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을 벗지 못한 산에 생강나무 꽃이 노랗게 피었습니다. 메마르고 딱딱한 목질 속에서 바깥으로 노란색 꽃을 계속 밀어 내보내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요?
생강나무 아래로 상사화 초록 잎이 땅속에서 지상을 향해 꽂은 단검처럼 올라와 있습니다. 땅 속에서 푸른 잎을 칼처럼 찔러 올리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요?
냉이와 민들레가 양지쪽에 앉아 어린잎에게 따스한 봄 햇살을 쬐어 주고 있습니다. 냉이와 민들레를 차받침 모양으로 동그랗게 만들어 들에 가득 놓아두고 간 이는 누구일까요?
딱따구리가 나무 둥치를 두두두둑 쪼며 숲의 나무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딱따구리에게 나무들의 봄눈을 뜨게 하는 일을 시킨 이는 누구일까요?
봄은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습니다. 잔디 속에 연둣빛 새 순이 솟아 올라오고 있고 매화꽃봉오리가 연분홍 눈을 틔우고 있습니다.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옵니다. 지금도 멈추지 않고 몸 바깥으로 새순과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지만 겨울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겨울에도 살아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지금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봄의 나무들은 작고 여린 이 꽃을 겨울부터 준비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봄꽃이 다 겨울부터 준비해온 꽃이라고 생각하면 아름답고 귀하기 그지없습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이름과 향기를 가진 사람들도 그 향기와 빛나는 삶을 겨울부터 준비합니다. 모질고 추운 시련의 날을 보내면서도 멈추지 않고 자기 생을 앞으로 밀어올린 이들에게 반드시 꽃피는 날은 찾아옵니다. 그들의 생은 시련의 날들로 인해 더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서도 귀한 것을 배우게 되는 봄입니다. 풀잎과 나뭇가지를 통해 그걸 가르쳐 주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요?
2008년 4월, <프레시안>이 새 봄을 맞아 <접시꽃 당신>의 저자 도종환 시인의 마음이 담긴 '시인의 엽서'를 보내드립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인의 엽서'는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배달됩니다.(관련기사 : "지금 당신이 쥐고 있는 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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