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가 지났다. 일주일 간의 커다란 정치행사였다. 시진핑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설은 파다하고, 평은 분분하다. 파벌간 권력 지형도를 살피고, 정치개혁의 청사진이 미흡함을 짚기도 한다. 나름으로 의미 있는 분석일 것이다. 필자는 '시대교체'를 으뜸으로 꼽고 싶다. 남순강화(1992) 20년, 마침내 덩샤오핑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이다. 장쩌민은 물론 후진타오도 덩이 후계자로 낙점했던 인물이다. 즉 덩은 여지껏 '숨은 신'이었다. 비로소 덩과 직접적 인연이 없는 첫 세대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시진핑은 막후 실력자의 선발(selection)이 아니라 당내 합의로 선출(election)된 첫 주석이라 하겠다. 당내 권력 승계가 제도화에 이른 것이다.
덩은 마오와 더불어 중국혁명을 일군 20세기의 기린아였다. 마오는 입국(foundation)을 이루고, 덩은 재건(reconstruction)을 달성했다. 두 거물의 유산을 딛고, 중국은 이제 세 번째 이행기로 진입한다. 얼추 중국공산당 창당 일백년(2021)을 지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일백년(2049)에 가닿는 향후 3-40년의 항로이다. 모름지기 삼대(三代), 백년대계는 거쳐야 새로운 국가와 문명이 그 온전한 꼴을 갖추는 법이다.
2 . 중국공산당 : 혁명당에서 집정당으로
중국의 21세기를 가늠하자면, 중국공산당부터 헤아려야 한다. 여전히 레닌의 전위에서 출발한 당국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탓이다. 헌데 중국공산당의 위상을 재정립한 시진핑의 연설이 심상치 않다. 그는 공산당이 더 이상 혁명당이 아니라 집정(執政)당이 될 것을 역설한다. 혹, 동어반복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공산당이 집권당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 아닌가. 그러나 내실을 따지면 그리 간단치가 않다. 중국공산당의 영수가 앞장서서 혁명에 안녕을 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도 그러지는 못했다. 어물쩍 논쟁을 미루었을 뿐이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 그것이다. 일백년은 더 두고 보자는 것이다. 좌/우 분란을 갈음하려는 칠순 노인의 노회함이었다.
'고별혁명'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오랜 숙원이다. 하면 중국 공산당이 끝내 '민주화'의 대장정에 나서는 것일까. 아닌 것 같다. 집정당으로의 전환이란 중국공산당이 처한 근본 난제,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당의 역할이라는 딜레마를 해소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불구대천, 자본주의와 공산당은 어떻게 해후할까? '중국모델'의 성패도 여기서 가름 날 것이다.
정당은 계급 투쟁의 산물이다. 또 계급 투쟁의 방편이다. 그래서 각 정당은 특정 사회 계급을 대변한다.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전위를 자임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한다. 여전히 중국공산당 당헌에 못 박혀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사문화된 지 오래다. '붉은 자본가'에게 당을 개방한 것은 1997년이다. 15년간 다양한 사회 영역 의 엘리트들이 속속 당내로 진입했다. 당의 체질도 바뀌었다. 이른바 '당내 민주'의 확산이다. 당 밖에서 대안정당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당 안에서 선거와 법치 등 민주적 기제를 도입한다. 즉 개방과 개혁은 공산당 내부에서도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계급정당이 아니라 전민(全民)정당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지배구호는 '조화사회'가 되었고, 계급투쟁을 선동한 보시라이는 축출되었다.
전민정당이 허언이 아님은 숫자가 말해준다. 1921년 13명으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는 440만, 1979년에는 3600만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8000만을 돌파했다. 어지간한 국가를 훌쩍 상회하는 규모이다. 가히 세계 최대의 정치조직이라 하겠다. 8천만이라 함은 성인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국민 중 열의 하나가 당원인 것이다. 이만큼 포괄적인 정당이 또 있을까. 그 8천만 당원의 70% 는 개혁개방 이후에 가입했다. 혁명이 까마득한 신세대이다. 명실상부 '국민정당'에 가까워진 것이다. 다만 그 실태를 공식화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장정의 신화를 간직한 원로들의 눈에 여태 흙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았다.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신진대사는 멈춤이 없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혁명의 꼬리표를 뗀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어떠할까. 단서는 다시 시진핑의 연설이다. 이번에는 그 장소에 주목한다. 올해 9월 1일, 시진핑은 중앙당교의 신입생 환영식에서 집정당을 강조했다. 2만 3천자에 달한 장문의 연설문은 중앙당교의 기관지 <학습시보>에도 전재되었다. 불과 두 달 전이니 사견에 그칠 리 없다. 새 지도부의 공식 입장과 노선이다. 그가 집정당을 처음 입에 올린 것도 2008년 중앙당교의 개학식이었다. 교장에 취임한 해가 2007년이니, 곧장 그리고 줄곧 집정당을 화두로 삼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후진타오 또한 중앙당교의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10년을 도맡았다. 교장을 마치고 당수에, 그리고 주석에 오른 것이다. 국가주석이 교장이고, 훈장이 곧 당서기이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당국(黨國)체제 못지않게 '당교(黨校)체제'에 주목할 일이다.
3.당교체제 : 거대한 학습조직
중앙당교의 기원은 1933년 발족한 맑스-레닌주의 학교이다. 대장정 후 연안에서 중앙당교로 개명했다. 문화대혁명으로 폐교되는 곡절을 딛고, 재차 문을 연 것은 1977년. 10년만의 개교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학습교재의 전환이다. 4개 현대화를 비롯한 개혁개방(1979)은 중앙당교의 변화에서 출발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정권(政權)에 앞서 교권(敎權)부터 장악했다.
현재 중앙당교 아래는 성과 시, 향 단위의 지방당교가 촘촘히 자리한다. 2천여 개의 학교가 전국적인 그물망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8천만 대가족의 유대와 결속을 다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소속감과 정체성을 배양하고, 집합의식과 집합행동을 고취한다. 보직을 맡거나 승진을 하면, 반드시 이곳에서 (재)교육을 받는다. 학습기관으로서의 면모도 손색이 없다. 120만의 장서를 구비하고 있는 중앙당교는 400여명의 교수가 600여 강좌를 열고, <학습시보>와 <이론동태>, <중앙당교학보> 등 다섯 개의 간행물을 발간한다.여기에 발표된 글들이 < 인민일보>나 < 광명일보> 등 전국 단위의 일간지에 실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즉 당교는 새로운 이념의 배양소이자 그 실험장이다. 공산당이 그 지배적 위상을 지속하고 재생산하는 지적 태반인 것이다. '현대세계경제', '현대세계기술', '현대 세계 법과 중국 법', '현대세계군사와 중국의 군사전략', '현대사상' 등, 작금 세계의 동향을 짚고 중국의 대응을 집합적으로 학습한다. 외부 특강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인민은행장, 외교부장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현장의 실무 경험을 나눈다. 그럴수록 당교의 교육은 이념적 색채가 덜하고, 실용적이고 실무적이며 실천적으로 바뀐다. 실사구시, '실학'의 기풍을 다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거대한 학습조직이다.
기실 국가의 핵심 인재를 선발하여 충실하고 경쟁력 있는 인재로 교육하는 것은 신중국의 남다름이 아니다. 구중국, 즉 유학정치의 오랜 유산이다. 태학, 국자감, 성균관 등은 천하의 인재와 강호의 고수를 왕권 아래 결집시켜 방대한 학자=관료층을 양성하는 대학(大學)의 산실이었다. 풀뿌리에서는 향교와 서원, 서당이 유학의 이념과 이상을 지탱했다. 오늘날 중앙과 지방의 당교에 방불하는 제도적 원형이었던 것이다. 본디 '학교'(設爲庠序學校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부터가 왕도정치를 꿈꾸던 맹자의 정치적 기획을 담보하던 곳이다. 당교야말로 학교에 근사한 셈이다. 이 학문=정치와 학자=관료의 두터운 기저가 중국이 소련과 역사적 경로를 달리한 밑바탕이라 하겠다. 당교체제를 궁리한다면, 레닌이 아니라 맹자를 읽을 일이다.
4. 정치 개혁 : '중국화'
중국공산당의 이론지 <인민논단>은 10월과 11월, '신정치관'을 특집으로 삼았다. '고별혁명, 초월좌우'를 표방하는 다양한 논문이 발표되었고, 인터넷 댓글은 30만이 넘게 달렸다. 정치개혁이 시대정신임을 당정, 인민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혁의 진로가 일당독점을 타개하는 양당(과점)제나 다당(분점)제로 귀결될 성 싶지는 않다. 오히려 중국공산당은 더더욱 '중국화'되고 있다. 하나의 계층(part)을 대변하는 근대적 정당(party)이 아니라, 천명과 민심을 떠받든다(고 주장하)는 '조정'(朝廷)과 유사해지고 있 는 것이다.
시진핑 집권으로 완비된 집단지도체제와 합의제 권력승계는 조정의 근대화가 일단락되었음을 말해준다. 쑨원과 장제스, 마오와 덩은 만년 황제가 10년 주석에 이르는 이행기의 유사-황제들이었다. 아니 이제는 '근대화'라는 강박적 수식어도 덜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중국적 정치질서가 새 시대에 적응하고 진화했을 따름인 것이다. 임기제와 연령 제한으로 절대권력을 통제하되 , 과거(科擧)제로 관철시켰던 실력주의(meritocracy)만은 면면하게 복원하였다. 시진핑은 청화대 법학박사이고,리커창은 북경대 경제학 박사이다. 박사가 정치가이고, 학자가 행정가이다. 기실 "博 士"부터가 애당초 진나라의 관직명이었다. 상아탑의 지식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방의 성경 <논어>는 '학이시습지…' 로 시작한다. 학(學)과 습(習)이 동방문명의 요체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신을 대신하여 군=사=부(君師父)가 삼위일체를 이룬다. 그만큼 학습=정치의 유산은 뿌리가 깊고 거대하다. 중국의 정치개혁을 전망할 때 서구화보다는 중국화에 무게가 실리는 까닭이다.
당장의 평가는 보류한다. 성패를 예단하기도 이르다. 다만 중화제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또 가장 지속적인 정치질서였음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두 번의 밀레니엄을 지나고도 제국이 반복되고, 정치 질서가 복구되는 경우는 좀체 없었다. 솔직해지자면, 민주정의 미래는 밝지가 않다. 정당에 대한 불신은 도처에 만연하며, 민주정치의 모범이라 여겼던 '선진국'은 하나같이 내리막이다. 그리스의 민주정도, 로마의 공화정도 단막극에 그쳤다. 퇴화한 민주정이 진화된 군주정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대의제를 생략한 직접민주의 약진은 역설적이게도 제정(帝政)과 제법 통하는 구석마저 있다. 정치질서에 진보는 없다. 부단한 적응과 진화만이 있을 뿐이다.
길고 짧은 것은 (오래) 대어봐야 안다.덩샤오핑은 일백년을 기다리자 했다. 저우언라이는 생전에 ' 프랑스 혁명의 공과를 따지기에도 아직은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저들의 역사감각이 대저 이러하다. 20세기를 잣대로 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쉬이 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마침표를 찍지 않았고, 체제경쟁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래서 중국사상계의 동향에 주목하게 된다. 조정(在朝) 만큼이나 '재야'(在野)를 주시하게 되는 것이다. 때를 맞춤하여 '정치유학' 논의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좌우 논쟁과 일선을 긋는 새로운(=오래된) 담론의 분출이다. 그 범상치 않은 조짐에 일백일을 궁리했다. 탓에 격주 연재의 책임을 석 달이나 다하지 못했다. 반성하고, 만회하려고 한다. 앞으로 두세 차례, 민간에서 발신하는 '정치유학'의 허실을 짚어보겠다.
전체댓글 0