던 행성들의 순서를 수성, 금성, 지구의 순서로 확정지은 것 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수학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기하학적 장치 가운데서 등각속도점을 제외하고 편심과 대원, 소원은 그대로 유지했다. 또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는 플라톤 이래의 원리에 집착했고 우주가 겹겹이 붙어 있는 투명한 천구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의 이론도 프톨레마이오스의 것보다 별로 나아보이지 않았다. 편심을 그대로 두었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태양중심설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당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넘어서기도 어려웠으므로 16세기에 그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전 유럽에서 열 사람도 채 안 되었다. 그의 체계는 매우 보수적인 것으로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티코 브라헤(1546-1601)이다. 덴마크의 귀족인 그는 스스로 천문대를 지어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정밀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항성 시차(視差)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티코 브라헤의 천문대 내부 모습

지구가 움직인다면 지구의 위치변화에 따라 항성을 보는 각도가 달라져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밀한 망원경이 만들어지며 1838년에야 가능하게 된 일이다. 그의 우주모델은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형태이다.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을 타협시킨 것이다.

브라헤로부터 넘겨받은 관찰기록을 바탕으로 끈질긴 노력 끝에 행성의 운동을 수학적 원리로 규명한 인물이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이다. 케플러는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다 천문학에 관심을 가진 인물로 행성 운동의 3법칙을 발견했다.
▲ 요하네스 케플러

그는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형이며 그 공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만들어냄으로써 행성운동의 비밀을 풀었다.

그가 쓴 <새로운 천문학>은 태양을 이론의 여지없이 우주의 중심에 놓고 행성 운동을 새롭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천문학의 진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은 천문학자는 극소수였을 뿐 아니라 대부분 그 이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갈릴레이와 뉴턴

지동설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이다.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그는 1609년에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관찰했다.

달의 분화구를 보며 달이 완전한 구체가 아니라 지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밤하늘에서 당시까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던 수많은 별들을 발견했다. 목성을 돌고 있는 네 개의 위성들도 발견했는데 이는 천체 운동의 중심이 지구나 태양만이 아님을 시사해 주었다. 또 태양에서 나타나는 흑점의 변화를 보고 태양이 완전무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양 중심을 주장했으나 케플러의 타원 궤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열정적으로 옹호했고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프톨레마이오스체계를 버리도록 설파했다. 그가 교회의 종교재판에 걸린 것은 그의 주장이 실제 관찰의 뒷받침으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역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움직이는 물체의 관성을 주장함으로써 코페르니크스주의에 대한 최대의 반론을 제거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지구가 움직인다면 지상의 모든 물체는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중에 던진 물건도 던진 곳보다 더 서쪽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구가 동쪽 방향으로 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물체들이 관성에 따라 움직인다면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여도 물체들은 뒤로 쳐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뒤엎는 효과를 가져왔다. 지구중심설은 갈릴레이와 함께 본격화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작 뉴턴(1642-1727)은 근대 천문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미적분학을 통하여 수학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역학, 광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687년에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다.

이 책에서 그는 관성법칙, 힘의 작용 · 반작용법칙을 주장했다. 또 우주 공간이 유체인 에테르로 채워져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거부하고 그것을 텅 빈 공간으로 가정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중력 법칙의 발견이다.
그는 달과 지구 사이의 대략적인 거리를 알고 있었고 달의 공전 주기도 알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달에 미치는 지구의 힘을 계산할 수 있었다. 또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을 이용하여 지표면에서 물체를 낙하시키는 힘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계산을 통해 나온 두 힘의 크기는 같았다. 이 힘을 그는 중력이라고 불렀고 그것을 수학적 공식으로 나타냈다. 즉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중력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자 이제 행성이 거기에 붙어서 돈다고 가정한 천구는 불필요하게 되었다. 천구 없이도 먼 우주 공간에서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지상과 천상의 분리를 넘어 우주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즉 우주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기계와도 같이 생각하는 기계론적 우주관은 그 결과인 셈이다.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된 천문학의 발전은 이렇게 뉴턴에 와서 확실히 근대적인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브라헤의 정밀한 관측이나 케플러의 수학적 계산, 갈릴레이의 실험, 뉴턴의 수학 등을 통해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점성술, 연금술 등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비학들은 이런 과학적 태도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매주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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